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창비 주간논평>에 기고한 글 입니다. 2월 28일에 발행되었습니다. 원문 확인은 여기 클릭
거칠지만 한가지 가설을 세워보자. ‘평화는 전쟁에 의해 퇴출된다.’ 혹자는 강하게 반발할 것이다. 전쟁의 역사만을 인간의 역사로 볼 수 없으며 절제와 양보, 협상, 고난 극복을 위한 우애 등 이성의 조화로운 작용이 일구어낸 평화의 역사도 분명 존재한다면서 말이다. 일리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평화가 전쟁을 몰아내는 따뜻한 장면들을 적지 않게 목격해왔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야만을 몰아냈고 무력행사를 방지하는 국제적 규범을 만들었으며 인권을 재정립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평화주의의 가능성은 연약한 잎사귀를 틔워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날은 여전히 어둡다.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전쟁의 포성이 메아리치고 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12월 기준 60건의 분쟁이 진행 중에 있으며 특히 작년 2월 24일 발발한 우끄라이나전쟁으로 평화주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됐다.
전쟁은 ‘힘’을 이성의 통제에서 분리시키는 중요한 촉매가 된다. 즉 무력의 사용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대하게 ‘정상화’시킨다. 심리학자인 제임스 힐먼은 이같은 정상화를 일컬어 “최악의 공포가 최대의 선과 결합”하는 끔찍한 상황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번 우끄라이나전쟁에서도 세계 여러 나라들은 ‘평화’의 명분 아래 이성적 논의가 필요한 수많은 사안들을 기꺼이 폐기해버렸다. 예를 들어 미국과 러시아는 각각 핵무기 사용에 대한 엄격한 원칙들을 유명무실화했고 전선에서는 대량살상 무기들(집속탄, 소이탄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중에서 투하되고 있다. 한편 독일과 일본은 전범국으로서의 ‘윤리적 멍에’를 벗어던지고 군비 확장에 날개를 달았다. 러시아라는 새로운 전범국가가 탄생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유하자면, 전투에 나간다는 조건으로 사면을 약속받은 ‘죄수 부대’들의 야만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으로는 평화군축, 화해, 데땅뜨에 관한 담론들이 위축됐다.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현실론자’들로부터 호된 뭇매를 맞았다. 특히 전쟁 발발 당시 대선 정국이던 한국에서는 우끄라이나의 ‘실패’가 한국의 ‘위기’로 순식간에 등치되는가 하면 우끄라이나전쟁을 한국전쟁과 대비시키는 교훈론적 기사들이 언론을 통해 앵무새처럼 반복됐다. 위정자들은 오랜만에 국민들의 ‘안보불감증’을 나무랄 수 있었고 이에 발맞춰 포털에는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식의―전쟁의 참상을 위로하기엔 그 용례가 적절치 않아 보이는―격언들이 현수막처럼 내걸렸다. 이처럼 우끄라이나전쟁 1년은 ‘평화는 전쟁에 의해 퇴출된다’는 가설을 훌륭히 증명해낸 듯 보인다.
반면 ‘힘에 의한 평화론’은 화려하게 귀환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평화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고 믿는다. 요컨대 압도적 힘의 우세에 근거한 평화만이 진짜 평화이며, 대화와 타협이라는 선택지 또한 적이 우리의 무력을 ‘두려워하여’ 잠정적으로 굴복·억제된 상태에서야 정상 가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외에는 불안정하고 위선적이며 무엇보다 굴종적인 가짜 평화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들은 무력의 적극적 사용에 개방적일 수밖에 없는데 일단 표면적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므로 자위(自衛), 즉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무력의 ‘합법성’(국제연합헌장 51조)을 확대해석하고자 노력한다. ‘선제타격’ ‘응징 보복’ ‘압도적 전쟁준비’와 같은 소름 끼치는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이유다.
앞으로도 이들의 주장이 완전 폐기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힘’의 숭배자들은 이전에도 늘 존재했다. 우끄라이나전쟁은 이들의 논리를 뒷받침할 하나의 사례를 제공했을 뿐이다. 힘은 전쟁의 공포에 빠진 사람들의 고통을 해소시켜줄 효과 빠른 진통제로 기능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진통제에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바로 중독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어느 순간 자신의 불안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돼버리는 망각이 도사리고 있다.
가까운 예로 한반도의 우리들은 분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그 악순환 속에서 살아왔다. 군사력은 세계 6위를 자랑할 만큼 강대해졌고 세계 굴지의 방산 수출국으로 ‘K-방산’의 신화를 노리고 있다. 정부는 수시로 군의 위용을 선전하고 육중한 훈련용 미사일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온갖 무기가 동원된 화력 시범을 선보여 대중들을 열광케 하고 힘의 숭고함을 자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수십년째 ‘불안’하다. 마치 평화가 우리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듯 말이다(힘의 숭배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평화’라며 빙긋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병에 과연 치료약이 존재할까? 안타깝지만 아직은 없는 듯하다.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그 분명한 증거다. 다만 이러한 중독을 개선할 완화제 정도는 있다고 믿고 싶다. 필자는 그것이 바로 평화주의라고 생각한다. 이는 당장의 무장해제를 촉구하면서 우끄라이나 인민의 자결과 저항의지마저 외면하는 ‘범우주적’ 박애의 정신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을 경계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려이며 전쟁의 비극과 그 망각에 맞서려는 항거의 몸부림이다.
평화주의는 높은 상아탑 속 담론이 아니다. 평화주의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관심과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해방 이후 민간인 학살 등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전쟁의 고통’은 국익(國益)이라는 압제적 담론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몽환을 일깨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우리는 피해자들의 호소를 듣고서야 비로소 중독증에서 벗어나 ‘잠시 멈춤’을 할 수 있다. 국제질서라는, 보이지도 않는 힘의 나선을 걷어내고 ‘인간’이라는 직접적인 실체를 마주한다. 그리고 평화를 생각하게 된다.
가해의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 법원이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배상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 판결이 있기까지 수많은 시민과 단체들이 평화를 화두로 연대의 길을 걸어왔고 특히 그 과정에서 참전군인 몇몇의 용기 있는 증언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게 우끄라이나전쟁은, 일전불사의 마지노선을 향해 달려가는 힘의 숭배자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가해처럼 다가오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평화시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 베트남 참전군인의 고언을 인용하고자 한다. “전쟁은 위대한 서사시와 영웅을 낳는다고? 개뿔 같은 소리 마라. 전쟁은 씻을 수 없는 고통과 피눈물만 남긴다.”
최우현 / 전 민족문제연구소 주임연구원
2023.2.2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