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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여행기 : 2일 차

by 전영웅


느지막이 일어나 호텔 조식을 먹은 다음, 픽업을 오겠다는 처남을 기다리며 바로 옆에 위치한 플라자 싱가푸라 몰에 들러 조카들의 선물을 구입했다. 싱가푸라(Singapura)는 싱가포르 개척 전의 섬 이름이다. 사자를 발견한 도시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이 섬에는 사자뿐만 아니라 20세기 초까지 호랑이가 살았던 섬이다. 개척 시기 싱가포르의 역사를 보면, 개척지에 밀려 점점 활동영역이 좁아진 호랑이가 원주민들을 습격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개척 당시 현재 싱가푸라 쇼핑몰이 있는 오차드 로드까지 호랑이가 출몰해서 사살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차드 로드는 지금은 쇼핑몰로 유명한 거리이지만, 20세기 초에는 개척지의 변두리 지역이었다. 그리고 1904년 싱가포르의 마지막 호랑이가 이곳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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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국립박물관에 입장했다. 이곳은 싱가포르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정리한 박물관이다. 약 200년 정도의 싱가포르 역사는 크게 개척 시기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독립 이후의 시기로 나뉜다. 싱가포르 개척의 첫 주역은 스탬포드 래플스이다. 동인도회사에 취직하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오가며 일종의 관리 감독관 역할을 하던 영국인은 버려진 섬 싱가포르를 주목하고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말레이 반도의 가장 아래의 작은 섬은 영국인에 의해 개척이 시작되고, 윌리엄 파커와 존 크로포드로 이어지며 싱가포르는 개척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싱가포르의 일제강점기는 3년에 지나지 않는다. 말레이 반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온 일본군에 섬이 함락된 이후, 섬 이름은 쇼난토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해방 후 싱가포르는 영연방 국가 형태의 식민지로 존재하다가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합류한다. 그러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과의 갈등으로 탈퇴당하여 본의 아니게 하나의 국가로 독립한다. 이후 리콴유 총리의 영향력 하에 근대 산업발전 시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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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플스는 이상주의자로 자유무역을 신봉하고 노예제와 아편이나 도박을 통한 수익을 반대했다. 개척 초기 극소수의 영국인 관리들은 세수나 식민지 운영자금이 부족해서, 이 섬에 정착하여 무역으로 부를 쌓아가는 중국인들보다 가난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정착한 중국인들이 지금도 싱가포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독립 이후 리콴유 체제에서 고속 성장을 거쳐가는 사회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급격한 고도성장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리콴유 시대의 산업발전 모습을 정리해 놓은 전시관을 둘러보는데, 마치 우리나라 70-80년대 고속성장 시대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리콴유는 독재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그것 역시 박정희와 전두환 등을 겪은 우리와 매우 유사하지만, 리콴유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군인의 무식함으로 무장하여 서구 자본을 등에 업고 별생각 없이 산업발전을 추진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리콴유는 노동변호사 출신이자 인민행동당의 수장으로 활약하며 래플스의 이상주의를 이어나가고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산업발전과 국가체제를 만들어 나갔다. 예를 들어, 래플스가 도박이나 아편 사업에 의한 세수증대를 반대했듯이 리콴유도 도덕적 정서에 기반한 사회질서를 강조했다. 또한, 인간의 욕구는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에, 공무원의 급여를 매우 높게 책정하였다. 대신, 공무원이 부정을 저지르면 패가망신에 이를 수 있는 강력한 처벌을 하도록 장치했다. 현재 총리는 리콴유의 아들인 리센룽이 이어받았다. 세습이라는 비판 역시 독재의 연장선에서 나타나지만, 리센룽은 나름의 정치교육과 훈련을 받고 실제 정치영역에서 오랜 경험과 연륜을 쌓아 현재의 싱가포르를 이끄는데 별다른 결점을 보이고 있지 않다. 거기에, 리콴유가 설계한 사회체계가 앞으로 20년 이상 싱가포르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신뢰가 리센룽의 집권에 별다른 반론을 만들지 않았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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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독재라는 비판에서는 우리나라나 싱가포르나 자유롭지 않다. 독재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독재를 하더라도 누가, 어떤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어가는가에 따라 모습은 확연히 다름을 깨달았다. 권력에 눈이 먼 군인의 별생각 없는 추진력과,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상을 분명하게 품고 정교하게 체계를 설계하고 만들어가는 이의 추진력은 분명 다른 결과를 낳는다. 싱가포르가 완벽하고 이상적인 국가는 아니지만, 초고속 성장 이후 현재의 시점에서 놓고 볼 때 싱가포르가 우리나라보다 좀 더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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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돌아보고 바로 옆의 포트 캐닝 공원에 올랐다. 지금은 한가운데 방벽으로 둘러싸인 저수지가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하지만, 초기 개척 시기에 영국 개척자들은 이곳에 그들의 정부와 숙소 건물을 세웠다. 싱가포르 역사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중국인 상인들보다 가난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열악한 나무집에서 살아가며 소수 영국인의 특권만으로 이 섬에서의 기득권을 누리던 이들의 터전이었다. 이 상징적인 공간은 지금 한적한 공원이 되었고, 한적함은 쓸쓸함이거나 별달리 둘러볼 것 없는 심심함으로 변해 있었다. 한낮의 더위에 일부러 찾은 공간치고는 무척 재미없는 언덕인 것이다. 공부 좀 하고 들르니 그걸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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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일본과 대만식의 퓨전 샤브샤브로 해결하고 우리는 조호르바루로 넘어갈 채비를 하였다. 처남의 차를 타고, 최근 싱가포르에서 현지인들의 나들이 코스로 부상한다는 섬 안쪽 카페거리를 들러 구경했다. 미군부대가 있던 자리를 풍경 그대로 간직하여 공간을 활용하거나 현대식 건축으로 꾸민 언덕 동네였다. 비쌀 건 분명하고 배가 부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둘러만 보고 나왔다. 투아스 국경으로 가는 길에 나는 난양 공과대학의 하이브 건물을 보고 가자고 하였다. 난양공대는 1958년 중국 화교자본으로 난양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대학이었다. 싱가포르 중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던 이 대학은 설립자의 방만한 경영과 개인영지처럼 생각하는 무지함에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추지 못한 데다가 좌익 학생운동의 근거지가 되면서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쓸모없는 학위 수여자들을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았었다.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을 거쳐 현재는 세계 100대 대학 안에 드는 명문대이자 의대가 없는 아시아 종합대학 중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꼽힌다고 한다. 하이브는 난양공대 안의 건물인데 재학생이 설계하여 그대로 만들어진 개방형의 특이한 건물이다. 벌집 같은 느낌의 외관에 골격만 갖추고 원하는 공간에는 유리창호로 공간을 분리시켜 강의실이나 토론실 또는 학습실로 활용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의 기후와 잘 어울리면서도 자유로움과 진지함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곳곳에서 탁자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유리창 너머 그룹으로 무언가를 토론하고 강의하는 모습이 건물 자체의 자유로움과 개방성에 잘 어울렸다. 이 건물은 들러보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럽고 분위기가 무척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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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스 국경으로 향하는 길은 누군가의 퇴근시간과 비슷했나 보다. 국경으로 향하는 오토바이 무리들이 엄청났다. 말레이시아보다 더 많은 급여를 주는 싱가포르에서 일하기 위해 날마다 국경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몇 번 와 보았다고 이제는 그 행렬의 모습이 익숙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어떤 깊이를 한국에서와는 조금 다른 풍경으로 관찰하고 느낄 수 있었다. 국경에서 두 번의 여권심사를 받고 말레이시아로 들어가는 일도 이제는 익숙해서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말레이시아 연방이 아주 가난했던 나라 싱가포르를 내쳤을 때, 그들이 뒤바뀐 현재의 처지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더 많이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는 더 저렴하게 쇼핑하거나 생필품을 사기 위해 국경을 넘어 다니는 인민들의 삶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없이 불편하고 고단하기만 하다는 사실 역시 달라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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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에 의해 개척되어 별다른 저항 없이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도 저항이나 피 흘림 없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나라의 시작이 영국인에 의해 이루어졌고, 대다수의 중국인과 소수의 말레이, 인도, 부기스 인들이 들어와 무역과 장사를 하며 사적 부를 바탕으로 경제가 이루어졌다.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보급이 끊어지기 직전의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지 않았을 수 있었던 안타까움과 아이러니의 일제 수탈 기를 겪었고, 해방 역시 저항이 아닌 외압에 의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원주민은 있었으나 존재 감 없이 외국인들에 의해 경제와 사회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말레이시아 연방과의 갈등의 뿌리가 되어 원하지 않는 독립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나라였다. 지금은 동남아 무역의 중심지로 급부상하여 최상위권의 국가 경제력을 자랑하는 나라가 된 섬나라이지만, 말레이시아에 물과 자원을 지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약점도 동시에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런 나라를 조호 해협을 발 밑에 두고 바라보며 해변가 식당에서 저녁으로 칠리크랩을 먹었다. 싱가포르에 비하면 물가와 먹거리가 무척 저렴해서 부담이 없는 조호르바루였다. 그래서 마음이 참 편안했지만, 헤엄치면 닿을 것 같은 바로 옆의 싱가포르 공업지대 불빛을 바라보는 마음에는 왠지 아쉬움과 정감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좁다란 도시국가에서 갈 곳도 비싸서 부담스러웠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이 나를 그런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먹지 못한 두리안까지 채워 1일 1 두리안을 해결하고 처남의 집에 들어가 여정의 이틀째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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