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한인들
11시가 되자 교회에는 한인들로 가득 채워졌다. 작년에 조호르바루에 왔을 때보다 더 많아보였다. 예배가 시작되고, 중간에 우리나라 학제로 중학생 이하의 아이들의 특송이 있었다. 특송 이후 아이들은 2층의 부 예배당으로 올라가 따로 예배를 진행했다. 아이들이 전체 교인의 3분의 1 정도 되어 보였다. 50여명이 조금 넘는 한인들이 일요일이면 교회에 모였다. 명절 휴가를 맞이해서 참석하게 된 예배였고, 몇몇 가정 역시 명절을 맞아 가족을 만나러 온 아빠들이 참여해서 성도 수는 좀 더 많아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인원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인 만큼, 종교의 자유도 있다. 이슬람이 국교이긴 하지만, 과격하거나 엄격하지 않다. 시내를 돌아다녀보면, 주로 감리교 계열의 교회가 상가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로 중국인 목사가 이끄는 교회들이고, 조호르바루에도 한인교회가 세 곳 이상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교회와 분명한 선을 긋고 사는 내가 교회와 신앙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말레이시아라는 이국에서 이방인으로 이 곳에 정착 또는 잠시 발을 담근 한인들의 사회가 편안하게 몸과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임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물론, 내가 알지 못하는 한인사회의 모임이 있을 수도 있고, 요즘엔 현지 생할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까페도 존재한다. 그러나, 마주보며 한국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이 곳 한인들에게는 소중해 보였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예배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며 꽤 오랜 시간을 교회에 머물다 헤어진다. 어느 날은 교회의 모임이 저녁까지 이어져 한 집으로 이동해 늦은 시간까지 먹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내가 예배에 참석한 날은 chinese new year, 즉 설 명절 주간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은 모두 모여 편을 나누어 윷놀이를 했다. 점심식사는 제주에서 끊어 말려 보낸 고사리를 넣어 만든 육개장이었다. 특별한 재료가 아니라면, 이곳에서도 한인마트나 대형마트 한국식품 코너에서 대부분의 식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다만 가격이 조금 높을 뿐이다. 육개장 맛은 한국에서 먹는 맛과 똑같았다. 어쩌면, 이것 때문이라도 일주일에 한 번의 교회출석을 주저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조호르바루에 오는 가족들의 대부분의 목적은 자녀교육이다. 국제학교 입학문턱이 한국보다 낮고, 비용도 저렴해서이다. 그러니, 교회에도 아이들이 많다. 한인들에게 있어 교회는 일종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게 되는 이유는 더 있다. 말이나 문화가 잘 통하는 또래 친구가 없이 일주일을 보내는 아이들이 교회에 나와 나이차이 불문하고 서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면,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녹아들며 편안해진다. 나 역시 그랬다. 처남의 집엔 조카들이 셋이나 있어 아들녀석이 어울리기도 좋았지만, 교회에 나오면 또래 아이들이 열 명이 넘는데다 나이 차이가 있어도 돈독하게 어울려 다니는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라인 공간이나 다른 모임과는 달리, 교회라는 공간은 목사라는 리더가 있어서 각자 가정의 대소사를 적절한 선에서 챙겨주고, 직접 도움은 되지 못해도 어렵거나 힘든 이야기들을 들어주니 타지 생활에 어느 정도 마음을 기댈 곳이 되어준다. 거대한 타운하우스 한 구역에 새로 조성된 상가지구는 몇 년을 살펴도 여전히 입주상인이 없어 을씨년스럽지만, 일주일에 하루 일요일이면 교회가 있는 상가 앞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6. 낚시
작년 여름, 여정을 마치고 조호르바루에서 창이공항으로 가는 새벽 픽업 밴 안이었다. 중국인 운전자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중국억양이 뒤섞인 영어로 자꾸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여기에 오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골프가방을 가지고 다니는데 너는 어째서 없냐 물었다. 나는 골프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더니 무척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국인의 골프사랑은 정말 대단해 보인다고, 자기가 태운 한인 중에는 나이많은 아빠가 6살 아들에게 골프를 가르쳐준다며 여기까지 아들을 데리고 골프투어를 하는 모습도 봤다고 했다. 그런데, 너는 취미가 없냐 물었다. 나는 검도와 낚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더욱 신기함이 배어있었고, 검도가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도 비쳐 있었다. 나는 간단히 죽도와 검으로 하는 운동이라 설명했는데, 국경에 들어 차가 밀리는 때에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거기엔, 보트 위에서 미터는 넘어보이는 옐로 핀(부시리와 비슷한 물고기)을 들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있었다. 자신도 낚시를 좋아한다며, 얼마전 띠오만 섬에 가서 낚시해서 잡은 것이라 했다. 열대 바다라 보트를 타면 이런 것들은 쉽게 잡히나보다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동했다. 지금은 다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지만, 다시 오는 때엔 나도 낚시를 제대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때마침 낚시동생이 장만했다는 기내반입이 가능한 다목적 낚싯대를 빌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농어릴을 장착하면 밸런스는 어느 정도 맞을 듯 했다. 농어를 잡던 미노우 몇 개와 혹시 오징어가 나올 지 모르니 에기 두 개, 민물에서 캣피쉬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지그헤드를 준비했다. 그렇게 간단한 채비를 준비해서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낚시에 몰두할 수는 없었다. 아들과 아내를 만나는 것이 주 목적이었고, 낚시는 함께 즐길 수 있는 최소의 인원으로 여행객들이 다니는 곳과는 무관한 장소로 돌아다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낚시는 시간이 필요한 취미이기도 해서, 말많은 중국인 운전자가 보여준 그런 것을 잡으려면 최소 1박 2일 정도를 바다에서 보내야 했다. 언제나 짧은 일정으로 이 곳에 오는 내게 그런 시간을 만들 수는 없었다. 작정하지 않으면 말이다. 목적은, 집 부근이 바다이고 강도 많으니, 돌아다니면서 괜찮아 보이는 곳에서 잠깐씩 던져보자는 심산이었다.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저녁식사를 한 뒤 어두운 밤에 우리는 당가 베이로 산책을 나갔다. 물론 낚싯대도 가지고 말이다. 그러나, 낚시는 불가능했다. 따로 낚시를 하지 말라는 팻말은 없었으나, 해변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주변에 서 있는 경비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라이트를 비추면서 제지했다. 낚싯대를 펴지도 못하고 우리는 조금의 미련이 남아 푸테리 하버로 가 보았다. 푸테리 하버는 곳곳에 낚시금지 팻말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낚시금지 팻말은 어두운 밤에도 아쉽지 않게 곳곳에 보였다. 조용히 몰래 던질 곳이 있나 돌아보다가, 아무도 낚시하는 사람이 보이지도 않아서 이내 포기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인적이 뜸한 자리에서 몇 번 채비를 바꾸어가며 던져보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조호르바루에 오고 이틀이 지난 월요일 오후에 나는 처남네를 포함, 가족 전체를 데리고 드라이브 겸 낚시투어에 나섰다. 미리 검색해 본 결과로는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유료 낚시터가 있었다. 바닷가 옆이라 바닷물을 끌어들인 작은 저수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도착해보니 물을 모아 둔 아주 작은 민물 둠벙에 물고기를 풀어 놓은 낚시터였다. 분위기로는 한국의 90년대 허름한 양어장같은 분위기였다. 입장료는 5시간에 90링깃인데 10링깃은 보증금이었다. 현지인들은 주로 생미끼 낚시를 했다. 한국의 가을에 서해안 양식장에서 소금구이로 출하하는 사이즈의 새우가 세 마리에 1링깃이었다. 그것을 바늘에 달고 목줄을 주어 아주 가벼운 추를 달아 던졌다. 그것을 틸라피아나 민물 그루퍼 같은 것들이 먹다가 바늘에 걸려 올라왔다. 새우뿐만 아니라 피라미도 미끼로 쓰고 있어서, 나는 미노우를 달아 던졌다. 나는 한순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건지 모를 얼굴 노란 북방계 동양인이,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의 현지 말레이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도 생미끼도 아닌 단단한 채비의 루어를 수시로 던져대고 있으니 당연했다.
배가 퉁퉁한 현지 노인아저씨는 수시로 덩치 좋은 물고기를 낚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저씨가 새우를 쓰길래 채비를 에기로 바꾸어 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수심을 주기 위해서 지그헤드로 바꾸고 열심히 던졌다. 한낮의 무더위는 피하자고 오후 느지막히 나온 것인데도 이 곳은 무척 더웠다. 볕에 오래 서 있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낚시는 역시 현지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답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 뒤 그늘에는 아들과 조카녀석이 자기들도 잡아보고 싶다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내가 감을 잡고 낚아봐야 할 판이었다. 1링깃을 내고 새우를 샀다. 원래 세 마리인데 네마리 준다며 주인이 생색을 냈다. 임시방편으로 가장 가벼운 추가 달린 지그헤드를 꺼내 새우 꼬리를 꿰고 던졌다. 그리고, 대를 걸어 둔 뒤 기다렸다. 반응은 없었다. 주변에서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낚시를 하면서 간간히 한 두명이 물고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세멘트로 테두리를 마무리한 작은 둠벙과, 지느러미 상태가 건강하지 못한 물고기들, 그리고 내 채비에 반응없는 물고기들.. 두어 시간을 버텨 본 나는 이내 포기하고 보증금을 받아들고는 낚시터에서 나왔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낚시터 주인은 보증금을 내 주면서 피식 웃었다. 나도, 별 수 없네 라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해 주었다.
데사루 해변으로 향했다. 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야 했다. 2년 전 그 곳에서 농어 루어채비를 던지던 현지 꾼들이 생각나서였다. 오후는 더욱 저물어가고 마음은 조금 급해졌다. 그러나, 데사루 해변은 물이 빠져 있었고, 맞바람에 파도가 길어지며 물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설은 단지 중국만의 명절이 아니라는 듯 현지인들이 몰려들어 목욕탕을 연출하고 있었다. 다시 절망하고는 모래사장에서 놀겠다는 조카들을 잠시 기다려준 뒤 마지막 포인트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텔룩 셍갓 지역의 낡고 작은 해변 선착장이었다. 바다로 긴 다리 끝에 작은 오두막이 있고, 그 아래 사다리를 연결한 낡은 나무선착장이 있었다. 나는 그 선착장에서 지는 해와, 멀리 먹구름 사이로 번개가 치는 모습을 구경하며 열심히 지그헤드를 던졌다. 물론 반응은 없었다. 현지인들은 삼삼오오 낚싯대를 들고 내려와 접안한 보트에 몸을 싣고 멀리 보이는 양식장 방갈로로 향했다. 밤낚시를 하려는 것이었다. 밤은 완연해졌고, 나는 소식없는 낚싯대에 아쉬움을 담아 대를 접었다. 아들과 조카들은 함께 아쉬워 했지만, 어서 집에 가자는 짜증도 살짝 나 있었다.
역시 낚시는 현지 경험자의 조언과 가이드가 필요했다. 그런 도움 없이 생짜로 도전하니 현지 포인트 파악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포인트는 낚시금지구역으로 묶여 있으니, 낚시는 제한적이기만 했다. 교회에서 남자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낚시 이야기가 나왔었다. 푸테리 하버에서 보트를 타고 인도네시아 공해까지 나가면 GT같은 것들을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관심있는 사람들끼리 다음번엔 보트 대여해서 나가보자는 이야기까지 오갔다. 그럴 수 있을까? 아니면, 작정하고 띠오만 섬에 들어가서 2박 3일 낚시만 하다 올까? 민물 강 포인트를 잘 아는 가이드는 없을까? 생각이 많아졌다. 어쨌든, 이 곳에서의 낚시는 여전히 내 호기심과 도전의 대상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