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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Feb 03. 2020

202001, 가오슝 타이중 여행기, 첫 번째.

  잠시 고민했었다.  생각했었던 후쿠오카로 다녀올까..  일본은 ‘같은 명절을 지내지 않는 나라’로서 여행하기 딱 좋은 선택이었다.  후쿠오카에서 가고시마, 가능하다면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까지..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에의 동경은 강렬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기에 일본을 여행한다는 것의 부담과, 결정적으로 제주에서 후쿠오카 직항노선이 사라졌다.  사라진 직항은 가오슝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만.. ‘같은 명절을 지내는 나라’라는 부담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대만을 간다면, 타이베이 말고 가오슝과 타이중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 역시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짧은 설 명절의 뒤에 며칠의 휴가를 얻어 붙였다.  그리고, 가족여행으로 가오슝행 항공권을 예매했다.  

  불가항력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호들갑스러웠던 아프리카 돼지열병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두려움 뒤로 밀려 있었다.  짐 속에 돼지열병의 전파 매개체가 하나라도 보이면 무거운 벌금을 물린다는 기내 경고방송보다도, 마스크를 썼는가 안 썼는가가 더욱 신경 쓰였다.  대만에 의심자가 1명 있다는 소식이었고, 우리의 여행은 불안 속에서 부유했다.  우리는 이미 불안의 매개체가 되어 있었고, 정말 위험한 매개체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바이러스의 전파는 하루하루가 다르기에, 그저 위안은 설 연휴 동안 제주에 2만 명 이상의 중국인 입국자가 예상되는 반면, 대만은 정치적 이유로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여행은 별로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가오슝의 한낮은 더웠다.  조금 낡은 듯한 가오슝 공항을 벗어나 지하철을 타고 예약된 숙소로 향했다.  세 가족이 각자 하나씩의 캐리어를 끌고 가는 모습은, 비슷한 생김새의 동아시아인들 속에서도 영락없는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제주에서도 가끔 보았던 누군가들의 여행, 사는 사람들은 두 손이 비어 있어도 발은 진득하게 땅에 붙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양 손에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그들은, 조금 피곤해 보여도 발은 마치 땅에서 쉽게 분리되듯 가벼워 보였다.  아니, 조금 부유하는 것 같이 발은 땅에서 미끄러지는 듯했다.  입장과 시선의 차이, 나는 지금 가오슝에서 그렇게 입장이 뒤바뀌어 활보하고 있다.  발걸음의 진득함이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우리는 지금 그림자 없는 여행자의 신세이다.  

  미려도, 우리는 미려도 역에서 붉은색 라인에서 귤색 라인으로 갈아탔다.  미려도, 흐릿한 기억 안에서 어딘가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미려도, 어디서 봤던가..  좋은 세상이었다.  나는 커다란 캐리어를 기둥에 붙이고 한쪽 다리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키면서 바로 웹에서 검색했다.  1979년, 가오슝시 잡지인 메이리다오(미려도) 주최로 시위가 진행되었고, 이것이 국민당 독재를 종식시키고 대만 민주화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내용을 확인했다.  이 시위에서 체포자들의 변호인단 중에는 총통을 재임한 천수이볜이 있었다고 한다.  미려도라는 지명과 역명에는 상당한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역의 영문명은 formosa boulevard 였다. 


  가오슝 시내의 풍경은 타이베이 시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좀 더 낡고 좀 더 조용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설 명절 전날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역시 ‘같은 명절을 지내는 나라’에서는 명절 연휴를 여행하기엔 불편한 점이 있었다.  문 닫은 식당이 많아서, 뭔가 제대로 먹기 힘들다는 점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와서 둘러본 미려도 역 주변과 산둬상권 부근은 너무 한산해서, 이 분위기가 원래 이런 것인지 아니면 설 명절을 앞두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에, 검색해 본 식당은 거의 문을 닫았다.  별 수 없이, 우리는 가까운 백화점에 들어가 위층의 푸드코트에 가서 가오슝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대만 내 프랜차이즈 점에서 다진 새우튀김과, 새우 완탕 수프였다.  앞으로 제대로 먹어주지 않으면 억울함이 많이 생길 것 같았다.  

  중앙공원은 이제 해가 저물고 있었고, 우리는 공원보다는 그 옆의 골목 상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저 작은 명동, 또는 제주 칠성통보다 조금 큰, 그런 골목이었다.  분위기는 중국말 들리는 한국 같았고, 약간만 단장된다면 한국이라 해도 손색없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한류의 영향인지, 한국에서 수입하거나 직접 가져온 옷가지나 소품들을 파는 한국 상점이 곳곳에 어렵지 않게 보였고, 한글과 케이팝 음악도 어렵지 않게 보이고 들렸다.  그리 넓지 않은 상가구역을 골목골목마다 돌아다니며 구경하는데, 그다지 살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관심이나 호기심마저 생기지 않는 그 풍경은 어떤 기분이 들게 했는데, 국뽕 20% 정도에, 점점 이렇게 분위기가 가는 곳들마다 엇비슷해진다면 여행지로서의 매력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80% 정도였다.  

  여행 첫날의 어설픔, 도착 후 애매한 시간, 그리고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함에의 아쉬움은 결정적으로 루이허 야시장에서 만회할 수 있었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미 해는 저물어 어두웠고 만족할 만한 먹거리는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리 여행의 특성상 시간 단위로 일정을 짜거나 하지 않으니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숙소 가는 길에 있는 루이허 야시장을 가 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입구에서 내리니 차를 막은 대로에 사람이 별로 없이 한산한 야시장이었다.  어딜 가나 사람들 북적이는 부담을 생각해야 하는 대만이나 중국 여행에서 이런 풍경은 딱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정말 재미가 없거나, 운이 좋거나..  우리의 경우엔 후자였던 것 같다.  이후에 루이허 야시장을 세 번 방문했지만, 이런 한산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점 먹거리가 너무 좋고, 볼거리도 적당해서 루이허 야시장은 여행 이후에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한산함의 이유는 설 명절 전날이라 그랬던 것 같았다.  나는 여행을 가면 현지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덩치 좋은 생새우튀김도 있고, 현지 과일들도 많았다.  나는 우선 취두부를 찾았다.  취두부 찾기는 어렵지 않다.  냄새가 고약하니 말이다.  가오슝에서 만난 취두부는 타이베이에서 만난 취두부보다 냄새가 더 지독했다.  그렇지만, 냄새는 튀기는 과정에서 대부분 나는 것이고, 내 손에 쥐어졌을 때엔 냄새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맛은 더 바삭하고 고소했다.  그것을 매운 소스에 찍어먹는데, 나는 야시장을 구경하면서 내내 손에 들고 먹었다.  아들과 아내는 나에게서 비켜 다녔다.  

  석과를 먹었다.  대만 오면 먹어야 한다는 과일 중 하나였다.  오리 혀가 둥글게 켜켜이 쌓여 있었지만 차마 그것은 먹지 못했다.  첫날의 야시장은 간단하게 경험했다.  이틀 후면 동생네가 오고, 그때 제대로 경험하기로 했다.  걸어서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큰 규모의 오락실을 보았고, 혹시나 해서 들어갔는데 역시나 있었다. DDR. 프로그램은 많이 바뀌었지만 즐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아들 녀석과 함께 몇 판을 뛰었고, 몸은 땀으로 젖었다.  숙소 아래 편의점에서 대만에는 어떤 맥주가 있나 둘러보고 몇 캔을 사서 들어갔다.  커튼을 젖히면 별 볼일 없는 낡은 거리 뷰가 보여서 커튼을 치고 한국 라디오를 틀어놓은 다음 맥주를 마셨다.  한국과는 한 시간 차이로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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