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내를 질주하는 2층 버스 운전기사들에게 기립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좁다란 차로를 각박하게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그러려니 하는 체념의 여유를 보여 주었다. 도심의 여유 없는 회전공간에서 ‘이 정도쯤이야..’ 하는 여유로움으로 완벽한 코너링을 구사하는 운전실력은, 버스를 기다리며 바라보는 나에게 감탄과 흥미로움을 선사했다. 홍콩 섬의 가파른 경사와 극도로 구불거리는 산길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질주하고, 여유롭게 회전하며 오르내렸다. 브레이크 기능만 멀쩡하다면, 여행자는 버스 운전기사에게 여행의 재미를 내맡겨도 좋을 것 같았다.
버스 2층의 맨 앞자리에 앉는다는 건, 시선의 높이가 시야의 정면이 되거나 내려다보는 위치에 고정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내에서는 시야를 넓게 만들어주고, 굴곡진 산길에서는 풍경 안으로 질주하는 재미와 그 안에서 스릴을 느끼게 해 준다. 웬만한 놀이기구 못지않다. 그래서, 2층 맨 앞자리는 대부분 여행자들이 차지한다. 우리도, 여행 첫날 시내를 돌아다닐 때엔 2층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3일째 첵추의 스탠리를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백인 여행자들이 차지한 앞자리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옥토퍼스 카드는 정말 유용했다. 공항 도착하자마자 부스에서 옥토퍼스 카드를 신청하면 약간의 보증금과 함께 정해진 액수를 채워둔 카드를 살 수 있다. 이것은 홍콩 내 거의 모든 교통수단에서 이용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티머니와 비슷하다. 거기에 더해 편의점이나 스타벅스, 그리고 관광지의 입장료 지불수단으로 사용 가능하다. 팝업 역시 지하철에서 가능하지만, 우리는 스타벅스에서 팝업 해서 사용하고 다녔다. 홍콩을 떠날 때에도, 공항 부스에서 반납하면 잔여금액과 보증금을 내어준다. 정말 편리하고 완벽에 가까운 카드였다.
3일째, 체크 아웃을 하고 캐리어를 호텔에 맡겨둔 뒤, 우리는 마지막 일정에 나섰다. 검색하다가 우연히, 제이미 올리버의 식당이 바로 옆 하버시티 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 겸 점심은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사, 그가 보여준 대로 요리를 몸에 익힌 내가 Jamie’s Italian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방송에서 보았던 익숙한 포인트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재료의 자연스러움과 신선함을 강조하는 배치와 진열, 그리고 주방에서 일하는 이들의 검은 세로무늬 앞치마.. 음식 역시 집에서 만든 느낌의 캐주얼함이 살아 있었다. 내가 그의 방식대로 요리하면서 짐작했던 느낌들이 내 앞에 놓인 접시에서 되살아났다.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있다면, 좀 더 오래 이 식당에 머물면서 천천히 즐기고 싶었지만, 오늘이 마지막인 홍콩 여행자에게 시간이 있을 리 없었고, 여유롭게 음식을 즐기기엔 제이미의 요리들은 생각보다 비쌌다.
첵추의 스탠리로 향하는 버스를 하버시티 앞에서 탔다. 버스 2층의 앞자리를 기대했지만, 그 자리는 이미 백인 여행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노선방향에서 바다가 잘 보일 자리로 앉아 한 시간 조금 넘게 달렸다. 버스는 홍콩섬의 오른쪽으로 돌아 가파르고 구불거리는 좁은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홍콩은 추석 당일은 휴일이 아니고 다음날이 휴일이었다. 우리는 홍콩의 휴일에 스탠리를 가는 것이었다. 버스는 당연하게도 탑승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약속한 듯 스탠리에서 다 함께 우르르 내렸다.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이 내렸다. 중간에라도 2층 앞자리에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헛것이었다.
스탠리와 리펄스 해변, 그리고 딥워터 해변을 차례로 다녔다. 휴일이라 스탠리에는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스탠리 마켓은 시내 야시장만큼 볼거리가 없었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술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점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날은 무척 더워서 우리는 금방 더위에 지쳐 식사나 할 요량으로 현지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북적이는 분위기에서 친절은 기대할 수도 없는 데다 음식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기대를 품고 찾아온 스탠리는 아니지만, 그곳에서 먹은 음식만큼 스탠리는 그저 그랬다. 리펄스 해변과 구글 지도가 가끔씩 저지르는 바보짓에 덥고 습한 해변길을 따라 걸어간 딥워터 해변 역시 여행자에겐 조금 거리감이 있었다. 모래사장과 곳곳의 나무 그늘에서 사람들은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거나 드러누워 쉬고 있었다.
해변은 휴일이어서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런데, 잘 보면 홍콩 현지인이나 백인들은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끼리 놀러와 물놀이를 즐기거나 카페나 식당 안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반면, 나무 그늘이나 그늘진 구석자리에 텐트나 자리를 펴고 대여섯 명씩 모여 수다를 나누거나 잠이든 사람들은 피부가 가무잡잡한 동남아시아계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로 들어가지도 않고 자리 편 그 자리에서 자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가져온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가라오케 마이크로 노래를 불렀다. 모래사장과 바다가 만나는 얕은 물에서는 사람들이 수영을 하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깊은 바다 위에는 고급 요트들이 떠 있었다. 요트 2층에서 바다까지 내려오는 미끄럼틀에서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바다로 떨어졌다. 해변의 그늘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 위의 요트까지.. 풍경은 점점 짙어지거나 옅어지는 어떤 그러데이션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현지인이 아니면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첵추의 해변들을 여행자는 그저 그런 기분으로 거쳐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해변은 가파른 언덕 아래 있었고, 버스 정류장은 언덕을 조금 올라야 나오는 길가에 있었다. 구글 지도의 바보짓과 언덕을 올라야 하는 더운 날의 수고 끝에 우리는 오던 길과는 달리 터널을 통과하여 빠르게 시내에 들어왔다. 홍콩 여행은 어디 느긋하게 머무르는 여행이 아니었다. 첵추의 해변들 역시, 예상과는 다르게 반나절도 머무르지 못한 채, 남은 시간을 고민하다가 별 수 없이 센트럴로 향한 것이었다. 어제 들렀던 소호의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IFC 몰 안의 중식당에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휴일 홍콩 시내의 풍경도 전날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공원마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동남아 여성들이 가득했고, IFC몰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는 2층 통로에도 마치 노숙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이 한쪽을 차지하고 가득히 앉아 있었다. 물소와 무사의 동상이 있는 몰 안의 공원 역시 비슷한 피부색의 여성들이 한가득 앉아 있는데, 바로 맞은편의 펍 안에는 피부가 하얗고 말끔한 백인들이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극과 극의 사이를 다녀야 하는 어떤 불안한 마음은 첵추의 해변에서 시작되어 여행의 마무리가 된 센트럴까지 이어졌다. 아내의 설명으로는 이러했다. 주로 필리핀에서 온 가정부들인데, 휴일이면 홍콩 사람들은 가족들만의 시간을 위해 가정부들을 밖에 내보낸다고 했다. 가정부들은 밖으로 나오면 비싼 홍콩 물가를 감당하기 힘드니 잠 잘 곳도 먹을 곳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결국 공원이나 통로를 차지하고 삼삼오오 모여서 가져온 것을 먹고 노숙하듯 보내다가 휴일이 지나면 일하는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처음 여행하는 홍콩에서 그런 사회현상을 가지고 내가 무어라 비판이나 첨언하기는 힘들다. 자본을 조금 이해했다고 알량하게 나설 수도 없다. 그러나,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뭔가 말하기 힘든 그 불편함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아무렇지 않아 하는 사회는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호텔에 들러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려고 페리 선착장까지 걸었다. 밤이 시작된 선착장 텔레비전에서는 그날 오후 어느 몰인지 지하철에선지에 있었던 반중 시위대와 친중 시위대의 충돌장면을 뉴스로 내보내고 있었다. 여행 내내 반중 갈등이 빚어낸 저항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시위대를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침사추이 선착장에서 내려 호텔로 향하는 길에는 경찰들의 삼엄한 눈빛이 곳곳에서 보였다. 거리엔 press라고 적은 스티커를 검은 헬멧 뒤에 붙이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검은 티셔츠의 젊은 사람들을 두어 명 볼 수 있었다. 생각이 좀 많아졌다. 자본의 첨단에서 극과 극이 뒤섞인 채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홍콩이, 중국을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심리와는 어떤 역학을 주고받는 것일까? 체제와 자본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세상에서, 홍콩 사람들이 저마다 주장하는 논리와 갈망하는 자유는 올바르고 합리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까? 통제력 강한 체제의 손아귀와 자본의 자유가 보여준 극과 극의 혼란 사이에서, 처음 발을 들여 본 여행자인 나는 얄팍하면서도 혼란스럽게 홍콩 시민들의 주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의 혼란이 나를 어렵게 했다.
홍콩섬에서 침사추이를 가로지르는 페리 안에서, 나는 홍콩섬의 야경을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다시 K2 셔틀을 타고 카오룽 역으로 가서,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타고 츠레자오 섬의 공항에 도착했다. 남은 여유를 글쓰기와 이제 다시 헤어질 아내와의 시간으로 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야간비행 끝에 이른 아침에 도착한 집에서는 내 발자국 소리를 알아들은 반려견 녀석이 격하게 꼬리를 흔들고 뛰어다니며 나를 반겼다. 제주엔, 가을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