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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추석, 말레이시아로의 짧은 여정기

by 전영웅


작년 가을에 오일장에 다녀온 아내는 3년생 사과나무 두 그루를 사 왔었다. 마당이나 집 주변은 이미 나무와 푸성귀들로 가득 차 더 이상 심을 곳이 없는데도, 유실수 욕심이 많은 아내는 그런 사정이나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에 부려놓은 사과나무 두 그루를 심어달라고 퇴근한 나에게 부탁을 했다. 바람을 덜 탈 것 같은 남쪽 담벼락 아래 구석자리에 간신히 자리를 만들어 간격을 두고 나무를 심었다. 기대는 없었다. 남쪽의 더운 섬에서 사과가 잘 여물 것 같지도 않았고, 열려봤자 새들이나 벌레들이 먼저 먹어치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리도 없긴 했지만, 그런 생각에 대충 나무자리를 보아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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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넘기니 사과꽃이 만발했다. 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꽃받침마다 둥근 알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대가 생겼다. 둥글둥글한 알들을 솎아 적당한 양과 골고른 분포를 유도했다. 여름이 지나며 알은 점점 푸르게 굵어졌다. 가을이 되니 햇볕을 받은 자리들이 붉은 물줄기 흐른 자국처럼 익어가기 시작했다.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붉어진 하나를 따서 먹어보았다. 텁텁한 질긴 과육이었지만 달기는 상당했다. 추석 즈음이 되면 더 맛있어지겠구나 가늠했다. 더 맛있어지면 아내가 좋아하겠다 생각하는 순간, 집에 아내가 없음을 떠올렸다. 아내는 아이와 함께 조호르바루에 머무는 중이었다. 사과가 저렇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면 좋아할 건데.. 아쉬웠다. 그리고, 마음이 바빠졌다. 추석 연휴에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사과는 상하거나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잘 익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추석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떠났다. 연휴 마지막 날이면, 나는 아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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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만에 다시 가는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였다. 이번엔 여행이라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두고 올 아들 녀석과 서로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야 했고, 아내를 데리고 와야 하는 가정사의 작은 전환이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도 말했듯, 일상의 해야만 하는 일들의 작은 변화 같아서 말레이시아에 가는 일은 이젠 시간 위에서 덤덤하게 흐르는 일과의 연속 같다. 퇴근시간을 양해를 구해 조금 앞당겨 서귀포에서 제주로 넘어와서, 잠시 집 정리와 짐을 꾸려서는 바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김포 가는 비행기에 올라 한 시간 후 김포에서 인천공항으로 이동, 자정 가까운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쿠알라룸푸르로 날아갔다. 에어아시아의 자리는 좁을 대로 좁았고, 6시간의 비행 내내 물조차도 제공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여정이었다. 괜찮겠지 했던 여행가방은 무게 초과로 추가 요금을 지불하여 부쳤고, 기내에서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쓰는 일도 비좁은 공간에서 할 수도 없었다. 무거운 머리가 수십 번 아래로 곤두박질하며 불편한 잠을 오래도록 잤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새벽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내려 국내선 에어아시아로 조호르바루까지 다시 한 시간 이동. 현지 시각 아침 9시에 나는 아담하고 시간의 정겨움이 넘치는 세나이 공항에서 아내와 아들과 한 달만에 다시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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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부터 운전의 시작이었다. 한국과 정반대의 운전방식인 말레이시아 운전이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잠깐 정신을 놓는 순간에는 역주행을 하거나, 깜빡이가 아닌 와이퍼를 작동시키곤 했다. 길 역시 온전히 다가오지 않아 Waze라는 앱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길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렇게, 처남네에 들러 인사를 하고 아침을 먹은 뒤에, 조카들을 데리고 나와 반나절의 여행을 시작했다. 쿠쿱 아일랜드(Kukup island)가 궁금해서 한 시간 거리의 쿠쿱에 가보았지만,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과정은 시간 때문에 섬으로의 진입을 포기해야만 했다. 대신, 쿠쿱 마을을 구경했다. 갯벌 위에 지주대를 박아 그 위에 세운 수상가옥마을이었다. 갯벌에서는 비린내와 은근한 악취가 올라왔고 지주대 아래로의 갯벌에는 쓰레기가 많았지만, 그 사이로 주먹만 한 고둥과 짱둥어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길이 좁으니 마을 교통수단은 개조한 오토바이들이었고, 그 사이를 원숭이들이 돌아다녔다. 낡은 수상가옥 사이로 작은 리조트 같은 숙박시설이 세워지고 있었다. 가난과 변화와 뻘냄새가 공존하는 동네를 잠시 돌아다니다가 우리는 바나나 뭉치와 손질한 파인애플 한 통을 사들고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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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의 최남단이라는 딴중 피아이(Tanjung Piai)는 쿠쿱에서 8킬로 떨어져 있었다. 그곳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데크 통로를 따라 맹그로브 숲을 지나가면 말라카 해협 위에서 멀리 인도네시아를 볼 수 있는 해상 정자와, 아시아 대륙의 최남단 표식을 해 둔 포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갯벌에는 어린 맹그로브 나무들이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고, 각 나무의 뿌리는 정확히 방사형으로 뻘 속을 주행하며 뻘 위로 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짱둥어들이 구덩이를 파서 영역을 표시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저마다 구애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왕도마뱀이 수영을 하다가 뻘을 지나 맹그로브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에는 야자열매들이 아무렇지 않게 떨어져 썩어가고 있었다. 바다가 아름답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열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늘 안에 앉은 우리를 충분히 시원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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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들과 아들의 토요일 오후 일정이 있어 우리는 서둘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의 일정을 보내고 나는 잠시 집에서 쉬었다가, 아내와의 시간을 보냈다. 가까운 마트에서 내일 아침 조카들 먹일 것들과 와인을 사고, old town white coffee에서 나시르막을 먹었다. 저녁엔 부킷 인다의 에온몰에서 아들과 조카의 선물을 사주고 인도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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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하루 종일, 한인 교민들과의 시간을 가졌다. 처남은 선교사이다. 처남 목사님이 인도하는 교인들이 예배를 마치고 가까운 스포츠 센터에 가서 체육대회를 했다.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여 서로 함께 뛰는 모습은 한국에서 보던 교인 친목모임과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말레이인 관리인들이 오가고 날이 무척 더워 땀이 줄줄 흐른다는 사실만이 달랐다. 아들은 공을 무서워하지 않아 발야구에서 수비 역할을 톡톡히 해 냈고, 축구시합에서는 골키퍼의 역할을 맡았다. 교인들은 사업이나 장기출장, 또는 자녀교육 문제로 이 곳에 온 사람들이었다. 나와 같이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추석명절을 맞아 짧게 또는 휴가를 붙여 장기휴가로 건너온 아빠들도 많았다. 이민 또는 교민사회 성원들은 하나같이 여유가 느껴졌다. 각자의 처지를 넘어, 이 나라의 공간이 주는 여유를 충분히 즐기고 있어 보였다. 동시에, 저마다의 처지와 종교적 신념 등등이 뒤섞여 약간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인사회의 종교는 그 중심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의지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특징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 기본은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단정할 수 없고 확언할 수 없지만, 중년 이상의 교민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어 보였고 그것은 말레이시아 경제 수준과 비교해서 좀 더 도드라져 보였다. 경제적 여유는 통상적으로 보수성을 겸비하고 있었고, 그것은 종교와 만나 통상적이고 보수적 성향의 집단을 형성했다. 어찌 되었든, 교민/이민 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이유로든 훌륭하고 중요한 의지처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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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의 예배 시작 전, 나는 아들과 의자에 나란히 앉아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혼자 있을 시간을 다독여 주었다. 조카 남매들과 잘 어울리며 놀아라. 이 곳에 머무는 동안은 이 집 식구이니까, 이 집의 규칙을 존중하고 집 안팎의 일들에 함께 참여하면서 보내거라. 아빠의 바람은 네가 이 곳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곳 학교 친구들과 잘 어울리면서 잘 적응하고 언어와 문화를 충분히 습득하는 것이다. 아들은 잘 할 것이라 아빠는 믿는다. 내가 이 여정에 들뜨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아들을 홀로 두고 와야 한다는 것. 12살 아이가 가족과 떨어져 혼자 있는 일이란 것은 어쩌면 너무 이른 경험이기도 하지만, 나는 애써 자라면서 한 두 번 정도는 스스로 겪어내야 할 일이라 생각하며 애써 담담하려 했다. 그러나, 몇 주전부터 나를 짓누르던 걱정은 아들을 만났다고 해서 덜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나란히 앉아 아들의 어깨를 감싸며 다독인다고 해서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감점이 북받쳐 눈물이 쏟아지려 했다. 티 나지 않게 추스르며 아들에게 당부하고 다독였다. 체육대회 내내, ‘아빠가 오니까 아들 녀석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라며 반가워하는 교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들이 조금은 야속했다. 아들은 하루 종일, 교인들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 또래를 비롯해서 다양한 나이차의 아이들이 모인 속에서 엄마나 아빠를 찾지는 않았다. 당연하고 다행인 일이었다. 밤 시간까지 이어진 교회 공식 행사였기에 내가 아쉬워할 건 없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이면 나와 아내는 아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함께하는 시간이 많이 없음을 조금 서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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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의 학교는 무척 일찍 시작한다.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수업을 시작해서 일찍 집에 보내는 일과가 대부분인데, 학교는 우리나라처럼 걷거나, 차로 집에서 10여분 정도 걸리는 거리 수준이 아니었다. 셔틀버스로 30여 분이 걸리는 거리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새벽 등교를 한다. 조카들이 6시 반에 우르르 등교를 하고, 아들이 다니는 학교의 셔틀버스는 7시 정도가 되면 집 앞에 도착했다. 새벽에 일어나, 아들이 아침을 먹는 것을 함께 하고, 차가 오자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헤어졌다. 아침이 되어서야 실감하는 건지, 아들 녀석은 조용히 눈물을 보였다. 마음은 무겁고 복잡했다. 진작부터 각오한 일들이었지만, 이것이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다시 스멀거렸다. 조카들과 처남 부부는 걱정하지 말라고, 잘 챙겨주고 잘 도와주겠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은 그렇게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날은 아내의 생일이었고 한국은 추석 당일날이었다. 우리는 양가의 부모님을 만나 뵐 수도 없었고, 아들과는 생이별을 해야 했고, 그래서 아내의 생일은 도통 분위기를 낼 수가 없었다. 처남댁이 우리가 출발하기 전 아침으로 대접한 미역국이 아내의 생일을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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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세나이 공항을 거쳐 쿠알라룸푸르로 이동해야 했다. 세나이 공항에서 처남네와 작별인사를 하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데, 아이가 학교에 있을 때 우리가 이렇게 나오는 게 잘 한 것인지 아닌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것 까지 보고 왔어야 할까? 그랬다면 아무래도 헤어지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판단에 내가 나서서 늦은 비행기표를 오전 중으로 앞당겼었다. 반나절의 쿠알라룸푸르 시내 구경도 할 겸해서였다. 그 여정은 마음에 돌덩이 하나 얹은 것 같은 묵직한 시간이었다. 세나이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공항에서 내려 짐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KL express를 타고 KL 센트럴로 나와 그랩을 이용해서 부킷 빈탕으로 이동했다. 쿠알라룸푸르 시내는 3년 전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차가 많아지고, 높은 빌딩도 두어 개 더 늘어난 모습이었다. 이 곳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머물며 여행기를 쓴 장우혜의 ‘잘란잘란 말레이시아’를 읽으며 반나절 여행의 몇몇 포인트를 점찍어 두었다. 첫 번째는 부킷 빈탕의 LOT 10 쇼핑몰 지하에 있는 중국음식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캐주얼한 느낌이 가득한 음식이었지만, 화교들이 만들어내는 중국음식들은 언제나 평균 이상의 만족을 주어서 가볍고 만족스럽게 한 끼를 채울 수 있었다. 파빌리온과 몇몇 쇼핑몰을 낮 더위를 피해 돌아다니다가 결국 suria KLCC까지 걸어가 커피 한 잔을 했다. 그리고 다음 포인트로 점찍어 둔, KL 센트럴 역 옆의 브릭필드로 이동했다. 거기서 인도음식을 먹어 볼 생각이었다. 브릭필드에는 인도인들이 많이 머물렀지만, 중국계들도 많이 보였으며, 서울역 부근의 공동화된 도심같이 허름하고 곳곳에 노숙자도 보이는 아주 오래된 공간이었다. 생각보다 선뜻 들어가고 싶은 식당은 보이지 않아 가장 시원하고 깔끔해 보이는 마막에 들어가서 수박주스와 양고기 브리아니를 주문했다. 수박주스는 설탕을 섞어 달디달았고, 양고기는 무척 질긴 데다가 향신료로 뒤범벅이 된 쌀은 모습 그대로 다양한 향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곁들여 나온 카레소스와 함께 먹는 맛은 나에게는 나름 만족스러웠다.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은 한국의 식문화 때문인지, 아니면 급하게 먹는 내 습관 때문인지 아쉬웠다. 옆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식사를 천천히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더 분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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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KL express를 타고 쿠알라룸푸르 공항으로 돌아왔다. 짐을 찾고 체크인을 한 뒤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 비행기라, 공항 내 호텔에서 잠을 잔 뒤 바로 게이트로 이동하려 아내는 공항 내 호텔로 예약을 잡았다고 했다. 우리는 면세점을 구경하며 다니다가 라운지에서 맥주와 간단한 저녁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숙소에서 잠을 잔 뒤에 아침 6시 50분 제주로 오는 에어아시아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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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의 제주는 맑고 공기는 시원하며 익숙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반려견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연휴 내내 맑았던 하늘 아래 사과는 좀 더 붉게 익어 있었다. 나는 사과를 하나 따서 아내에게 건넸다. 껍질채 손질하여 사과를 먹어 본 아내는 맛있다며 반가워했다. 석 달만의 귀가에 반려견은 좀 더 자라 털갈이도 마쳤고, 나무들은 여름을 거치며 색이 좀 더 진해 있다고 했다. 편안하기로는 역시 집이라며 마음을 놓은 아내는 스스로 잘라 접시에 가지런히 놓은 사과를 몇 조각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는 간단한 짐 정리 후에 침대로 들어가 낮잠에 들었다. 단 3일을 비웠던 나에게 남은 오후 시간은 생각해 두었거나 눈에 보이는 집안일들을 조금이라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반려견의 사료들을 다시 정리하고, 배설물을 치운 뒤, 잔디를 깎았다. 본격적인 가을의 공기 속에서도 텃밭은 내 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바람은 시원했고, 저물어가는 저녁 하늘은 맑았다. 아까 내가 지나왔던 마당 위 하늘길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비행기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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