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북적이는 침사추이 아이스퀘어 앞을 오가는 동안 그는 나에게 정확히 다섯 번 다가왔다. 그리고 넌지시 말했다.
“짝퉁 시계 있어요, 톡가타요.”
콧수염을 조금 기른 아랍인인 그는 다른 인종인 나를 매번 다른 사람으로 본 것인지, 아니면 나를 호구로 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짜증이 나서, 한 번만 더 오면 더 이상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는 가만히 있고 주변에 서성이던 머리가 살짝 벗어진 다른 아랍인이 내게 오는 것이었다.
“스. 미. 마. 셍, 어쩌고 블라블라..”
순간 나는 뭔가 싶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아임 코리안.”
그랬더니 그가 말했다.
“오! 아임 쏘리, 짝퉁 시계 있어요.”
느지막한 오전에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한국과 조호르바루에 선물로 가져갈 쿠키를 사러 아이스퀘어 주변을 돌아다니다 겪은 일이었다. 한국인의 짝퉁 사랑은 해외에까지 소문이 자자해서, 삐끼들의 타깃이 되는 순간 집요하게 권유당했다. 현지식 브런치 식당이라는 란퐁유엔은 아직 문 열기 전이었고 줄을 섰길래 우리도 뒤에 섰다. 그리고 살펴보니 조금 긴 줄은 전부 한국인 여행객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상황은 좋아하지도 않으며, 이런 상황에서 좋은 결과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줄에서 벗어나 현지식 분식이라 할 수 있는 체인점 식당인 카페 드 코랄에서 아침을 간단히 해결했다. 선물로 사 갈 쿠키는 제니 베이커리에 가서 구입했는데, 역시 한인들로만 가득했다. 그 옆의 쿠키 집은 한산했고, 직원이 나와 쿠키 조각을 나눠주며 자기 가게에 들르기를 유도했다. 홍콩에서 맛보는 쿠키는 특유의 텁텁함 때문에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니 베이커리 쿠키만 맛있을까 싶은 마음에, 한산한 옆집에 가서 그 집의 시그너쳐인 쿠키를 하나 구입했다. 비교해서 먹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나는 하루 종일 더위에 입맛을 잃고는, 쿠키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1881 헤리티지는 영국 식민지 시절 해양경찰 본부였던 건물을 보존하고 개조해서 사용하는 쇼핑몰이었다. 극단의 자본주의는 이 역사적 건물을 명품 쇼핑몰로 바꾸어 놓았다. 오랜 석조건물의 아담함이 둘러보기는 좋았지만, 외관의 고풍스러운 인상과 흙과 돌로 쌓은 내벽의 오랜 느낌 말고는 쉽게 발을 들일만한 공간은 없었다. 우리는 길 건너 하버시티를 구경한 후에 페리를 타고 센트럴로 넘어갔다. 어제는 2층 버스를 타고 지하터널로 들어가 홍콩섬에 들어갔는데, 오늘은 페리를 타고 이동했다. 이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날은 너무 더웠다. 선착장에서 내려 2층 고가 통로를 따라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로 가는 길은 편리했지만, 우리는 더위에 벌써부터 지쳤다. 일단은 소호에서 오늘 반나절을 다녀보기로 했으니 작정하고 걸음을 이었지만, 꼭 이렇게 다녀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한낮부터 지쳐 있었다. 일단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마지막까지 올라갔다. 몸이 정말 좋지 않았는지, 더워서 중간에 사 먹은 생과일 오렌지 주스에 속이 뒤집어졌다. 계획은 그랬다. 소호의 거리를 천천히 다니면서 벽화도 보고, 맛있어 보이는 집에서 식사도 하고, 맥주도 마셔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혹시 알퐁스 무하의 포스터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소호의 갤러리 몇 군데도 파악해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에스컬레이터의 꼭대기에 다다라서는, 그걸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의문부터 들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가장 가까운 갤러리를 찾아갔다.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간 갤러리는 간판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바로 옆에 스타벅스로 들어가 일단 더위를 피했다. 그냥 포기하자, 이렇게 여행하다간 죽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물 하나를 사서 나눠마시면서 벽화거리를 들러 IFC몰이나 가자고 했다. 그러나, 벽화거리는 찾을 수도 없었고 우리는 바로 걸어 IFC몰의 시원함 속으로 피신했다.
IFC는 어제 시위대에 점거당한 몰이었다. 각 층을 가득 메운 반중 시위대가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보았었다. 그러나, 우리가 간 때엔 여느 때처럼 쇼핑하는 사람들로 여유로웠고, 곳곳의 경비나 보안요원들만 긴장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4층의 쉑쉑버거에서 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랬고, 남은 시간을 뭘 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소호에 가서 맥주 한 잔 하기로 했다.
소호거리의 the globe라는 펍에 들어가니, 직원은 우리가 한국인인지 아는 것처럼 맥주 마실거면 맥파이가 좋다고 권했다. 와, 맥파이가 홍콩까지 진출했어? 하는 반가움이 들었지만 굳이 홍콩에서까지 마실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점원에게, ‘우리가 맥파이 제주공장 부근에 살면서 종종 찾아가 마신다. 우리가 좋아하는 맥주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내 영어가 미천해서 알아듣지 못한 건지, 점원은 무심한 표정으로 맥주 리스트를 놓고는 사라져 버렸다. Heretic IPA라는 미국 에일맥주를 주문해 마셨다. 만족스러웠다. 두 잔을 마시고 바깥에 나왔더니 바로 맞은편 벽에 벽화가 있었다. 그렇게 찾던 벽화거리가 맥주 마시고 나오니 눈 앞에 펼쳐져 있던 것이었다. 사진 좀 찍고, 바로 아래 타이청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에그타르트를 하나 맛보았다. 역시, 나는 페이스트리의 텁텁한 느낌이 별로인 데다가, 무더운 거리에서 뜨거운 에그타르트를 먹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홍콩은 겨울에 와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이었다.
다시 페리를 타고 침사추이로 건너오는 길에 IFC옆 통로에서 위안부 소녀상을 만났다. 한국 중국 그리고 동남아 시아 소녀상 셋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기억, 사죄, 반성의 일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숙소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베이징 덕이 맛있다는 침사추이의 킹스롯지까지 걸어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니 짝퉁 운운하는 호객도 사라졌다. 그리고, 줄 없이 들어간 식당에서 앉으라고 내어 준 자리는 아주 작은 2인 테이블이었다. 양 옆으로 맞닿은 좁은 테이블에서 한국인 커플들이 식사 중이었고, 다른 테이블의 대부분도 한국인들이었다. 마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식당을 점거한 듯한 분위기.. 그 사이에서 나는 베이징 덕이 무슨 맛인지도 잘 모른 채 열심히 씹어 넘기기만을 반복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같이 주문한 마파두부의 맛이 조금 괜찮았다는 기억 정도만 남아 있다.
어두워진 거리를 걸어 K11 쇼핑몰을 거쳐 스타의 거리에 가서 산책을 하고, 8시면 시작되는 홍콩섬 빌딩들의 레이저 쇼를 감상했다. 싱가포르의 트리 쇼에 비하면 매우 허술하지만, 섬을 채운 빌딩들의 불빛과 적당한 너비로 흐르는 밤바다의 물빛이 쇼의 허전함을 보상해주었다. 부르스 리의 전신상을 보고, 다시 K11 쇼핑몰의 메인로비의 아름다운 인테리어를 감상한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어제와 똑같이 스미노프 보드카와 잭콕을 들고 말이다. 홍콩은 여름에 오는 것이 아니며, 홍콩의 미식은 한국사람들이 수없이 쏟아내는 맛집 정보의 위에 존재함을 깨닫는 하루였다. 샤워를 하고 병과 캔을 따서 알코올을 들이키는데, 더위에 지쳐 더부룩해진 속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