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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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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Sep 05. 2019

텃밭일기 #14, 20190905

  아침 일찍 시내에 나갈 일이 있었다.  때마침 그 날은 오일장 날이었다.  마침 잘 되었다 싶은 마음으로 일을 마치자마자 오일장으로 향했다.  8월 말의 어느 평일, 아직 차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는 이른 아침이었다.  모종을 사러 들른 가판 안쪽에서는 하루 장사 준비를 마친 주인이 조금 급하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모종을 구입했다.  가을배추, 무 씨앗, 쪽파, 자색감자, 그리고 상추 모종..  종류도 간략하게 정리했고, 양도 조금씩만 구입했다.  가을 텃밭에 심어 볼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양배추, 콜라비, 비트, 마늘 등등..  그렇지만, 몇 년간 현재의 텃밭에서 경험해 본 결과, 제대로 자라는 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고추나 가지는 가을이 깊어지면서 열매 맺기에 좀 더 집중했다.  자리를 만들자고 여전히 성실하게 열매를 맺는 것들을 뽑아낼 수는 없었다.  고구마는 수확하려면 아직 두 달 정도 남았다.  가장 무난한 작물로 적당하게 심는 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욕심을 거두며 선택한 가을 거리들이지만, 그럼에도 욕심은 남아 있었다.  사실 감자도 그리 잘 되는 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자색 씨감자를 보는 순간, 한 번 더 시도를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구입한 모종을 비닐백에 담아 양 손에 들고 오는데, 씨감자 봉투가 제일 무거웠다.

  얼마 전부터 이들을 심을 텃밭 자리를 천천히 정리해 왔었다.  올해 물외는 완전히 실패해서, 잘 자라지도 않았다.  하나 둘 물외가 열리는가 싶으면 어디선가 벌레들이 와서 파먹기 시작했다.  수박도 몇 개 작은 것들을 맺더니 시들 거리기 시작했다.  호박 한 줄기도, 무성하게 줄기를 뻗으며 주변을 뒤덮었다.  그중 덩굴 하나가 매실나무 가지를 타고 넘더니 큼직한 늙은 호박 하나를 매달고 있었다.  호박을 거두고 아깝지만 덩굴을 뽑아냈다.  아내가 좋아하는 루꼴라는 많이 매워지고 벌레 먹어, 먹기에는 조금 힘든 상태가 되었다.  덩굴들과, 주위의 잡초들을 같이 걷어내었다.  토마토도 거두었다.  토마토는 대책이 서지 않을 정도로 덩굴이 되었고, 지주대가 덩굴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다.  열매도 많이 없거니와, 있는 열매들은 다 풍뎅이들 차지였으니 미련이 생기지 않았다.  건들 때마다 날아가 버리는 풍뎅이들을 보며 토마토 덩굴을 거두어 버렸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텃밭 바깥쪽으로 꽤 넓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안쪽을 둘러보니 깻잎이 바이러스에 잎이 말리고 있었고, 좀 더 안쪽으로는 딸기 덩굴줄기들이 뒤덮은 빈자리들이 보였다.  그곳까지 주변의 잡초들을 포함해서 정리했다.  가을 모종들을 심을 적당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8월의 마지막 주에 나는 마련된 자리들을 한 번 더 살피고 구입해 온 모종과 씨앗을 심었다.  배추는 30cm 간격으로 두 이랑에 심었다.  무는 이랑 하나에 골을 내고 씨를 일렬로 뿌려 덮었다.  자색 감자는 구석자리와 남은 이랑에 30cm 간격으로 하나씩 심었다.  그리고 쪽파는 텃밭 안쪽에 낸 자리에 조밀하게 하나씩 심었고, 씨를 뿌리려다가 조금 귀찮아서 모종으로 몇 개 사온 상추는 손이 닿기 좋은 텃밭 가장자리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심어두었다.  그렇게 가을 텃밭 준비는 마무리되었다.  봄이든 가을이든, 모종을 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종을 심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이 조금 힘들고 시간이 걸린다.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 심을까, 약간의 고민도 필요하다.  조금은 허탈할 정도로 모종 심기는 금방 끝났다.  흐린 하늘, 땅은 적당하게 촉촉해서 모종 심기엔 딱인 날이었다.  그래도 수시로 틀리는 일기예보에 마음이 불안한 나는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당 호스로 심은 자리에 열심히 물을 뿌렸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후부터 약 3일간, 폭우에 가까운 엄청난 비가 내렸다.  


  가을 텃밭은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다.  배추와 무는 필요가 아닌 경험과 이벤트에 가까운 김장용으로 키운다.  감자는 초겨울에 적당히 크면 캐서 쪄 먹으면 될 것이고, 쪽파는 겨우내 자란 것을 봄에 뽑아서 요리에 쓰거나 파김치를 할 것이다.  잡초 걱정도 덜어진다.  잡초도 철이 있어서 때마다 손이 가야 하지만, 여름만큼은 아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이는 것들을 정리해주면 된다.  가을 모종을 양껏 심지 않은 이유는, 날이 추워지면 상품성이 없어 버려지는 파치들이 이 섬 곳곳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버려지는 파치들이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운 것들보다 더 알차다.  애써 심고 키우는 것보다, 추운 날 돌아다니며 파치를 줍는 것이 더 재밌고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여러 이유로 가을 텃밭은 마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가을답지 않게 수 일에 걸쳐 폭우가 내렸고, 그 사이 나는 휴가를 다녀왔다.  다녀와서 둘러본 텃밭의 배추들은 무사했고, 무는 일렬로 무수한 싹을 틔워냈다.  좀 더 자라면 솎아주어야 한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은 여전한데, 곧 태풍이 올라온다고 한다.  태풍을 거치고 나면 나는 다시 집과 텃밭에 손 보아야 할 일들이 넘칠 것이다.  지금은 무사히 견뎌내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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