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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 싱가포르-말레이시아 여행기 : 1일 차

by 전영웅

나에게 창이공항은 정적과 고요함으로 각인되어 있다. 출입국 심사 직원들의 새벽 피곤함과, 드문 사람들 사이로 흐르는 공항 홀의 정적은 나직했다. 의자마다 눕거나 기대어 새벽잠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공항을 가로질렀다. 공항 문을 나서면 덥고 습한 공기가 나를 부드럽게 덮쳤다. 열대의 더운 공기 속에도 새벽의 쾌적함은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언제나 새벽의 창이공항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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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일간의 여정이 예정되어 있었다. 아내는 아들과 함께 전날 조호르바루에서 싱가포르로 넘어왔다. 싱가포르에서 1박을 하며 이틀간의 여행을 하고, 조호르바루로 넘어가 나머지 이틀을 머물 예정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심카드를 구입해야 하는데, 싱가포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호르바루에서도 있어야 하니 심카드는 singtel보다는 starhub가 유리했다. starhub는 주변 여러 나라에서도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카드를 구입하니 점원은 친절하게도 내 핸드폰을 가져가 직접 교환과 세팅까지 마무리해주었다. 나는 바로 공항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아내와 아들이 머물고 있는 시내 호텔로 향했다. 어디나 그렇듯 공항 주변은 24시간 내내 차들이 많다. 세 번의 방문으로 이제는 익숙한 창밖의 도로 풍경들을 다시 바라보며, 시내로 들어설수록 점점 한산 해지는 도로를 느끼며 20여 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 아내는 로비에 내려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 반 만의 재회, 우리는 뜨겁게 포옹하며 키스를 나누고 아들이 잠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잠자고 있는 아들 녀석을 꼭 안아주었더니 아들 녀석도 내가 온 것을 알아채고 꼭 껴안는다. 살집이 그대로인걸 보니 이곳 생활도 나쁘지는 않았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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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연해질 때까지 잠깐의 잠을 잔 뒤 짐 정리를 하고 숙소에서 나왔다. 다음 숙소인 호텔에 가서 얼리 체크인을 한 뒤 잠깐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오차드 로드의 싱가포르 매니지먼트 대학과 싱가포르 국립박물관을 마주하는 호텔이었는데,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포트 캐닝공원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하기 전에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문화 역사에 대해 공부를 했었다. 말레이시아 문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다가오는 내용은 없었지만, 싱가포르는 역사면에서 자세히 기술한 책을 읽게 되어서 싱가포르 역사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포트 캐닝 공원을 꼭 가보고 싶어서였다. 직접 가보니 국립박물관까지 같이 있어서 싱가포르 200년의 역사를 둘러보는 데엔 아주 좋은 위치였다. 그러나, 첫날부터 그리고 이 무더운 날에 바깥을 돌아다니며 나 혼자 좋자고 읽은 것들을 되새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열대지방의 낮시간이란, 바깥나들이를 최대한 자제하는 것이 일상의 습관처럼 되풀이되는 시간이다. 나는 위치만 확인하고 곧바로 점심을 먹으러 이동하였다. 이동은 되도록이면 ‘그랩’이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우버와 같은 개념의 개인차량 운송사업인데, 택시는 지정된 자리에서 승하차가 가능한 반면 그랩은 아무데서나 승하차가 가능하고, 미리 결제된 비용만 지불하면 되어서 차가 밀리거나 멀리 돌아간다고 해서 비용이 더 늘어나지 않아 좋았다. 점심은 리젠트 싱가포르 호텔의 ‘Basilico’라는 뷔페에서 먹었다. 애피타이저와 디저트로는 정말 최고의 뷔페가 아니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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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대로 열대지역의 낮은 돌아다니기엔 적합하지 않다. 사실 싱가포르가 서울이나 제주보다 덜 덥고 쾌적한 날씨였다. 그렇지만 더운 건 더운 거라서, 사람들은 쇼핑몰 안에서만 움직였다. 우리는 부기스 스트리트로 가서 하지 레인 거리와 아랍 스트리트를 구경하기로 했지만, 무더위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랩으로 부기스 역으로 이동한 후에 바로 찾은 건 쇼핑몰이었다. 해가 좀 기울어지길 기다리며 쇼핑몰에서 버티기로 했다. 커피를 마시다 쇼핑몰을 구경하다 발견한 것이 오락실이고 오락실 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DDR이 있었다! 네 개의 패드를 밟는 고전 스텝 게임! 18년이 지났지만 패드는 그대로이고 음악만 진화해 있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올라가 열심히 패드를 밟았다. 예전 같은 몸놀림은 안 나오지만, 익숙한 움직임으로 게임 도중 끝나버리는 불상사만은 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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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기울었지만 더위는 여전했다. 우리는 몰에서 나와 래플스 병원을 향해 걸었고, 맞은편 오래된 동네의 하지레인 구역으로 들어갔다. 부기스 지역에 속해 있으니 아마도 남쪽 섬의 부기스 인들이 정착했던 동네일 것이고, 오래되어 버려진 듯한 골목에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활성화된 골목이라고 한다. 그 좁은 골목에 수많은 사람들이 빼곡히 걸어 다니니 더운 데다 복잡할 수밖에 없는데 2층이라고 해도 나지막하고 좁다랗게 줄지어 선 건물들은 색상도 모양도 이색적이었다. 혼자라면 어디든 들어가서 맥주 한 잔 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도 없어 복잡하고 더운 불편함을 세븐일레븐 편의점에 들어가 에어컨 아래에서 벗어냈다. 바로 옆 골목은 아랍 스트리트로 아랍 사람들의 장신구나 카페트나 옷가지 등등을 파는 동네였다. 차라리 이곳이 더 이국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아내는 무언가를 하나 사 보려 물건들을 둘러보았는데, 관광객 상대 장사인지 물건값이 생각보다 비싸다고 했다. 나는 카펫과 좁다란 통로와 장식등들이 모여 연출하는 이국적 풍경에 잠시 빠져있다가 술탄 모스크를 구경하고 도로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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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랩을 이용해서 우리는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향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관광지는 되도록 피해 로컬 분위기가 물씬한 곳을 찾아다니려 했지만, 그럴만한 정보도 부족했고, 덥고 좁다란 도시국가에서 어딘가를 돌아다니기에는 기후도 공간도 매우 열악했다. 결국 남은 시간을 채울 것은 관광객 모드로 다니는 것이었고, 지난번 싱가포르 플라이어를 타면서 봐 둔 가든스 바이 더 베이였다. 그러나, 관광객 모드로 관광지를 다니는 것 역시 나름의 성취가 있다. 가든스 바이 더 베이가 그랬다. 덥지 않고 쾌적한 돔 안에는 온갖 열대 식물들이 종류별로 식재되어 있었고, 그 사이를 걷는 일은 가벼운 기분으로 감각을 씻어내고 전환시키는 과정이었다. 플라워 돔과 클라우드 포레스트 모두, 각각의 테마로 쾌적한 공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인상적이었는데, 물과 식물로 둘러싸인 거대한 오름 같은 공간을 쏟아지는 폭포와 안개와 식물들 사이로 위에서 아래로 걸어내려 오며 산책하듯 걷는 과정이 좋았다. 열대의 식생을 실내로 끌어들여와 인간의 쾌적한 환경과 조화롭게 어우러 구성한 것 역시 신기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두 생물의 온도와 습도 조건을 가장 이상적인 접점을 찾아 실내에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다. 내가 관광객 모드를 끝까지 외면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이 광경 안에서, 나는 다시 경험해 보아야 할 건 해 보아야 한다는 배움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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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의 복잡한 다운타운 코어를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 일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차는 당연히 밀렸고, 택시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가 아닌 택시 승강장에서 내려주었다. 클락키의 유명한 송파 바쿠테를 저녁으로 선택해서 이동한 것이었는데, 우리는 클락키 안쪽 택시 승강장에서 비싼 택시비를 주고 내려서 한동안을 걸어야 했다. 송파 바쿠테는 작년에도 와서 먹었던 곳인데,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한번 찾은 것이었다. 작년에는 식사시간이 아니어서 바로 자리를 잡고 먹었는데, 이번엔 줄을 서서 30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이 맛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줄을 서는 것을 싫어하는 내가 그대로 기다려 자리를 잡고 기어이 그 육수 맛을 보고야 말았다. 육수가 리필이 된다는 점은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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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우리는 길을 건너 클락키로 걸어 들어갔다. 맥주 한 잔 하러 들어간 것인데, 싱가포르 강을 끼고 조성된 여러 펍 거리는 낭만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천편일률적이었다. 수제 맥주를 한다는 집이 있어 들어갔지만, 주문한 시저 샐러드도 생기는 없었고, 주문한 수제 맥주 샘플러도 맛은 별로였다. 클락키는 그저 분위기였다.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역사를 공부하니 지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클락키는 싱가포르 자유무역의 태동기에 창고가 밀집된 지역이었고, 조금 더 바다 쪽으로 나가 보트키는 배들이 정박했던 곳이었다. 그 뒤로 바로 보이는 언덕이 포트 캐닝 언덕이고 개척 당시 정부 건물들은 이 언덕에 모여 있었다. 지금의 다운타운 코어나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매립으로 형성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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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더 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아들 녀석은 빨리 호텔로 들어가자 성화였고, 우리도 이제는 지쳐서 마음만 있었지 무언가를 더 하기에는 무리였다.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역시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해 두어야지 다리가 떨리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호텔 일층의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들고 룸으로 들어갔다. 하이네켄 싱가포르 에디션이 있어 집어 들었는데, 약간 달달하면서 맛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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