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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말레이시아 여정 단상, 3.

by 전영웅

4. 조호르바루

멜라카와 푸트라자야를 여행하며 이틀 밤을 보낸 우리는 다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으로 돌아와 렌트카를 반납한 후에 저녁 비행기로 처남이 살고 있는 조호르바루에 도착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바루는 차로 4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이고, 비행기로는 농담 좀 보태어 이륙하자마자 착륙준비하라는 안내방송을 하는 정도이다. 조호르바루의 세나이 공항에 착륙하는데, 이 공항에서는 조금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시설은 현대화하여 깔끔한데, 규모가 작아서 탑승대기 공간과 도착출구 공간의 구분이 없다. 비행기가 도착해서 내리면, 연결구가 유도되지 않는다. 비행기 대기공간에서 계단차가 출입구로 붙는다. 앞쪽만이 아니고 비행기 맨 뒷문으로도 연결되어, 탑승객들은 앞뒤로 비행기에서 내릴 수 있다. 내리면 비행기 엔진 주변으로만 접근금지 줄이 쳐지고, 사람들은 걸어서 공항 건물로 들어선다. 통제인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색다른 풍경을 나는 세나이 공항에 도착할 때마다 사진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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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르바루엔 한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처남이 살고 있는 레고랜드 부근의 넓은 타운하우스 지역에는 입주하여 살고 있는 한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누가 살고 있는지의 소식도 종종 들린다. 그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아! 그 사람! 하며 누구나 알 수 있는 연예인이나 유명인도 포함된다. 처남네 집과 가장 가까운 번화가인 부킷 인다 지역에는 한글 간판이 많다. 이번에 가 보니 한글 간판은 더 늘었고, 인도나 현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처남네 식구가 가면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오셨어요.’라고 인사하는 모습도 보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바루로 넘어오는 국내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오는 비행기의 연결편이 있는 시간대도 아니었는데, 조호르바루행 게이트에 대기하고 있자니 곳곳에서 한국어가 들렸다. 솔직히 조호르바루가 한국에서 닿기 편한 곳은 아니다. 인천이나 제주에서는 쿠알라룸푸르로 와서 다시 조호르바루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 곳이다. 또는 싱가포르의 창이공항으로 와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달려 국경을 넘어야 하는 위치이다. 일년에 딱 한 시즌, 초겨울 시즌에는 한국내 저가항공사가 인천에서 조호르바루로의 직항을 한시적으로 운영한다. 알기로는 골프선수들의 전지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교통여건이 이러한데도, 여러이유로 한인들은 점점 늘고 있다. 그리고, 늘어나는 한인들로 조호르바루는 소소한 변화들이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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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르바루가 말레이시아의 제 2도시이면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경을 접한 싱가포르 때문이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물가는 대략 3배의 차이를 보인다. 국경을 넘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리 삼엄하지도 않아서 사람들은 조호르바루와 싱가포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주말이면 조호르바루로 건너와 생필품 쇼핑을 하고 한 두끼를 먹은 다음 다시 싱가포르로 넘어간다. 싱가포르보다는 조호르바루가 좀 더 여유있으면서도 편의시설의 차이가 별로 없으니 여러모로 즐기는 데 있어 잇점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싱가포르를 마주보는 누사자야 지역이나 푸테리 하버 등지에는 싱가포르에서 머무는 한인 가족들이 주말이나 휴일의 여유를 즐기려 쇼핑몰을 다니곤 한다. 번호판이 S로 시작되는 싱가포르 차들 역시 줄줄이 주차되어 있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화교자본들도 만만치 않게 흘러들어서, 말라카 해협쪽으로는 잔잔하고 얕은 바다를 메꾸어서 섬을 만들고 대형 주거단지를 조성하고 있기도 하다. 차로 주변을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높은 빌딩건물이나, 대형 주거상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는 공사현장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이 정도의 공사였다면 분명 난개발이라며 거센 국민적 비판을 받았을 모습이, 이 지역에선 땅이 넓어보여서인지 아무렇지 않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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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입장에서 조호르바루를 보자면, 정말 심심한 도시이다. 정착이나 경제활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여행지로서의 매력도 별로이다. 정부가 제시한 조건에 맞추어 개인사업 정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한인들이 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 자녀교육 때문이다. 장기간 또는 단기간 이 곳에 머물며 자녀들을 국제학교에서 공부하게 한다. 나 역시 아들을 이 곳 국제학교에서 공부시키고 있다. 내가 만난 한인들의 대부분은 이런 이유 때문이며, 그 외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과, 기업 해외주재원 자격으로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소수를 구성하고 있었다. 폭발하듯 증가하는 이곳 부동산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한지 이미 오래이다. 그래서, 공실률이 50%를 넘는 일은 다반사이다. 실제로, 어둔 밤 새로 조성된 번화가나 도심을 다녀보면, 불이 꺼진 공간들이 너무 많다. 가로등과 사람들이 특별하게 모여드는 공간 외에는 빛이 없어서 조금 음산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 곳 부동산은 약간 불안한데, 그 불안을 조금 숨통트이게 하는 사람들이 한인들이다. 장단기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면서 부동산 임대시장은 조금 활력이 붙었고, 게다가 현지인들의 뻥튀기로 임대료가 상승하고 있다고 했다. 현지에서 보면 높은 공실률로 들어와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인데, 한인들에게는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현지인들의 뻥튀기가 먹히면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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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교육으로 들어 온 한인 가정들은 대부분 기러기 신세이다. 휴가나 긴 명절기간에는 한국에서 일하던 아빠가 이 곳으로 와서 가족들을 만난다. 이곳에 머무는 아이들은 한국에서와는 다른 여유를 즐기며 생활한다.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를 배우는 일이 만만치는 않지만, 학교일정이 그리 힘들지 않으며 학교를 마치면 숙제 외에 따로 무얼 배우는 일은 거의 없다. 더운 나라이니 복합주거공간에는 대부분 단지내 수영장이 있어서 아이들은 늦게까지 수영장에서 놀기도 한다. 처남네 조카들은 레고랜드가 가까워서 일년 정기권을 끊어 레고랜드 내 수영장에 종종 놀러간다. 살림을 꾸리기엔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물가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우선 생필품이나 먹거리 가격이 비싸지 않으니 차가 있고 운전만 할 줄 알면, 이른 아침 아이를 학교로 보낸 부모는 한국보다도 더 여유를 즐길 것들이 많다. 이 도시는 조금 느리고 좀 더 많은 여유를 즐기기에 좋지만, 그러기엔 좀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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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르바루를 보고 있자면, 노동은 가치를 급속하게 잃어버리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에서는 노동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위해 싸우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부동산이라는 거대한 거품 앞에서 조물주 위에 건물주인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노동의 가치를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흔적같아졌지만 꿈이 남아 있다. 내가 말레이시아의 노동정책이나 사람들의 생각을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낮은 노동가치와 낮은 생필품 가격에 어울리지 않게 고층 주상복합 건물이나 대규모 타운하우스가 여기저기 지어지면서도, 그것들을 채우지 못해 높은 공실률과 음산한 밤거리를 연출하는 모습은, 이곳도 자본의 거품이 두텁게 끼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보통의 노동으로는 보편의 삶 정도나 해결할 수 있고, 그 이상의 부를 꿈꾸는 건 부동산 시장같은 자본투기와 거품으로나 가능해 보인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저항이 없는 것은, 다민족 국가이자 말레이인 우대정책에 따른 민족간의 은근한 갈등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항없이 자본의 파도에 급격하게 잠식되어가는 이 곳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결국 같은 결말에 이를 한국사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사회갈등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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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저녁 당가 베이에 산책 나갔었다. 4차선 양 옆으로 높은 고층 빌딩들이 불이 거의 꺼진 채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처남은 차를 세우고는 다 왔다고 한다. 어디가 바닷가라는건가 싶을 정도로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옆의 쇼핑몰로 들어가 로비를 관통하니 바로 모래사장과 산책로가 있는 해변이 나왔다. 한국의 해운대나 송정이 이런 구조였다면, 도로에서 해변이 보이지 않는다면, 난개발이니 조망권 침해이니 하면서 난리가 났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사람들은 이런 구조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듯 다니고 있었다. 내가 이 곳의 개발 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이게 옳은지 나쁜지 판단할 기준을 내세울 수도 없다. 다만,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에 아무렇지 않게 적응해가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저 자연스럽다 해야 할지, 나는 조금 혼란한 마음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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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이 공항에서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서니 처남이 마중나와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집에 들어가는 길에 올 때면 단골같이 들리는 부킷 인다 내 베스타리 지역의 두리안 판매점에 가서 두리한 한 통을 먹었다. 두리안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은 차 안에 머물러 있는데, 표정이 푹 죽어 있었다. 아무래도, 집이 아닌 처남네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기 때문인 듯 보였다. 아마도 내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던 건 아들의 표정을 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3일 정도를 머물다 떠나기까지, 나는 수시로 아들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의 무심했던 아빠로서의 모습은 온데간 데 없이, 조금 놀란 마음이 생길 정도로 내 스스로 감정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늦은 밤 처남네에 가니 처남네 식구들은 다음날 교회 예배 준비로 자정이 가깝도록 분주해 하고 있었다. 짐을 풀고 샤워부터 했다. 앞으로 3일을 조호에서 머물 것이다. 나의 말레이시아 여행이 항상 그러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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