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먹은 것들
첫날 푸트라자야의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방금 넘은 시각이었다. 호텔 로비의 직원에게 이 시간에도 문을 연 식당이나 편의점이 있을지 물었더니 ayer 6 라는 쇼핑몰 부근으로 가면 몇 집 열었을 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어쨌든 무척 배고팠다. 그 시간의 웬만한 배고픔은 대부분 참고 잠에 드는데, 나는 12시간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해 괴로울 지경이었다. 당장 먹고 싶은 것은 두리안에 맥주였다. 현지 음식이라면 아무거나 먹고 싶었다. 그런데, 이 도시엔 술을 팔지 않는단다. 이 시간에 두리안은 커녕 24시간 하는 편의점 불빛도 없이 도시는 암흑같기만 했다. 체크인 전 인공호수 위의 다리를 건널 땐 빛에 은은하게 떠 있던 푸트라 모스크도 체크인 하고 차를 몰고 나오니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뒤의 총리 관저에만 빛이 있었다. 빛이라곤 인공호수 주변의 야경을 위한 불빛밖에 없었다. 어쨌든, 직원이 알려 준 쇼핑몰에 가 보니, 그 앞에 바로 마막이 있었다. 마막은 24시간 여는 인도식 야외개방형 분식점이라고 보면 된다. 무척 반가웠다. 배고픔 때문이기도 했지만, 말레이시아에 처음 발을 디딘 날 오후에 Pelitas라는 마막에서 맛보았던 그 음식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때문이었다.
말이 통할리도 없고, 유리진열대 안의 갖가지 조리된 음식에 붙은 음식 이름을 다 알리도 없다. 영어를 못하는 현지인 식당도 꽤 많은 곳이 말레이시아이기도 하다. 더구나, 커다란 스테인리스 반합에 담긴 네 가지 소스에는 이름도 없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 가지 요리를 주문했다. 먼저 강황으로 지은 노란 바스마티 쌀밥에 쇠고기와 양고기와 뭔지 알 수 없는 커리형태의 소스를 주문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위에 뿌려주는 묽은 소스가 있는데, 뭔지 알 수 없어 무난한 색깔의 소스를 끼얹어달라고 했다. 여기에 떼따릭이라고 하는 설탕을 많이 넣은 차를 차갑게 주문했다. 자정가까이 만나는 커다란 기대와 반가움이었다. 그 반가움은, 첫만남보다는 덜 했지만, 나는 아주 맛있게 접시를 금방 비웠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것만 빼면, 시원한 떼따릭은 자정에도 땀이 흐를만큼 더운 이 나라에서 아주 반가운 음료이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테이블엔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핸드폰에 열중하며 식사를 하기도 했다. 지붕이 있는 쪽으로는 천정 선풍기가 느릿하게 돌고 있을 뿐,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벽이나 유리창 같은 것은 없었다. 오른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는 문화때문에 옆에는 손을 씻는 수도도 있었다. 무더운 나라에서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점이 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겐 치명적 약점이긴 하지만, 굳이 문화를 강요받지 않고 현지 음식을 저렴하고 부담없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마막을 아주 좋아한다. 게다가 음식들은 내 입에 아주 맛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늦은 밤 마막에 있어보면, 단 한 방울의 술도 없이 밤을 새며 먹고 마시면서 날이 밝아오도록 이야기를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경이로움을 체험해 볼 수 있다.
마막의 인도식 음식이 대중적이라면, 말레이시아의 전통적이고 대중적인 음식으로는 나시르막이 있다. 여러 현지 향신료를 넣고 약간은 질게 지어진 밥과 삼발소스, 거기에 삶은계란과 튀긴 멸치, 볶은 땅콩, 얇게 썬 오이 등등이 자리를 구분하여 한 접시에 담긴다. 현지식이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접시 위의 구성들이 제각각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접시 위에 무얼 담아도 다 뒤섞이면서 조화로운 맛을 내는 마막의 음식들을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이번 여정에서는 삼발소스에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을 먹었다. 꽤 다양하고 괜찮게 차려진 호텔 조식에서 유독 내 입에 맞는 것이, 현지 쌀로 지은 하얀 밥에 삼발소스를 끼얹어 비벼먹는 것이었다. 삼발소스는 말레이시아의 고추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아주 대중적인 소스인데, 다른 현지식으로 조리한 음식들을 제치고 나는 흰 밥에 삼발소스를 얹어 비빈 것을 두 세 접시를 먹었던 듯 하다.
말레이시아에 가면 나는 바쿠테를 빼놓지 않는다. 뼈가 붙은 돼지고기를 마늘과 한약재를 넣고 오랜시간 푹 끓이다가 마지막으로 찻잎을 넣어 마무리하는 것이 바쿠테라고 한다. 말레이시아로 이주한 중국노동자들이 클랑 지역에서 진흙을 퍼날라 벽돌을 구웠는데, 가끔 보양식이 먹고 싶어 고기가 생기면 만들어 먹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쿠테를 처음 만난 곳은 말레이시아가 아닌 싱가포르였다. 송파 바쿠테라는 아주 유명한 바쿠테 집에서 맛 본 바쿠테 국물은 내 향수까지 자극할 정도로 감동적인 맛이었다. 살이 붙은 돼지갈빗대 두어 개가 들어 있고, 마늘 껍질이 살짝 섞인 약간 맑은 국물을, 길거리에 나 앉듯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 더위에 땀흘려가며 먹었었다. 원래는 튀긴 빵조각을 넣어 먹는데, 우리는 밥을 주문했고, 국물에 매운고추 조금 섞어 먹는 이국의 음식에서 내 어릴적 향수를 느끼는 건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후로 말레이시아에 오면 바쿠테는 꼭 한 번은 먹었다.
바쿠테는 이제 이 곳의 보편적인 음식이 되어 어디서든 맛볼 수 있는데, 보편적인 만큼 국물에 넣는 재료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다양해진 만큼 맛도 천차만별이 되어 맛있는 바쿠테를 찾는 건 되려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마치, 한국에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는 흔히 접할 수 있지만, 정말 맛있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만나는 일은 어렵듯 말이다. 조호르바루에서 만난 캐주얼한 현지 식당의 바쿠테는 먹을 만 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이번 여정에서는 바쿠테의 원조라 불리는 클랑 지역의 바쿠테를 맛보러 일부러 길을 나섰다. 여정의 이튿날, 푸트라자야에서 바로 클랑으로 차를 몰았다. 유명하다는 원조 바쿠테집 네 집 중 한 곳을 찾아가는 길에서, 우리나라 휴일의 경부고속도로를 방불케 하는 교통정체를 경험했다. 겨우겨우 찾아간 바쿠테 집에는 늦은 점심시간인데도 테이블이 사람들로 거의 차 있었다. 일단 오리지널 바쿠테를 주문했다. 기본으로 튀긴 빵조각들이 작은 그릇에 담겨 나왔다. 바로 나오는 바쿠테는 다른 바쿠테와 달리 국물이 아주 검었다. 한약재를 유난히 많이 사용하는 클랑지역의 바쿠테의 특성이라고 했다. 송파 바쿠테가 깊고 은은하다면, 클랑의 바쿠테는 묵직하고 강렬했다. 거기에 한약재의 은은한 향이 흘렀다. 무엇이 더 맛있다 할 수 없었다. 그저 지역마다 결이 다른 바쿠테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아주 매력있는 맛이었다.
두리안은 그저 사랑이다. 말레이시아에 가면 1일 1 두리안 실천에 마음을 다잡는다. 물론, 점점 그것이 힘들어지고 있다. 일정에 밀리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도, 늦은 밤에 찾아간 두리안 가판대가 열려있으면 반갑고 고맙고, 두리안을 먹고 나오면 하루를 잘 마무리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조호르바루에 가면 거의 단골처럼 들리는 Bestari지역의 한 두리안 가판대 점원은 아마도 날 기억할 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리안은 종류도 많아지면서 가격도 천차만별로 점점 다양해지면서 전체적으로 점점 오르는 느낌이다. 두리안의 품종은 정말 다양하다. 국가에서 품종관리를 직접 한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때마다 맛있다고 소개하는 품종의 두리안을 찾아 맛보았다. 결국, 무상킹이라는 품종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 품종을 먹었었다. 그러나, 두리안 가격이 오르면서 무상킹은 점점 넘볼 수 없는 가격이 되어가고 있었고, 요즘엔 고산지대에서 자란 무상킹이 맛있다고 더 비싼 가격에 진열을 해 놓는다. 그런데, 두리안은 꼭 무상킹이 아니어도 맛있는 품종들이 꽤 많다. 그런 품종 중에는 킬로 당 얼마씩 파는 것이 아니라 한 통에 얼마 하며 파는데, 잘 고르면 맛있는 것들도 많아서 저렴하고 후회없이 맛을 즐길 수 있다.
야외 가판대에서 파는 두리안은 점원이 전용칼로 선택한 두리안을 쪼개어 속살을 보여준다. 살짝 맛볼 수도 있는데, 맘에 들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다른 것으로 달라도 해도 뭐라하지 않는다. 두리안은 대개 노란색이 진하고 물기가 덜한 것이 맛있다. 달콤하기도 하고 약간 신맛이 감돌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호하는 맛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점원이 먹기 좋게 껍질을 벗겨내고 쪼개놓은 두리안 속살을 하나하나 집어 먹는 맛은 자연 그대로 만들어 낸 달콤한 크림을 먹는 느낌이다. 호불호는 분명히 갈리는 과일이지만, 한 번 빠지면 정말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맛이 그리워진다. 그러면서도 열랑이 많아서인지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지 못한다. 이미 속은 부담스러워지고 입은 마른다. 그래서 옆에 물을 따로 제공해준다. 나도, 마음으로는 두리안 두 세통을 한 자리에서 비우고 싶지만, 둘이서 한 통이 가장 적절한 양이다. 욕심을 내어 셋이서 두 통을 먹던 날이 있었다. 내가 가장 많이 먹었는데, 그날 밤은 목이 마르고 속에서 열이 오르는 느낌으로 좀 힘들었었다. 맥주 한 캔을 곁들인 것이 더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직 두리안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아들은, 우리 내외가 두리안을 먹고 있을 때, 차 안에서 유튜브를 보며 기다리곤 한다.
이번 일정에서는 두리안을 잘 챙기지 못했다. 한국으로 치자면 한여름이 두리안의 제철이고, 지금은 출하되는 두리안이 점점 많아지는 시기이다. 멜라카의 존커워크에서 관광지의 비싼 두리안을 맛으로 보상받아 먹고, 조호르바루에 와서 한 통, 그리고 돌아오는 여정을 위해 싱가포르로 건너가기 직전에 한 통을 먹었다. 두리안은 여정이 마무리 될 때마다 아쉬움을 남긴다. 한 번에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두리안을 좀 더 먹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말레이시아에 오면 값싸고 맛있는 것들이 많고, 더운 나라의 특성상 요리하는 것이 번거롭다. 그러나, 이번 여정에서 나는 두 번 집에서 요리를 했다. 사실 나는 먹는 것도 좋지만 요리도 즐긴다. 특히, 내가 원하는 식재료들이 풍부한 지역에 가면, 내가 기억하는 레시피대로 요리해보고 싶은 욕구가 넘친다. 말레이시아도 그렇다. 생허브와 온갖 향신료들을 값싸고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으니, 욕구는 마트 진열대를 보는 순간 넘치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향신료를 구입해서 한국으로 가져와 집에서 사용하기도 한다. 향신료와 생허브는 일단 저렴하고 다양하다. 채소류도 무척 저렴하고 다양하다. 문제는 어패류인데, 바다가 삼면인 이 나라에서 이상하게도 어패류는 비싸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다. 특히 오징어류는 선도도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일단 생선요리는 내 요리계획에서 제외시켰다.
쇠고기 역시 고민이 생긴다. 현지 쇠고기는 저렴하지만 냄새가 있고 질기다고 한다. 맛도 조금 떨어지는 편이라서, 맛있는 쇠고기는 주로 호주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닭은 일단 최고다. 우리나라 닭 가격의 반도 안 되는데, 크기는 두 배쯤 크다. 그 쯤되면 요리재료는 고민을 멈추게 된다. 그러나, 현지에 살고 있는 조카들은 닭을 별로 반기지 않았다. 너무 자주 먹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조호르바루에도 한국식 치킨집이 있다. 주문하면 우리나라 현재 치킨값의 3분의 2 가격정도인데, 양은 두툼하게 살이 오른 닭의 부피가 2.5배 쯤 된다. 소스도 한국식이다. 치킨을 사랑해도 부담없는 나라이다.
첫 요리는 호주산 안심살을 통으로 구입했다. 그것을 스테이크용으로 잘라달라고 했다. 마리네이드용으로 이탈리안 허브 믹스를 준비했고, 곁들일 샐러드는 봉투로 파는 베이비 루꼴라가 포함된 샐러드 믹스에 바질을 추가했다. 소금 후추 이탈리안 허브로 마리네이드한 스테이크를 미디움 레어와 웰던으로 구워 취향에 맞게 나누었고, 샐러드는 소금 후추 올리브오일 발사믹 식초에 레몬즙을 넣어 버무렸다. 나는 양고기가 먹고 싶어 냉동된 양고기를 구입해서 빈달루 커리믹스로 마리네이드했다. 그것을 해바라기 오일에 익혀 먹었다. 약간의 냄새가 배이긴 했지만, 괜찮은 맛을 냈다.
두 번째 요리는 커다란 닭다리 4개와 닭가슴살 4개를 사서 머스타드와 바질을 섞어 마리네이드했다. 그것을 오븐에 넣고 익혔고, 그린빈을 볶아 곁들였다. 한국식 두루치기도 해보고 싶어 순살 돼지고기를 고추장 고추가루 물엿, 화이트와인, 후추에 버무려 재워두었다가 야채와 함께 볶았다. 더운 나라에서 부엌의 열기를 견뎌내며 수건을 걸치고 땀을 닦아가며 요리하는 모습을 조카가 찍어주었는데, 영락없는 중국집 주방 요리사였다. 재료에 구애없이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현지에서 요리하는 것을 무척 즐긴다.
말레이시아에 오면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딤섬이나 크랩요리를 먹는 것이 공식에 가깝다. 저렴하고, 다양하고 맛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른 아침부터 북적이는 중식당에서 찐 닭발을 포함한 딤섬을 다양하게 먹는 것을 좋아하고, 크랩의 속살도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머드크랩의 두텁고 단단한 껍질을 깨부수고 주섬주섬 살을 빼먹는 작업이 귀찮기도 해서 일부러 찾지는 않는다. 딤섬집은 가보고 싶었지만, 이번 여정은 조금 색다르게 계획하느라 일정을 잡지 못했다. 술이 비싸고, 맥주는 종류가 많지 않다. 생선은 비싸니 손이 가지 않는다. Non-halal 코너에서 살 수 있는 돼지고기는 역시 맛있다. 부킷 인다의 에온 몰 식당가에 있는 부스형 락사 집에서 먹은 락사는 독특하면서도 맛있는데, 몸에 열이 나게 했다. 찾자면 정말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이제 나는 몇 번 다녀봤다는 부심으로, 락사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두리안과 바쿠테에 집중해보고 싶다. 한 번 정도는 오전의 중식당에서 딤섬을 먹어 볼 것이다. 말이 통하는 마막집에 가서 내가 모르고 먹었던 것들에 설명을 들어보고 싶다. 일단 그 전에, 집밥을 많이 먹어두고, 현지에서 해 볼 요리 레시피도 좀 둘러봐야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