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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ug 27. 2019

201908 조호르바루 여행기, prologue

  아침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은 낮에 가까워지며 결국 폭우를 퍼부었다.  번개와 천둥의 간격이 짧았다.  하필 출발하는 날에 악천후라니..  이제껏 내린다던 비는 소식도 없던 나날이었다.  다행히 바람은 적어서 비행기가 뜨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출발할 수 있을까 싶게 비가 퍼부었다.  동네 친구가 점심을 같이 할 겸, 공항까지 태워주겠다며 차를 몰고 왔다.  퍼붓는 비 속에서 친구의 차를 보니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머물던 자리는 무거웠다.  쉽게 털고 가볍게 발걸음을 시작하기 쉽지 않았다.  며칠 동안 아무도 없을 집의 정리정돈과 점검, 마당에서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반려견, 그리고 이제 막 가을 준비를 시작한 텃밭..  나는 한 자리에 무언가 들을 잔뜩 쌓아놓고 눅진하게 살고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고 출발할 즈음이면 항상 보게 되는 내 모습이다.  준비는 어젯밤부터였다.  늦게 퇴근하자마자 집안의 쓰레기들을 클린하우스에 버렸다.  곧바로 반려견을 데리고 한동안 못할 산책에 나섰다.  한 시간 정도 동네를 돌고 들어와 챙겨야 할 짐들을 체크하고 모아두었다.  씻고 잠을 자는 것 마저도 일정과 준비의 연장 같았다. 


  출발하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냉동실의 얼린 밥과 남은 반찬들을 꺼내 아침으로 비웠다.  할 수 있는 설거지를 최대한 말끔하게 해 두고, 예약으로 밤새 돌렸던 빨래를 건조대에 널었다.  바로 바깥으로 나가 날이 넓은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갔다.  미리 정리하고 만들어 둔 빈 이랑에 배추 모종을 심었다.  두 이랑에 배추 모종을 심고, 한 이랑에는 무를 파종했다.  남은 자리엔 자색감자와 쪽파를 심었고, 손이 닿기 좋은 구석자리에 상추 모종을 심었다.  한 시기의 텃밭을 준비하는 데 있어 모종을 심고 파종을 하는 건 어렵지 않고 금방 마무리할 수 있다.  그전에, 심을 자리를 만들고 정돈하는 것이 더 어렵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하고 바람에는 묵직한 습기가 배어 있었지만, 날씨예보를 믿을 수 없었다.  열심히 물을 주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나는 폭우를 만나게 된다.  


  가을 텃밭 준비를 마치고 반려견의 변을 걷어 퇴비 통에 넣고, 먹이통과 물통을 대용량으로 교체했다.  사료와 물을 넉넉하게 채워주었다.  주인의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모를 녀석이라, 미안함이 컸다.  그저 주인이 가까이 와 있다고 흙 묻은 팔을 연신 핥아댄다.  산책 가방에 간식과 리드줄과 배변봉투를 담아 마당 한편에 두었다.  라이를 좋아하고 나와 친한 동네 친구들이 시간 있을 때 한 번씩 돌보아 주기로 했다.  나를 집사로 삼기 시작한 동네 길고양이들 사료도 큰 그릇에 넉넉하게 담아 비를 맞지 않는 그늘에 놓아주었다.  그러고 나니, 동네 친구의 픽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씻고 짐을 챙겼다.  문단속을 하고, 나는 폭우 속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잠시 주춤하던 폭우는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 다가오자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번개와 천둥의 간격 역시 멀지 않았다.  그래도 비행기는 정시에 출발했다.  비행기는 불안한 기류에 많이 흔들렸고, 비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동안 두 번 벼락을 맞았다.  이륙하자마자 졸듯 말 듯 하던 눈이 창밖에서 강렬하게 번쩍하는 빛에 말똥해졌다.  정신이 돌아오고,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리는 기내에서 방송하는 기장과 승무원의 목소리 역시 긴장이 가득했다.  6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지금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다시 조호르바루로 가기 위해 연결편 탑승구 앞에 앉아 여행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 소설을 읽었다.  짤막한 단편 하나하나가 밀도 있고 묵직하지만, 작가가 다루는 여성성은 아무래도 시대성을 접목시켜야만 불편한 마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았다.  이 가슴 아프고 아름다운 영화를 이제야 보았던 이유 중 작은 하나는 영화를 홍보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홍보 방식에 대해 화가 나는 작품들을 종종 만난다.  노출과 수위를 내세워 호기심만 잔뜩 자극하는 방식으로 작품의 본질과 깊이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이제 조호르바루로 가는 하늘 위에서 감상을 이어가야 한다.  

  나는 여행을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사람에 너무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언제나 궁금해한다.  그 궁금증이, 아름답고 멋진 풍경에의 감동과 맛있는 먹거리에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더구나, 며칠 잠깐씩 하는 여행으로 그곳의 사람들을 알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한두 달도 아니고 일 이년을 살아도 알까 말까 하는 그곳의 사람들과 사는 방식에 나는 너무 욕심을 부린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심플하게 한 곳에서 느긋하게 머물면서, 조호르바루에서 먹고 싶은 것과 아직 가 보지 않은 시내 구경, 그리고 시장 구경만을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아들 녀석은 학교에 가야 하고, 조카들을 전부 챙기기엔 인원이 너무 많고, 주말이면 나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은 교회에 집중한다.  느긋하게 이곳저곳 다닐 여유가 없다.  그래서,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해결해야 할 저녁은 현지 음식을 골라 락사를 주문했다.  공항 음식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주문하자마자 나온 락사 한 그릇은 들통 바닥을 애써 긁어 겨우 만들어 낸 마지막 한 그릇 같았다.  면발은 살짝 불고 토막이 나 있었다.  형편없는 락사 한 그릇으로 여행의 첫 끼를 시작하니 좀 더 맛있는 락사를 먹고 싶다는 열망에 불이 지펴졌다.  내일부터는 1일 1 두리안을 비롯해서, 적극적이고 도전적으로 현지 먹거리를 찾아 나서야겠다 다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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