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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현 Aug 19. 2019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


일제강점기 당시 후쿠오카현 지쿠호 지역 탄광. 강제동원의 모진 고통을 견디다 못한 어느 조선인이 탈출을 시도하다 일본인 노무관리자들에게 붙잡혀 폭행당한다. 아침 6시부터 오후 1시까지, 결국 그 조선인은 사망했다.


이 이름 모를 한 조선인의 억울한 사연은 끝내 규명되지 못하고 망각의 수순을 밟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일본인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い)'씨. 그는 끈질긴 추적을 통해 조선인을 때려죽인 일본인 노무관리자를 찾아내 자백을 받아냈다.


이처럼 '하야시 에이다이'씨는 평생에 걸쳐 '조선인 강제동원'의 참상과 그 속에 감추어진 폭력을 조사해온 기록 작가다. 하지만 그가 '일본인'이고 전문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 있었다는 점 등에서 연구자들을 제외한 일반 대중에는 그 활약이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이에 그의 생애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한국 대중에 알리고자 한 작품이 2017년  ‘EBS 국제다큐영화제’에 상영됐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록 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 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공개된 지 이미 2년의 시간이 지났다. 홍보를 통한 영화의 흥행이나 파급적 측면을 기대할 순 없다. 하지만 최악의 한일관계 속에 광복절을 맞는 오늘, 역사적으로는 적절한 시의성이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작품은 조선인 강제동원의 참혹한 실상과 애환, 전쟁의 비인간적 측면을 잘 보여준다.


비국민(非國民)의 자식, 조선인 노동자를 이해하다

'하야시 에이다이'(이하 하야시)가 조사한 후쿠오카현 민생과 자료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당시 후쿠오카 지역에만 171,000명의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 그중에서도 후쿠오카현 '지쿠호' 지역 탄광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소 광업' 등 전범기업에 의한 악명 높은 조선인 강제동원과 착취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노동자 중에는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어린아이도 있었다. 막사 같은 오두막에 800명이 수용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당시 하야시의 부친(하야시 도라지)은 '고미야 하치만구'라는 신사의 신관으로 있었는데 이렇듯 지옥 같은 노역장에서 도망쳐오는 조선사람들을 숨겨지고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분위기는 조선인을 도와주면 '국적(國賊)' 혹은 '비국민(非國民)'이라는 말을 피하기 힘들 정도로 조선인의 아픔이나 차별에 대해 냉담했다고 한다. 결국 조선인을 도와준 행위는 일본 경찰 당국에 적발되었고 하야시의 아버지는 연행돼 모진 고문까지 당한 결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러한 부모님의 삶의 방식은 하야시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국적', '비국민'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조선인들에 대한 인간적인 마음을 버리지 않았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로서 똑같이 '비국민의 아들'이라는 비난을 감내해야만 했던 하야시 본인. 이 모두 '일본제국'이라는 국가의 폭력이 낳은 희생자였다. 하야시는 이때 느낀 권력에 대한 '저항심'을 토대로 전쟁을 위해 타국 땅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처지와 아픔을 이해했다.


하야시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어떤 폭력에 시달려야 했는지에 대해, 어릴 적 자신이 친하게 지냈던 조선인 광부 '안용한'씨의 증언 녹취를 들려준다. 그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돈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호슈 탄광의 노동자. 안용한 씨의 녹취에는 당시 일본 노무담당자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한 폭력의 실상 담겨있다.


대일본제국 군인은 밥도 안 먹고 싸운다..이런말을 하면서 때렸어···대일본제국 군인은 전장에서 친구가 죽으면 그 뒤에 숨어 적과 싸운다. 너희들(조선인 노동자들)은 한 명 죽었다고 몰려서 울고 있으니 그래서야 전쟁을 할 수 있겠느냐!

*영화 中, 안용한 씨의 녹취 부분


녹취록 속의 안용한 씨는 동료들의 죽음 앞에 울고 있는 자기들에게 일본 노무담당자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폭언을 내뱉으며 매질을 했다며 울분을 토한다. 하야시는 안용한 씨 같은 조선인 노동자들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일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었다며 그들이 얼마나 고통에 사무쳐 있었는지를 대신 이야기한다.


그는 영화를 통해 강제동원의 현장을 보여주려고도 노력한다. 실제 탄광의 갱도 입구, 조선인 숙소가 있었던 자리,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을 하기 위해 오르내렸던 일명 '아리랑 고개' 등 과거의 현장을 보여주며 실증의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하야시는 폐암으로 거동이 힘든 상황에서도 조선인 광부들의 유골이 묻힌 '타가와 휴가 묘지'와 '아소 요시쿠마 탄광터'를 걸으며 그들을 추모했다.


그들은 서러운 눈물을 흘렸을까요? 세상을 떠난 광부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네요.


하야시의 나지막한 회한이 적막하고 스산한 요시쿠마 탄광터를 스쳐간다. 참고로 후쿠오카현 게이센마치에 있는 '아소 요시쿠마 탄광터'의 무연고 묘지에는 504구의 유골이 발견, 상당수가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 유골일 것으로 추정 돼지만 '아소 그룹'은 탄광 및 강제동원과 관련이 없다는 발뺌을 지속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인 기록과 증언들은 <강제연행·강제노동-지쿠호 조선인 광부의 기록>,  <사라진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  등 하야시가 집필한 르포를 통해 세상에 공개돼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부분이 바로 문제다"-하야시 에이다이-

1945년 5월 23일 야간, 일본제국 공군 제62전대가 주둔하고 있던 후쿠오카 다치아라이 비행장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화제가 발생, '가미카제 특공'을 준비 중이던 중폭격 특공기, '사쿠라 탄기'가 불에 타버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다.


특공작전 출격 직전 발생한 예기치 못한 사고. 당황한 참모본부는 사건을 신속히 '방화'로 결론짓고 범인을 색출하기 시작한다. 용의자는 단 하루 만에 검거된다. 이름은 1926년생의 '야마모토 다츠오', 당시 19세의 나이로 본 62 전대에 소속된 '조선인' 통신병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 '야마모토 다츠오'는 조사도 없이 군법회의로 넘겨진다. 얼마 뒤 야마모트는 자신이 방화범이라며 강제적인 자백을 한다. 모진 고문이 있었을 것으로, 하야시는 추정했다. 야마모토마지막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8월 8일,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된다.


하야시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 묻힐뻔한 이 사건의 진상이 접근했다. 이 방화사건의 진범은 누구였을까? 야마모토 하사가 '조선인 출신이라서' 누명을 쓴 것이 아니었을까에 대한 추적을 시작한 것이다. 끝없는 탐문과 생존자의 증언을 모은 결과 하야시는 당시 야마모토 하사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사건 전날 야마모토 하사와 함께 있었던 동료, 기술담당관, 주변 사람 등의 생생한 증언을 확보하고, 그를 범인으로 확정하고 몰아붙였던 당시 참모본부의 비인간적 술수 등을 파헤쳐나간 것이다. 이에 하야시는 야마모토 하사가 조선인이라서 내려진 사형 판결이며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의식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짚었다. 하야시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일본은 전쟁을 시작한 책임이 있는데 조선민족의 한 사람이었던 야마모토 하사를 어째서 일본인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는가. 이런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분노가 치밀어서 속이 뒤집어진다.


사실 조선인 특공대에 관한 주제는 한국인에게나 일본인에게나 상당히 민감한 주제다. 조선인으로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야시 에이다이는 이러한 영역에도 거침없이 발을 내딛는다.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항'이 근본적으로 일제가 자행하고 있던 '국가적 폭력과 차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인의 전쟁책임과 원죄

영화를 통해 하야시는 시종일관 일본인의 책임과 원죄를 거론하면서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를 자문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내가 할 일'이라며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책을 냈을 때는 일본 우익들로부터 협박 전화까지도 수시로 받았다는 하야시 에이다이. 영화 속에서도 이미 폐암에 걸려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그는 '이것이 마지막 승부'라며 최후의 불꽃을 태워낸다. 만년필을 들지 못해서 손가락에 테이프를 붙이고 글을 쓴다. 항암제도 중단하면서 말이다.


병이 악화되는 것을 알지만 지금 써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건 나의 싸움.


안타깝게도 그는 지난 2017년 9월 폐암으로 별세했다. 그가 생전 남긴 저서는 <강제연행·강제노동-지쿠호 조선인 광부의 기록>, <증언 사할린 조선인 학살사건>, <지쿠호·군함도-조선인 강제연행을 돌아보다>, <실록 증언 다치아라이 사쿠라 탄기 사건 -조선인 특공대원 처형의 어둠> 등 57권에 달한다. 2017년 8월에는 그가 직접 수집하거나 생산한 기록물 사본 6천여 점이 국가기록원을 통해 공개돼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가 살아있다면 오늘날의 한일관계, 특히 강제징용 자체를 부정하며 '노동자 스스로 지원했다'는가 '착취와 폭력은 없었다'는가 하는 일본과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어릴 적 직접 목격한 강제동원의 참상, 상처 입은 조선인들을 도와주다가 고문당해 죽은 아버지, 기록하고 증거로 남긴 조선인들의 음성, 억울하게 죽거나 폭력으로 희생되거나 한 조선인들의 무연고 묘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며 꾸짖지는 않을까 조심히 예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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