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여유롭고 늦은 아침을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아침은 밖에서 먹기로 했다. 더운 나라에서는 외식이 일상이다. 더운데 부엌에서 열심히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는 물가가 저렴하니 밖에서 먹는 일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아침부터 무엇을 먹을까 고민해야 할 정도로 종류도 많다. 딤섬, 인도음식, 중식 등등 아침 일찍부터 찾아갈 수 있는 식당이 많다. 우리는 바쿠테를 먹기로 했다. 말레이시아에서 먹는 바쿠테는 어떨까 하는 궁금함도 있어서 선택한 메뉴였다. 뚝배기 같은 그릇에 뜨겁게 나온 바쿠테는 싱가포르의 송파 바쿠테와 비교하면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국물도 맑고 들어간 재료들이 많았다. 추가로 넣는 토핑도 다양했다. 튀긴 빵, 고기 편육 같은 것들을 더 주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맛은 그럭저럭 이었다. 조금 덜 끓인 갈비탕 같은 느낌이랄까.. 바쿠테는 원래 말레이시아로 들어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나름의 보양식을 만든다고 끓여먹었던 음식이다. 돼지 갈빗대와 한약재들 그리고 찻잎을 넣고 끓인 것이 바쿠테이다. 지금은 보편화되었고, 다양한 방식들이 생겨서 저마다 다양한 바쿠테를 끓여내는데, 처남의 설명에 의하면 바쿠테의 원조격은 클랑이라는 지역의 바쿠테라고 한다. 그 지역의 바쿠테의 국물은 검고, 한약재 냄새가 강하게 난다고 한다.
아침을 먹고 아들이 다닐 학교를 구경하기로 했다. 휴일이라 학교 내에 들어갈 수는 없었고, 정문 앞에서 학교의 풍경만 잠깐 보고 돌아왔다. 이 곳 동네의 풍경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 넓은 나라는 아니면서 땅을 아주 넉넉하고 여유 있게 활용하는 느낌이다. 학교가 가깝다고는 하지만 차로 20여 분 동안 두어 개의 고속화 도로를 달려 작은 타운 같은 동네의 한 자락으로 들어서야 등교할 수 있다. 널따란 초지를 옆에 두고 학교 역시 낮고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 그 자체 안에서 아이는 이틀만 지나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것이다. 방금 내가 차를 몰아 달려온 길로 말이다. 마음에서는 여전히 ‘잘 결정한 판단인가’라는 질문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뒷좌석에 앉아 있는 녀석을 보니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걱정도 같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결정한 이상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침은 서서히 지나며 뜨거운 오후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아웃렛으로 가서 간단한 쇼핑을 하고, 부킷 인다 지역으로 향했다.
부킷 인다(Bukit Indah) 지역은 싱가포르로 향하는 투아스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조호르바루 내 번화가이고, 바로 옆으로 한국 골프 선수들의 겨울철 전지훈련장인 호라이즌 힐 골프클럽이 있다. 그리고, 처남 네가 사는 동네에서도 가장 가까운 번화가이다. 일본 자본이 세운 에온 쇼핑몰이 있고, 테스코와 현지 마트인 베스트마트가 있다. 그리고, 한인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미용실 등이 많이 보인다. 주말이면 저렴한 쇼핑을 하기 위해서 싱가포르에서 넘어온 차들로 북적인다. 그리고, 내가 하루에 하나씩 두리안을 먹는 동네이기도 하다. 조호르바루에 3번째 방문하면서, 궁금한 동네 중에 하나가 부킷 인다 지역이었다. 사실 별다른 것이 없는 동네이지만, 골목과 길들의 풍경과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조호르바루는 여행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그렇기도 했고, 그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풀어볼까 해서 반나절을 그냥 부킷 인다에서 머물러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무더운 한낮에 별다를 것도 없이 번화하기만 한 지역을 걸어서 돌아다니는 일은 무모한 짓이었다. 어차피 사람들도 차 안이 아니면 시원한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가장 궁금했던 에온 쇼핑몰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 한낮부터 주차장은 차를 세울 곳 없이 북적였다. 현지민들과 싱가포르에서 넘어온 이들의 차가 뒤섞여 우리는 주차장을 두 바퀴 정도 돌고 나서야 간신히 주차할 수 있었다. 시원한 실내에 들어서자 별다를 것 없는 보통의 쇼핑몰 풍경이 펼쳐졌다. 은행 ATM 앞에서는 출금을 하려고 줄을 선 사람들과, 카페 안에는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떤 상점들이 있나 둘러보다 마트 앞에서 만난 검은 피부의 인도인은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사람들을 호객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국 시장이나 마트에서 보는 호객행위와 너무도 비슷했다. 피부색과 언어만 다르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별다를 게 없었다. 마트 안에서 가족단위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장을 보는 풍경, 곳곳에서 행사 안내를 하는 직원 등등.. 너무 익숙한 풍경 안에서 마음이 편안해지기까지 했다.
이 동네 마트에서는 어떤 물건을 파나 둘러보다가 한국에서 수입되었다는 포도를 보았다. Kyoho라는 이름의 포도였는데, 한 알씩 나누어주는 포도 맛을 보니 거봉포도를 그런 이름으로 수입해서 팔고 있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한국 문자는 종종 보였다. 특히 라면 진열대에서 많이 보였는데, 불닭볶음면은 말레이시아에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제품이라고 했다. 조카에 의하면 자기네 반에 말레이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불닭볶음면을 너무 좋아해서 아침마다 하나씩 끓어먹고 온다고 했다. 그 독하게 매운 것을 날마다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인기가 많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향신료 코너에서 한국에 가져갈 만한 향신료들을 몇 개 장바구니에 담았고, 마지막 날의 저녁을 아쉬워하며 마실 와인을 한 병 골랐다. 와인 가격이 한국보다 약간 저렴했고, 호주가 가까워서인지 호주 와인이 많이 보였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 했고, 아내는 아들이 다닐 학교로부터 통보받은 준비물들을 사기 위해 문구점에 들어가 장을 보았다. 나는, 매장 내 한쪽에 아담하게 배치된 음반코너와 책 코너를 둘러보았다. 한국 아이돌 그룹의 음반도 몇 장 보였고, 서적 코너에는 사피엔스나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같은 내가 읽었던 책들의 원서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먼저 매장을 나와 쇼핑몰 통로의 의자에 앉아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뒤섞여 있는 순간이었지만, 왠지 이방인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이곳 학교를 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있는 아내와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나와는 다른, 경계의 안팎을 드나들며 어색하게 부유하는 존재들로 보였다. 나는 내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내가 사는 곳으로 떠날 것이고, 아내와 아이는 그렇게 어색한 존재로 이 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뒤섞인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여행 중인 이방인이라는 티가 나지는 않았다. 나 역시 편안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토요일 오후의 이곳을 즐기는 현지 사람들처럼 가만히 존재하고 있었다. 이 곳에 존재한다는 것, 만일 그 시간이 한없이 길어진다면, 나는 어떤 모습과 생각으로 살아가게 될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여일하게 이 곳에서 지낼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의식하고 있는 여행자 또는 이방인으로서 가지는 주변과의 거리감이 사라지면,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 사람들과 뒤섞일 수 있을까? 이방인이란 생각은 나를 어지럽고 몽롱하게 만들면서 외롭게 했다. 동시에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가벼움을 느끼게 했다. 사는 사람과 여행하는 사람의 차이란 그런 것이다. 한 공간에 같이 있으면서도 마음을 지배하는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가 사는 제주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제주에 8년째 살고 있다. 누군가는 동경하는 여행지 제주에서 산다는 것은 뿌리를 내려야만 하는 일이다. 동시에 8년이라는 시간은 오롯이 뿌리내리기에는 짧고, 제주라는 고립된 곳의 토양은 참 거칠어서 쉽게 뿌리가 내려지지도 않았다. 나는 살아가는 사람이면서도 이방인이었다. 그 두 가지 입장의 무게가 약간씩 뒤바뀌면서, 조호르바루의 부킷 인다의 한 곳에 서 있는 나를 느끼게 했다. 나는 어디를 가든 이방인의 멍에를 벗어낼 수가 없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처남네와 만나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한 시간까지는 조금의 여유가 있었다. 한인 상가가 많은 골목을 다녀보기로 하고 쇼핑몰 밖으로 나와 걸었다. 차가 많은 동네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이 걷는 길보다는 차로에 더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게다가 건널목 표시나 신호등도 없었다. 그저 차들의 통행을 통제하는 신호만이 존재했다. 차가 없는 틈을 타서 4차선 도로를 건너 다녀야만 했다. 2년 전과 비교해보니 한인 음식점이 두세 개 정도 늘어난 모습이었다. 마음은 그냥 불쑥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 ‘잘 살고 계시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모로 불가능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임을 안다. 그렇게, 나의 궁금증은 겉만 핥는 정도에서 마무리되었고, 우리는 처남네를 만나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인도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두리안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1일 1 두리안이 목표였지만, 이번에는 잘 실천하지 못했다. 하루 건너 두리안 2개씩 먹어서 목표한 양은 채워 넣었다.
집에 와서 새벽에 챙겨갈 짐들을 정리하고, 사온 와인을 열어 마시며 조카들과 동네 공터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어두운 밤이지만 가로등 불빛이 충분했고, 차가 다니는 길이지만 막다른 길이어서 차는 아예 다니지 않았다. 여전히 덥지만 조금 선선해졌고 바람은 거의 없어 배드민턴 치기에는 딱인 환경이었다. 이 나라의 인기 스포츠 종목이 배드민턴인 이유가 이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조카들과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생각에 비 오듯 땀이 흐를 정도로 배드민턴을 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출발해야 하는 내가 잠이 든 시간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