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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머리 Jul 24. 2020

나의 영어 실패기

'영어가 제일 쉬었어요'라고 누가 그랬던가..

몇 년 전 홍콩 여행을 갔었을 때이다.

나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0여 년 넘게 영어공부를 해왔지만 막상 외국인과 대화할 때는 그대로 얼어버리는 엉터리 영어 교과 과정을 거친 전형적인 대한민국 사람이다.

그런 내가 첫 해외 자유여행을 결심한 건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티브이에서 젊은 대학생들이 큰 배낭을 메고 여행을 다니며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너무 비싸며 멀고, 가깝고도 가장 이국적인 홍콩으로 가자'

아내와 나는 거침없이 해외여행을 준비했고, 돌 무렵 큰 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비행기에 올랐다. 신혼여행을 제외한 첫 해외여행이었기에 관광지와 맛집, 여행코스 등 나름 빈틈없이 준비다.

역시 홍콩에 도착해 부딪혀보니 둘 다 기본적인 영어회화가 되지 않으니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한 번은 지하철을 잘못타 엉뚱한 장소에 내리게 되었는데 지나가는 외국인(그들이 봤을 때는 우리가 외국인이었겠지만..)에게 길을 묻고 싶어도 알아들을 수가 었으니 구글 맵을 보며 몇 시간을 걸어 숙소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

스마트폰이 있어 여행은 그럭저럭 가능했는데, 아무래도 여행을 제대로 즐기기에는 아무래도 제약적인 일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10년 넘게 영어공부를 했는데 입으로 나오지가 않으니 정말 한심할 따름이었다.


영어 공부를 결심하게 된 것은 단순한 해외여행의 깨달음뿐은 아니었다.

올해만큼은 뭔가 하나는 해내야겠다는 압박감과 욕심 많은 내 성격이 여태껏 잊어먹었던('외면'이라고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영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아이들도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접하게 될 텐데 부모 입장에서도 당연히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일과 육아로 바쁜 일상이지만 시간을 쪼개가면서 공부가 가능할 듯 보였다.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마침내 'XX스쿨'이라는 1위 영어회화 사이트를 가입했다.

1년 과정이었는데 30만 원 넘는 금액으로 영상과 책으로 어디에서나 공부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었다.

처음엔 정말 누구나 그러하듯이 호기 있게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2시간을 확보했다고 가정했을 때 넉넉히 잡아도 5개월이면 끝내는 게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xx스쿨' 성공 후기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나 어린 친구들이 몇 개월 만에 유창하게 영어회화를 하는 영상이 있었다.

나도 열심히 하면 그들 중 하나가 될 거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상을 하며 자신감이 넘쳤다.

한 달 정도는 매일 2시간은 아니더라도 나름 했다. 여기저기 프린트물을 붙여놓으며 눈에 익히려고 노력했고, 시간 날 때마다 영상을 곱씹으며 오랜만에 수험생 모드로 들어갔다.


문제는 사소한 데서 시작했다.

영어를 기본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익혀야 하는데 '공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일상에 지쳐 쉬고 있을 때도 '아.. 공부해야 하는데..'라는 시험을 앞둔 학생인 것처럼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공부로 다가오니 억지로 책상에 앉아 있을 때도 머리와 입이 따로 놀았다.

이건 수험생 기간에도 느껴보지 못한 쓸데없는 압박감과 괴로움이었다.

언어를 익히기 위해서는 단계적인 계획과 목표 설정이 중요한데 그런 부분에서 철저하지 못했다.

윤택한 삶을 위해서 시작한 자기 계발인데 내 일상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점차 영어를 다시 외면하면서부터 일과 육아로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하였다.

안 그래도 부족한 암기력으로 작은 목표를 세우고 1년 2년 3년 10년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자신을 괴롭힌 것이 실패의 주된 원인이다.

이건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닌 성과에 대한 압박감이 실패의 원인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영어는 나의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이다.

'xx스쿨' 회원기간이 두 달여 남은 채 영상은 5%로도 완료하지 못했고 새책은 주인의 손길을 느끼지도 못한 채 손에 닿지도 않는 책장 맨 위칸에 방치되어 있다.

영어를 놓고도 최근 몇 달간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책을 '당근마켓'에 팔 생각도 했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 그렇게는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책은 처분할 생각이다. 책장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을 자책할 바에는 없애는 게 나은 듯하다.

최근 번역 앱도 정확성이 굉장히 높아졌고, 내가 한 말을 외국어로 바로 번역해주는 인공지능이 나온다고 한다니 영어를 굳이 습득 안 해도 된다는 또 한 번의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

그래도 내 아이들은 영어를 잘했으면 하는 건 나의 그릇된 욕심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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