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사전적으로는 비합법적인 수단에 의한 권력의 탈취를 말하는 용어로 원어는 프랑스어(coup d’Etat)에서 유래됐다. 흔히, 군사적 무력을 수반하여 폭력적이고 또한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사회변혁을 도모하는 혁명과는 달리 권력 쟁취에 방점이 찍힌다. 이러한 쿠데타는 다양한 역사 속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으로 '5.16 군사정변(1961)'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특히 5.16 군사정변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 성격이 강한 12.12 군사반란과는 구별되며 이후 기나긴 '군사독재'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짙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근현대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었다. 1936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2.26 쿠데타(二·二六 事件)'가 바로 그것이다. 학술적으로 '쇼와유신'이라고도 지칭되는 이 사건은 당시 일본 내 파쇼적 우익 사상에 전도된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일본의 내대신(內大臣)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포함한 내각 핵심 인사들이 다수 살해되었으며 이에 타격을 받은 일본의 민주정은 쇠락했다. 이에 2.26 쿠데타는 당시 급격히 진행되어 가던 일제의 군국화(軍國化)에 '화룡점정'을 찍었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2.26 쿠데타'는 그 원인과 결과, 주도세력, 기반 사상 등 다양한 요소에서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의 유사점이 존재하며 가끔 비교되기도 한다. 주로 알려진 사실은 5.16 군사정변의 주모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이 일본의 2.26 사건에 결정적인 영감을 받아 쿠데타를 기획했다는 점이다.
똑 닮은 韓·日의 쿠데타들
위 표에서 알 수 있듯, 5.16 군사정변과 2.26 쿠데타는 25년의 시간 차에도 불구, 상당히 많은 유사점이 발견됨을 알 수 있다.
▲군 내부의 파벌싸움으로 촉발된 내분을 중심으로 ▲30대의 젊은 장교들을 쿠데타에 끌어들였다는 점과 ▲합법적인 민주정을 붕괴시켰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엘리트(군인들)'를 중심으로 한 국가(민족) 개조를 꿈꿨다는 공통점들에서 두 사건은 상호 비교연구를 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박정희와 2.26 쿠데타
하지만 우연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유사점이 발견되는 것이 역사적으로 쉬운 일일까? 이에 학자들은 가장 먼저 박정희와 2.26 쿠데타의 관련성에 주목한다. 5.16 군사정변의 주모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소장)이 일본의 2.26 사건에 결정적인 영감을 받아 쿠데타를 기획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박정희의 발언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2.26 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 - 2.26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발언-
*전인권, <박정희 평전>(2006)에서 발췌
2.26 쿠데타에 대한 박정희의 발언과 우호적인 관심은 이러한 증언과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앞의 발언과 더불어 소설가 이병주, '부산일보' 주필이었던 황용주도 박정희가 2.26 쿠데타와 그 주동자들의 천황 절대주의, 국수주의를 추종하는 이야기를 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이병주, 월간조선「대통령들의 초상」(1991), PP 90-91)
2.26 쿠데타에 관여했던 장교들과 박정희가 함께 근무하며 교류한 기록들도 있다.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가 상관으로 모신 '간노 히로시', 일본 육사 시절 구대장 '사카키' 등은 모두 2.26 쿠데타에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박정희와 2.26 쿠데타의 연결점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엘리트주의에 전도된 쿠데타의 수괴들
한 가지 더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2.26 쿠데타'와 5.16 군사정변을 도모한 주모자들의 사상적 공통점이다. 여기서도 박정희가 주장하는 그만의 '쿠데타론', 즉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당위성과 사상은 2.26 쿠데타의 이념과 유사한 부분이 제법 많다.
먼저 '2.26 쿠데타'의 사상적 원류를 제공한 인물은 '기타 잇키(北一輝)'로 알려져 있다. 국민대 한상일 교수는 그를 '초국가적 폭력혁명의 정신적 지주' 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한상일, 쇼와유신 (2018)) 이에 그의 저서 「국가개조안 원리대강」은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에게 바이블과도 같은 이념서로 널리 읽히기도 했다.
이러한 기타 잇키와 박정희, 둘의 공통점은 철저한 엘리트주의자였다는 점에 있다. 기타 잇키는 나폴레옹, 메이지 일왕과 같은 영웅에 의한 국가개조를 강조하고 일반 대중들은 스스로 결속할 저력이 없는 존재로 바라봤다.
박정희의 사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박정희는 그의 저서 「지도자도(道)」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병을 고치는 의사'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박정희의 엘리트주의에 대해 「박정희 평전」을 저술한 전인권 교수는 박정희의 '지도자 중심사상'(엘리트주의)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배제할 수 있는 원리라며 비판했다.
"을(대중)이 병이 들어 갑(엘리트)의 치료를 받아야 할 때에는 의사와 환자란 조건하에 갑은 을의 식사를 제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기 집을 떠나 병원에 입원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 중략...) 금번 군사혁명(5.16 군사정변)은 일종의 수술이다"
*박정희, <지도자도-혁명과정에 처하여>(1961)
군부 쿠데타에 대한 위험한 선망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군(軍)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혁명을 완수할 존재로 바라본 '쿠데타 신봉자' 였다는 점에 있다. 기타 잇키는 황도파 청년 장교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한편 자신들의 궐기를 '군대의 혁명으로서 최대이고 최종'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쿠데타를 뜻 한다. 이에 대한 기타 잇키의 발언 한 대목을 이야기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반역의 칼은 통치자의 허리에서 훔친 군대와의 연락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기타 잇키-
*한상일, 쇼와유신(2010) 에서 발췌
통치자의 허리에서 훔친 군대란 즉 '정규군'이다. 민중이 결속한 혁명군이나 집단이 아닌 정식 군대를 이용한 정부 전복이라는 쿠데타의 기본틀을 이렇게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당시 황도파 장교들이 내각 전복에 뛰어들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쿠데타의 진정한 막후 기타 잇키는 이처럼 젊은 장교들의 정신적 무장을 꾸준히 종용했다.
한편,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즈음에 발생했던 세계 각국의 쿠데타나 군사반란을 연구했으며 자신의 뜻을 실현할 기수로서 '군부'가 가장 적합한 집단이라 확신했다. 이에 1963년 발간한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제4장 '세계사에 부각된 혁명의 각 태상'을 살펴보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비롯한 각 국의 쿠데타와 군사반란을 군사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특히 우호적인 관점에서 서술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가 주는 교훈
결과적으로 2.26 쿠데타와 5.16 군사정변은 공히 민주주의의 파괴와 정의의 쇠락, 군부의 득세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2.26 쿠데타 이후 들어선 일제의 군부정권은 군국주의를 가속화하며 2차 대전의 참화 속으로 아시아 민족을 몰아넣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18년의 집권 기간 동안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휴교령 등의 강제력을 발동하며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다. 한, 일 양국은 수십 년간 말 그대로 군에 의한 정치, 즉 군정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는 역사가 주는 뚜렷한 교훈이 있다. 과거는 반복되지 않지만 미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과 그중에는 2.26 쿠데타처럼 피해야 할 불편한 모델도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기타 잇키는 직접 만난 적이 없지만 이렇듯 역사를 통해 사상을 공유했고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 16일은 찾아왔다. '불법'과 '무력'이 만나 '쿠데타'라는 비극을 민족에게 안겨준 날이다. 그러므로 이 날만은 퇴고의 의미에서 '합법'과 '문민(文民)'의 교훈을 되새겨보자.
*본 글은 오마이뉴스('19.5.16.)에도 기고된 글입니다. 기사는 본 링크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기사 링크: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47&aid=0002227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