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덤하려 했지만 몸은 그러하지 못했다. 차분하게, 계산하며, 여행에 필요한 짐을 챙겨 정리하고, 여행 동안 비어 있을 집을 정리했다. 움직임 자체에 조금은 들뜬 마음이 배어 있었다. 여행 출발 전날, 퇴근 후 냉장고에 남아 있는 밥과 반찬을 정리하며 저녁을 먹었다. 홀로 있으며 잘 건드리지 않았던 야채칸의 상해 가는 식재료들을 꺼내어 정리하고, 설거지 후에 쌓인 쓰레기들과 함께 클린하우스에 버렸다. 남아있는 빨래 거리들을 세탁기에 넣어 돌렸다. 여행기간 내내 집에 홀로 있을 라이 녀석에게 미안함을 담아 함께 산책에 나섰다. 집 앞의 바닷가 포구를 함께 돌며 산책을 마친 후, 라이의 밥을 부탁한 친구들이 수월하게 밥을 줄 수 있도록 녀석의 사료통을 창고 바깥으로 내어 두었다. 여행용 가방을 꺼내고 여권과 국제 운전면허증을 먼저 챙겼다. 옷가지들과 아내가 부탁한 가져갈 것들과 조카들 선물을 가방에 넣었다. 짐을 꾸리는 건 의외로 쉬웠다. 기내용 여행가방과 노트북을 담은 배낭, 그러나 한동안 사람의 기척이 없을 집을 둘러보고 정리하는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타났다. 건조대에 방금 끝난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 널고는 잠을 청했다.
새벽에 맞추어 놓은 알람에 잠을 깨서는 텃밭에 물을 주었다. 한동안 물을 주지 못할 텐데, 이제껏처럼 비가 오지 않는다면 폭염의 연속에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부터가 앞섰다. 물을 주는 나를 바라보는 라이는 이런 일상이 한동안 끊길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먹다 남은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오래 방치하면 상할 것들을 전부 없앴다. 작은 창 두 개만 열어두고 창문을 블라이드로 전부 가렸다. 문단속을 하고 출근했다. 퇴근하면 바로 가방들을 챙겨 택시를 타면 되게끔 했다.
휴가, 연휴라는 단어는 나에게도 익숙함과 기대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이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해외로 나가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다. 들뜬 시간이라기보다는 때가 되면 해야 하는 어떤 반복 같은 것이고, 오랜 시간 간격으로 해야 되는 일상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반복 같고 일상 같은 이 시간을 맞이하는 나의 몸은 들뜸같이 분주했다. 그것은 애써 무심한 척하는 내 마음의 솔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들뜬 마음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가는 곳이 거의 정해져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내와 아들은 조호르바루에 있는 처남 집에서 일 년간의 국제학교 공부를 준비하고 있다. 이 전에도, 아들은 방학이 되면 조호르바루에서 영어를 공부하곤 했다. 나는 휴가를 받으면, 아내와 아들을 보러 그곳에 가야 했기 때문에 내 여행지는 거의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이번 일정은 조금의 변화를 준다고 싱가포르로 가서 1박을 하며 돌아본 다음 말라카 드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정의 중심은 조호르바루임에는 변함이 없다.
출근을 해서 진료를 보고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마감 후 바로 공항으로 갈 계획이었다. 덤덤하게 평소 하던 대로 진료를 하며 오전을 보내고 오후의 반을 보낸 때였다. 문자가 왔는데 8시 20분 예약된 비행기가 9시로 지연된다는 문자였다. 문제가 심각해짐을 느꼈다. 김포에 도착해서 인천공항으로 이동, 수속 밟고 환전하고 이런저런 생각해 둔 것들 고려해서 짜 둔 일정이었는데, 어쩌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겠다는 위협이 들 정도의 지연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내 마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문자 해서 상황을 알렸고, 다른 비행기표를 알아본 다음에 지연된 표를 취소해야만 했다. 그런데, 표 검색을 되는데 진료실 컴퓨터로는 결제를 할 수가 없었다. 아내가 모든 일정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나는 핸드폰에 그 흔한 비행기표 예약 앱도 깔아 두지 않고 있었다.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아내는 싱가포르 유심을 사용 중이라 한국 내 결제가 불가능했다. 알아본 결과 같은 항공사의 비행기가 7시 반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는 문자 받은 번호로 전화하여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잔여좌석이 있었고, 나는 시간을 변경 예약하고는 병원 마감시간을 한 시간 더 당겼다. 그렇게 결정이 되자마자 병원문을 나서야 시간이 얼추 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넘어오는 평화로는 어음 구간에서 거북이걸음을 할 정도로 밀렸고, 간신히 집에 도착하여 라이와 길고양이의 밥을 챙기고는 미리 콜해 둔 택시가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챙겨 탑승했다. 제주시내도 예전 같지 않아 많이 밀렸다. 예전 같으면 7-8천 원이면 가던 길을 같은 시간에 1만 원을 넘는 비용이 들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고, 적절한 시간에 도착하여 발권하고 수속하고 잠시 있다가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인천 국제공항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촘촘한 시간을 일정을 계산하여 짜 두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수에 모든 것이 틀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아내가 모든 것을 조율할 때 나는 옆에서 의견만 덧붙이는 정도에서 일정에 참여하였었다. 나의 이 무심함이 변수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극복할 힘이 나에게는 전혀 없었고 능력도 없음을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모든 일정과 변수에 어느 정도는 스스로 대처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시스템만을 믿는 것도 위험을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동시에 시스템에 의해 변수를 극복할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무사히 도착한 이 공항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해결하고, 환전과 면세품 인도를 받고 남는 시간을 핸드폰 충전을 하며 여유롭게 이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세상 안에서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에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함을 깨달은 하루가 지났고, 자정을 넘겨 나는 이제 이 노트북을 덮고 막 시작한 탑승 줄에 합류해야 한다. 시작이다. 아쉬운 것은, 나만 보면 반가움에 날뛰고 뒤집어지는 라이 녀석의 머리 한 번 쓰다듬어주지 못하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