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91.

by 전영웅

책 읽는 일을 좋아한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있지 않은 음악을 CD 플레이어로 조용히 틀어놓고 책을 읽는 순간을 사랑한다. 요즘엔 아침 일찍 일어나 동이 트는 순간을 즐기며 책을 읽는다. 책을 읽은 지는 오래되었다. 15년도 더 된 오래전,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남해의 상수리나무 숲 속 부대 의무대에서 책을 잡은 것이 시작이었다. 전공의 시절, 이틀에 한 번씩 출근과 퇴근을 하며 지하철에서 토지를 읽었다. 그렇게 토지 전집을 완독하는 데 정확히 일 년이 걸렸다. 텔레비전이나 영상물을 멀리한 것은 책을 읽으면서부터 였다. 정말 필요한 것 외에는, 움직이는 화면을 거의 보지 않았다. 영화를 멀리하게 되고, 유튜브로 대변되는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는 단점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일은 시간을 충실하게 채우고 생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습관이었다.

서점에 가는 일 역시 좋아한다. 서울에 살 때엔 쉬는 날에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아이와 아내와 함께 광화문 교보문고에 자주 들렀다. 제주에 내려와서는 제주시청 옆 번화가에 나갈 일이 많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큰 길가 어느 건물의 2층은 제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서점이었다. 약속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면, 나는 꼭 서점으로 들어가 관심 있는 신간이나 진열된 책들을 둘러보았다. 내 관심사는 주로 사회과학과 문학, 예술 분야의 책이었다. 관심 있는 책을 발견하면 반가움에 바로 집어 들어 계산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이 발달한 요즘에 서점 진열대에서 내가 원하는 책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리고, 서점 주인은 꼭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좋아하더라도 나와는 관심사가 달랐다. 서점을 가면, 그런 면들이 많이 아쉬웠다. 그리고, 시대는 점점 변하면서 서점도 사라졌다. 정확히는 높아진 임대료와 인터넷 서점들에 밀려 사람들의 시선에 잘 닿지 않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둘러보다가 원하는 책을 발견하거나 관심이 가는 책을 집어 드는 일 역시, 시대의 흐름과는 맞지 않는 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제주에 급격하게 불어닥친 수많은 변화들이 전부 우려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좀 더 맛있는 집이 생기고, 좀 더 커피맛과 풍경이 좋은 카페가 생기며, 삶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곁에 많아지는 일은 반가웠다. 거기에, 작은 책방들이 하나하나 생기는 변화는 더욱 반가웠다. 광풍으로 둥치가 꺾이며 고목들이 쓰러져 갈 때, 곳곳에서 조그맣게 솟아나는 싱그러운 새싹 같았다. 시작은 종달리의 소심한 책방이었다. 한적한 시골마을 귀퉁이에 작은 서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대체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걱정부터 들었다. 그러다, 나들이 겸 들러 본 책방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었다. 진열된 책들을 둘러보는 순간 들었던 생각은, 어쩌면 이렇게 취향에 맞는 책들을 압축적으로 모아놓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진열된 모든 책들을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의 서점들에서는 볼 수 없고 인터넷 서점에서나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책들이 몇 권씩 진열대에 꽂혀 있었다. 작은 공간에 빼곡하게 들어찬 책 안에서, 나는 마음의 공간이 폭발하듯 넓게 팽창하는 기분을 느꼈다. 무아지경으로 책을 뽑아 들었고, 불가항력으로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기념품으로 끝에 지우개가 달린 연필이 책을 넣은 봉지 안에 있었다.

칠성통 아케이드 내에 라이킷이라는 서점과 함덕의 만춘서점이 뒤를 이었다. 라이킷은 제주라는 주제에 좀 더 집중하는 특징이 있었고, 만춘서점은 소심한 책방과 더불어 문학예술 사회 등등의 보편적 주제를 적당한 시선과 배분으로 다루고 있었다. 작은 서점의 특징이라면, 작은 공간을 가득 메운 진열대 안의 책들에서 서점 주인의 관심과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관심사가 비슷한 서점 주인이 골라서 가져다 둔 책 안에 내가 만나고 싶은 책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관심 하에 좋은 책을 소개받을 수 있기도 해서였다. 그것은 내가 발품을 들여 들른 서점이라는 실제적 공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검색으로 내가 찾는 책이나 만날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인터넷 서점이 신간이나 베스트, 또는 에디터 추천 등의 방식으로 책을 소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점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소개받는 책보다는 집중력이 떨어졌다. 그런 면에서 만춘서점은 내게 어느 정도의 도서 멘토 역할을 해 주는 책방이다.

작은 책방들은 점점 더 많이 생겨났다. 위치도 특징도 제각각이었다. 카페를 겸하는 책방도 있었다. 서광리의 인공위성 제주는 조금 독특하다. 책을 하얀 종이로 포장해놓고 포장에 단 한마디의 질문을 적어놓는다. 질문이 내가 관심 있어하는 질문이라면 구입한 후에 포장을 뜯어 무슨 책이 들어있는지를 확인한다. 나는 이 서점에서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이즈야마 간지가 쓴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를 만날 수 있었다. 고산리의 무명서점은 동네 한 복판의 유명제과 2층에 있다. 진열된 책의 주제는 좀 더 넓은 폭과 다양한 시선을 담고 있다. 그리고, 공간의 구성이 아기자기해서 소파에 주저앉아야만 제대로 보이는 책들도 있다. 나는 이 곳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을 만났다. 표선 세화리에는 북까페 이마고가 있다. 이마고 출판사는 나에겐 인상이 깊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을 통해 신경과 의사 올리버 색스를 알게 해 준 출판사였기 때문이다. 그 출판사 대표가 아예 제주로 내려와 차린 카페이자 책방이었다. 거기서 나는 올리버 색스뿐만 아니라 아주 인상 깊게 읽었던 로버트 L. 하일브로너의 경제 역사서 ‘세속의 철학자들’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이가체프 드립 커피를 마시며 마루야마 겐지의 ‘달에 지다’와 헨미 요의 ‘먹는 인간’을 만났다.

가수 요조가 운영해서 단번에 유명해진 수산리의 책방무사와 제주시내 관덕정 맞은편의 오랜 도심에 자리한 미래책방은 비슷한 면이 많다. 일단 낡은 간판을 치우지 않고 한편에 작은 책방 간판을 달아두었다는 점과, 필름 카메라를 판매하거나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래책방은 필름 카메라 수리까지 담당한다. 책방무사는 일단 페미니즘 서적이 공간의 한 면을 채운다. 나는 거기서 수전 손택과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의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을 논한 책을 만났다. 미래책방에서는 ‘고사리 가방’을 만났다. 송당의 달빛서림은 자유의 어떤 느낌이 존재한다. 무한정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 그런 자유가 아니라, 힘들게 부딪히고 끊임없이 싸우며 기어이 맛보려는 자유 같은 느낌 말이다. 거기서 나는 절판되어 더 이상 구하기 힘든 빌 에반스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두터운 자서전을 만났다.

달리도서관은 제주의 구도심에서 든든하게 뿌리내린 페미니즘과 생활문화의 실험적 공간이었다. 나는 달리도서관을 사랑했고,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공부했고 인연을 만들어 나갔다. 시간이 흐르며 각자의 삶은 각자의 모습대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달리도서관도 나름의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달리도서관의 일부가 한림 옹포로 모습 그대로 옮겨졌다. 그리고, 책방이 꾸려졌다. 달리 책방에는 내가 달리도서관에서 보아왔던 수많은 책들이 공간의 한쪽 면을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다. 십 년을 채워가는 인연의 달리지기들이 책과 커피를 다루며,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고 너무 뒤늦게 찾아간 달리지기들과 달리책방은 새로움보다는 미안함과 반가움이었다. 잠깐의 만남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번엔 시간을 두고 찾아와 진득하게 앉아 책도 읽고 이야기도 나누겠다 약속했다. 그리고, 나는 달리책방에서 이창현, 유희의 웹툰 단행본 ‘익명의 독서중독자들’과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을 만났다.

제주섬의 곳곳에 생겨난 작은 책방들을 찾아다니는 일은 맛있는 음식을 종류별로 찾아 음미하는 일과 비슷하다. 진열된 책들을 보며, 서점 주인의 성향과 관심사를 느끼는 일은 식당 주인의 손맛을 느끼는 일과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관심사와 비슷하거나 일치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입 속의 한 술에서 그리웠던 향수를 느끼는 일과 같다. 이 과정은 깊고 두텁다. 약간의 경험이 있어야 가능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빠르게 변해가는 디지털 세상을 거스르는 아날로그의 공간에서, 그런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잊혀가는 어떤 재미와 향수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시대를 역행하지만 변화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작은 서점들의 탄생들을 나는 격하게 반기며 사랑한다. 정말 필요한 변화는 이런 모습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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