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봄. 당시 일본 국회는 사실상 일본의 '재군비(再軍備)'를 뒷받침하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의 통과를 두고 여·야가 첨예한 대치를 수개월간 이어가고 있었다. 일본 정부 총리대신 '기시 노부스케'와 그를 위시한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강력한 의지로 개정안의 통과를 추진했고 갖은 수를 동원해 정치적 압력을 행사했다.
특히, 5월 19일은 개정안 통과의 결정적 기일이었다. 여당인 자민당 의원들은 비서 인력과 경관대까지 동원하여 개정안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을 위원회 회의장 바깥으로 쫓아냈다. 곧바로 자민당 의원만이 참여한 기습 표결이 이어졌고 잠시 뒤 회의장에서는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 통과'가 선고됐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전형적인 '날치기' 였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4.19 혁명이 일어난 지 꼭 한 달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안보조약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는 일본 국회(1960)(사진출처: 일본 위키백과)
오늘날처럼 정보 전달 수단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지만 '민주주의 농락'에 대한 충격은 일본 전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미 군정을 통해 들여온, 길지 않은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일본이었을지라도 그 싹만은 조금씩 민중의 삶속에 뻗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성난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광장의 상징인 일본 국회 의사당 거리와 수상관저, 미 대사관 주변은 수많은 군중들로 채워졌고 시위는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시위는 '안보조약 개정 반대'라는 당초 목적에서 나아가 반정부, 반미, 민주주의와 평화헌법 수호에 대한 부분까지 폭넓게 아우르기 시작했다. 규모 또한 전국 단위로 퍼져 나갔다. 6월 4일에는 전국적으로 560만 명의 시민들이 집회에 참석했다.
일본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당시 조약 개정안의 총책임자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위대를 제압하고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우익단체들과 폭력단까지 동원했다. 이렇게 동원된 우익단체는 암암리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가며 시위대를 습격하고 폭력을 행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
안보 반대!
6월 15일은 일본 안보반대투쟁 최대의 분수령이었다. 이 날 열린 시위에서는 지난 4일을 능가하는 580만 명이 참가했다. 최대 요지인 국회 의사당 거리에서는 국회에 돌입하려던 대학생들과 경찰이 대치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석했던 22살의 대학생 '칸바 미치코'가 사망하게 된다.(폭력에 의한 사망인지, 시위 중 압사인지에 대한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이후 시위는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극으로 치달렸고 우익단체와 폭력단의 습격, 시위대와 경찰 양측의 대치에 1천 명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1960년 6월 15일, 국회로 향하는 시위대
이처럼 저항의 격렬함이 절정에 달하자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마침내 15일과 18일에 '육상 자위대'의 출동을 명령한다. 이때가 자위대 창설(1954) 이후 최초의 치안 유지 출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방위청 장관은 '시민에게 총칼을 겨누라'는 총리의 명령을 끝내 거부한다. 방위청 장관의 소신이 더 참혹한 유혈사태를 막은 것이다. 반면 총리의 권위는 바닥에 추락했다. 이후 안보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 군국주의의 망령과도 같았던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급격히 힘을 잃는다. 그리고 6월 23일, 기시는 혼란의 책임을 지는 형태로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
1960. 같은 해 일어난 저항의 봄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같은 해 일본에서도 '안보반대투쟁'이라는 일본 민주주의 역사상 최대의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우리나라의 4.19 혁명과 일본의 안보반대투쟁을 온전히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비교할 순 없다. 동기와 과정, 결과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에서는 비슷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좌) 와 아베 신조(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완전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안보투쟁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가 군국주의 일본을 무대로 식민지 수탈 등에 참여했던 A급 전범 용의자였다는 점, 그리고 이 인물의 검은 야심에 일본 시민들이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 '기시 노부스케' 총리가 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라는 점이 흥미롭다. 오늘날 급격한 우경화를 시도하며 한일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가는 아베 총리의 모습이 묘하게 덧씌워지지 않는가?
역사를 되새기는 목적은 역시 교훈의 전달이다. 1960년 일본에서 일어난 시민들의 투쟁에는 분명, 권력에 저항하고 평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오늘날 아베의 일본이 추구하고 있는 개헌, 즉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회귀'가 얼마나 무모한 압제(壓制) 위에 서 있는 주장인지를 깨달으라 촉구하고 있다.
*본 글은 오마이뉴스('19.4.19.)에도 기고된 글입니다. 기사는 본 링크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사 링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7&aid=00022243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