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멜라카
멜라카를 처음 가 본 때는 4년 전이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하루 가이드 프로그램으로 별 생각없이 참여했다가, 나는 멜라카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마치 유적들과 사람들과 여행을 적당한 비율로 잘 버무려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때로는 가이드를 따르는 여행도 아주 유익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후로 나는 조호르바루에서 조카들을 데리고 직접 운전해서 하루 일정으로 멜라카를 다녀왔고, 이번 일정에는 멜라카에서 1박을 계획했다. 첫날을 푸트라자야에서 잠을 잔 뒤, 이튿날 클랑으로 가서 바쿠테로 점심을 먹고, 멜라카로 차를 몰아 내려왔다.
인도네시아 왕족의 하나가 피신하다가 땅의 기운을 느끼고 정착한 자리가 멜라카였다. 그러니까 말레이시아라는 나라의 발상지이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 등등의 여러나라들이 들어와 무역과 전쟁을 통해 문화와 종교가 특이하리만큼 뒤섞인 도시이고, 그것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는 검색만 해도 자세히 나오니 굳이 더 할 필요는 없겠다. 이번 일정에서는 멜라카의 유적들은 생략했다. 우리의 목적은 주말 야시장과, 멜라카 강변 및 주변의 오래된 동네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매주 금토일이면 저녁 6시부터 존커워크에 야시장이 열린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고, 존커워크의 바로 옆 블럭인 히렌 거리의 200년 된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만든 호텔에 짐을 풀었다. 말레이시아는 일년 내내 더워서 낮에 돌아다니기가 힘들다. 멜라카의 고정코스인 유적들을 생략하기로 했으니, 우리가 도착한 5시라는 시간은 더위가 조금 수그러들기 시작한 때이니 아주 적당한 시간에 멜라카에 도착한 것이라 해도 좋았다. 이제 해가 지기 전에 동네를 구경하는 일만 남았다. 이제 막 야시장 준비를 시작한 존커워크를 지나, 우리는 오랑우탄 하우스 앞으로 갔다. 강변을 향한 짤막한 벽화골목에서 사진을 찍고,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주변의 다른 골목과 거리들을 구경했다.
동네는 전체적으로 낡아 있고, 사람들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동양과 서양이 묘하게 뒤섞인 듯한 좁은 폭의 2층 건물들이 다닥다닥했다. 어떤 건물은 게스트하우스나 헤리티지 호텔 등이 되어 있었고, 사람이 사는 건물에는 수제 악세사리를 만들거나, 중고책방을 열거나, 창고같은 데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강변으로 나오니 까페가 즐비했고, 주거건물이 좀 더 많은 쪽으로 가니 새를 파는 집이 있었고, 자욱한 연기에 커피향이 섞여 있어 가 보니 로스터리 까페가 있었다. 대부분 흰색을 칠한 벽에는 종종 중국 풍의 벽화와 글귀가 그려져 있었고, 중간중간 파스텔 톤의 밝은 색들이 칠해져 더운 지역의 느낌을 더했다.
강변을 따라 걸었다. 여행자들도 많았지만, 이 지역에 머물면서 저녁조깅을 하는 현지 중국인들이나 백인들도 많았다. 강을 거슬러 오가는 유람선이 수시로 다녔다. 시간이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지저분한 동네가 강변으로 나오니 조금은 정리되고 깔끔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희미하게 코를 스치는 불쾌한 냄새는 있었다. 오래 되고 낮은 건물들이 대략 끝나는 지점에 오니 거리 너머로는 최근에 지은 듯한 건물들과 멀리 고층 빌딩들이 보였다. 우리가 돌아보고자 했던 동네는 대략 이 지점에서 마무리되겠구나 싶었다. 해는 아직 중천이고, 날은 아직 더웠다. 오래 걷는다고 불만이 쌓인 아들녀석도 달랠 겸 우리는 강변 까페에 앉아 음료수를 주문했다. 반바지를 입은 다리로 날파리들이 달라붙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문화유산이라는 족쇄 또는 자부심(?)을 달고 사는 이 동네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거리너머 최근에 지어진 건물과는 현격하게 비교되는 이 낡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쏟아지듯 들어오는 관광객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다닐 때마다 의식하게 되는 것은, 나도 여행지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행지에 사는 사람이 다른 동네에 가서 여행자가 되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사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동일시하게 된다. 행동과 시선이 조심스러워진다. 그러나, 내가 그 곳의 사람들을 이해하기란 한계가 있다. 멜라카의 관광정책, 유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정책, 선주민들과 이주민들간의 관계, 그리고 직접 살아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들.. 나에게는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르거나 느낄 수 없으니 쉽게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시간이 켜켜이 쌓여 낡은 동네에서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 지나가도, 주민들은 그저 무심했다. 철제 빔으로 네모지게 만든 손수레에 짐을 싣고 지나가는 표정에도,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악세서리에 매달 장식을 연마하고, 연기 자욱한 로스터리 기계를 돌리는 가게 주인들의 표정에는 오늘도 하루가 이렇게 마무리되는구나 하는 느긋함이 있었다. 해지는 저녁 강변을 조깅하고, 애완 거북에게 저녁밥으로 채소를 잘라 먹이는 동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느긋하게 가게를 정리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조용하고 가볍게 시선을 둘러 볼 뿐이었다.
많이 걸어 힘들어하는 아들을 다독여 강변을 따라 존커워크로 진입했다. 야시장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아직 주말은 아니어서 그런지 예전보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존커워크 야시장은 그대로였다. 기억나는 위치마다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물건이나 음식을 팔고 있었다. 아들은 먹을 것들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먹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집어들며 입에 넣었다. 타이소시지, 계란빵, 철판아이스크림, 메추리알꼬치 등등.. 내가 보기엔 굳이 여기서가 아니더라도 먹을 수 있는 것들만 입에 넣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해물을 넣은 철판 볶음국수를 사서 저녁으로 먹었다. 존커워크 야시장은 사실 특별할 건 없다. 이미 오래된 관광지의 특성상, 천편일률적인 상업성이 대부분의 풍경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때마다 야시장 일정을 맞추어 오고 싶은 것은, 오래된 건물들과 어우러지는 어떤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특이한 현지 길거리음식이라는 매력도 있겠지만, 관망하듯 바라보면 먹거리 외엔 그다지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은 없다. 그저 전체적인 어떤 분위기, 사람들을 거리로 자연스레 끌어들이는 어떤 힘 같은 것이 존재한다. 게다가 마미라는 현지 유명 라면회사의 라면만들기 체험공간이나, 말레이시아에서 재배되는 모든 커피 품종을 맛볼 수 있는 까페, 그리고 여행자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존커워크의 지오그래피 까페, 110년의 역사가 있는 치킨라이스 가게 등등.. 유명 포인트들이 산재해 있다. 거기에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말을 쏟아내는 시끄러움은 북적이고 밀리는 인파와 더불어 특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들은 숙소에서 머물고 싶어했다. 유튜브를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밤이 되니 좀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나는 고택 공간이었다. 바닥은 광택을 낸 나무바닥이어서 살짝 삐걱댔지만, 고가구와 오래된 침대와 의자들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모기 두 마리를 잡고 아들을 숙소에 둔 다음, 아내와 나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곧장 강변의 까페에 가서, 강변 산책로 야외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저마다의 은은한 조명으로 강변은 다양하되 큰 틀 안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아름다움을 연출했고, 강을 오가는 유람선의 사람들은 좀 더 늘어 있었다. 멜라카에 머물며 해보고 느끼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약간의 취기를 더하자 많은 이야기들이 저절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결정은 옳은 것일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밤에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 머나먼 나라의 한 강변에 앉아서, 우리는 사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사는 건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나와 피부색과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이 동네에서 이방인으로 잠시 머물며, 다시 멀리 떨어진 삶터에서의 생활을 고민한다는 건 자연스러우면서도 조금 서글픈 일이었다. 유람선이 지나간 강물이 일렁이면서 맞은편 건물의 조명불빛이 같이 일렁였다.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둠게 일렁이는 불빛을 가렸다. 빠져들듯 바라보며, 여유를 즐겼고 고민을 이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앉아 있다가, 다시 존커워크로 들어가 음료수를 사고 야식거리와 맥주를 샀다. 들어가는 길에 두리안을 파는 가게가 보여서 들어가 일정의 첫 1일 1두리안을 실천했다. 옆에서는 커다란 무대 위에 노래방기계를 올려두고 중국인들이 중국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도 존커워크는 불야성이었다.
숙소에 들어가 맥주와 야식거리로 산 볶음국수를 먹고 잠을 청했다. 200년의 고택이지만, 공간은 아늑했고 침대는 푹신했다. 어두운 느낌의 실내공간은 불을 끄니 어둠이 더 깊어져, 잠을 더욱 깊게 했다. 번잡한 존커워크와 한블러 떨어져 있으니 바깥이 시끄럽지도 않았다.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전날 밤의 불야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건물 내에 있는 가게들만 서서히 문을 열고 장사를 준비했다. 말레이시아 모든 품종의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까페에 들어가 아침 커피를 즐기고, 숙소로 돌아가 체크아웃을 했다. 멜라카의 매력때문에 1박 2일의 일정을 잡았지만, 다시 느끼는 건, 그것만으로도 멜라카를 느끼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일주일이나 한 달 살기의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욕심을 안고 다시 푸트라자야로 향했다. 멜라카에서 고속도로로 나가는 길은 토요일 오전 주말의 시작이어선지, 멜라카로 들어오는 차로 밀려 있었다. 대단한 관광지임엔 틀림없었다.
말라카로도 불리지만, 예전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멜라카나 믈라카로 발음하는 것이, 멜라카의 정체성과 가까워서 현지인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사람이 많아도 치이는 느낌없이 내가 멜라카를 좋아하는 이유를 아직 온전히 알 수 없다. 어떤 매력, 그것이 내가 사는 제주의 미친듯한 변화안에서 점점 커지는 실망과 정확히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것만 느껴졌다. 멜라카엔 다시 와야겠다는 다짐 때문인지, 들러보고 싶은 곳 몇 군데를 일부러 남겨두고 떠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