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영웅 Sep 17. 2019

201909, 홍콩 여행기 : 1일 차

  공항에서 내려 에어포트 익스프레스를 타고 카오룽 역에 도착했다.  K2 무료 셔틀로 갈아타고 침사추이의 좁은 길가에 내리자 홍콩의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고 나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체크인 후 들어간 호텔 룸에서는 홍콩섬이 정면으로 펼쳐졌다.  다만, 외벽 공사 중이라 대나무 지지대가 철조망처럼 쳐져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내리자마자 보인 높은 건물 사이의 골목길처럼 보이는 일방통행 3차로와 그 위를 가득 채운 차들과 사람들, 그리고 호텔룸 안에서 바라본 홍콩섬의 처음이지만 익숙한 풍경..  ‘번화’라고 표현되는 세상의 여럿 관광지나 중심가는 공통된 어떤 특징이 있었다.  그것이 홍콩에 처음 발을 들이는 내게서 어색함을 많이 덜어 주었다.  


  오전 적당한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 룸에서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다 몸을 가볍게 하고 길을 나섰다.  왔으니 보고 먹어야 할 것이고, 보고 먹는 과정에서 홍콩의 이미지는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날은 무척 더워서 땀이 흐르는데, 큰 건물 입구를 지나면 시원한 바람이 바깥으로 불어 나왔다.  넓지는 않은 거리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채워 흐르고 있었다.  밀집과 다양함이 거리 풍경의 핵심이었다.  최신 디자인의 높은 건물과 오래되어 칠이 벗겨지고 낡은 건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길이 조금 후미진다 싶으면 마치 부슬비가 내리듯 머리 위에 달린 수백 개의 에어컨 실외기에서 물이 떨어졌다.  거기에 조금 센 바람이 지나면 실외기를 시커멓게 뒤덮은 먼지가 함께 흩날릴 것만 같았다.  영화의 한 이미지 같아 익숙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풍경 아래에서, 일하다 잠시 쉬는 이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큰 길가에 인접한 입구 쪽 그늘에서는 가판 한 둘 정도 자리하며 지루한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표정했다.  그리고 바빴다.  아이스퀘어 중식당에 들어서니 점원은 눈짓으로 몇이냐고 물었고, 둘이라고 손가락으로 답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저리 안쪽으로 들어가라 했다.  공부하듯 고른 메뉴를 표시해서 주니 점원은 낚아채듯 가져갔다.  음식을 가져다주는 직원은 탁자에 탁 하고 내려놓고는 휙 뒤돌아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홍콩에서는 친절을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려면 나쁠 만도 했는데, 호텔에서 식당을 찾아 들어오는 과정에서 본 풍경들이 식당에서의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납득하게 했다.  ‘번화’라고 표현되는 세상의 중심지의 공통점 중 하나는 ‘분주함과 무표정’이었다.  불친절이라고 하기엔 여행자 입장에서 조금 이기적인 그런 모습이었다.  


  부유했다.  사람들이 어째서 홍콩을 번화의 상징으로 자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나라 번화가에 옷가게나 편의점이 즐비하듯, 침사추이 중심가는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명품 매장들이 즐비했다.  거리는 이층 버스와 택시와 온갖 고급차들로 붐볐다.  버스와 택시는 넓지 않은 거리를 질주하듯 달렸다.  조금 화가 나 있는 듯 달렸다.  테슬라, 포르쉐같은 슈퍼카들이나 유럽 고급차종들이 너무 흔하게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보이는 모닝 같은, 우리나라에서 수입된 소형차들이 더 신기해 보였다.  사람들은 그 번잡함을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하고 무질서하게 뒤섞였다.  뒤섞임 안에서 아랍계 사람들은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짝퉁 명품 시계 있어요.’라며 다가와 흥정을 했다.  부유함과 조밀함과 번잡함 안에서 분명한 것은, 무표정한 현지인들과 조금은 들뜬 표정의 여행자들의 구분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극단의 부유와 좀처럼 가려지지 않는 빈곤함이 뒤섞이면서도 구분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홍콩의 첫인상은 극과 극의 뒤섞임이었다.

  홍콩에서 첫 식사를 하고 처음 정한 일정은 때마침 홍콩에서 전시되고 있는 지브리 명화전이었다.  침사추이에서 카오룽 베이의 전시관까지 이층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한국에서는 서울 전시라 갈 시간을 못 만들었지만, 홍콩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보고 싶었던 전시를 보는 것도 좋았는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에게 실시간으로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한국 전시보다 더 알차고 잘해 놓은 것 같다는 평을 보내왔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거의 다 본 입장에서도 실사 구현의 수준은 남달라 보였다.  아기자기하며, 디테일이 살아 넘치는 전시였다.  


  다시 이층 버스를 타고 익청빌딩에 갔다.  트랜스포머를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에 나온 곳이라 해서 유명해진 이 건물은 멀리서 보아도 ‘아, 저 건물이구나.’ 하는 웅장한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거대한 존재가 건물을 한 번 툭 치고 지나가면 모래성 흩날리듯 무너져버릴 것 같은 푸석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함부로 이야기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난의 풍경이었다.  한 때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서 사진 촬영을 금지했다고는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엔 사람도 거의 없는 데다, 몇 안 되는 여행객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삼면을 좁은 창과 널어놓은 빨래들 그리고 촌스런 색의 빛바래고 헤어진 벽체가 둘러싼 건물 안쪽 지점에서, 사람들은 작은 환풍구 지붕에 올라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나 역시 인물 없는 가난의 풍경을 찍었다.  그리고, 옆의 커피집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사진 찍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홍콩에서는 가난한 모습마저도 관광자원이 되는구나..’. 왠지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청빌딩만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주변은 번화와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거리를 조금 다니다 발견한 현지 시장에서는 과일과 채소들이 풍성하게 쌓여 있었고, 익숙한 냄새도 흘러왔다.  두리안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보다 정확히 두 배 비싼 가격인데 크기는 1.5배 정도였다.  맛이 궁금했지만, 다른 시장에도 있겠거니 하고 지나쳤다.  홍콩에서도 두리안을 볼 수 있구나..  그러나, 홍콩 여행 내내 두리안은 그곳에서 본 것이 전부였다.  


  다니는 내내 현재 진행 중인 시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센트럴과 빅토리아 피크에서 다음날 시위가 있을 거라는 소식이 있어 조금 긴장했다.  사실 소호나 센트럴은 다음날 일정에 두었지만, 익청빌딩까지 왔고, 시위 소식에 빅토리아 피크를 오늘 가는 게 낫겠다 결론지었다.  소호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잠깐 타고 홍콩배우 양조위의 단골집이라는 카우키 레스토랑에서 쌀국수를 한 그릇 먹었다.  시위의 여파인지, 반드시 줄을 서야 한다는 이 집에서 우리는 바로 들어가 자리 잡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피크로 올라가는 피크트램을 타는데도 그랬다.  줄이 없었다.  우리는 가자마자 바로 트램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이제 막 밤이 완연해지는 홍콩의 야경을 감상했다.  그리고, 밤이 완벽해지자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야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홍콩의 밤은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해 뜨는 낮이면 보이던 분주함과 다양함, 그리고 빈부의 극단들이, 밤이 되자 야경 아래로 사라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본의 첨단에서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모든 비판점들이, 자본의 첨단에 의해 뒤덮이고 사라지고 있었다.  차이라면 낮과 밤의 차이뿐이었다.  감탄만이 가득한 내 가슴에 대한 민망조차도 쉽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그 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 가만히 있었다.  아내는 조금 들떠 있었고, 나는 약간의 혼란한 머리를 안고 풍경에 도취되었다.  

  피크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센트럴로 내려왔다.  지하철을 타고 몽콕 야시장을 가서 둘러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홍콩의 야시장은 거대한 짝퉁과 싸구려 물품의 집산지였다.  먹을 것이라고는 없고, 거리를 가득 메운 높다란 점포들 뒤로 식당들은 숨어 있었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표정 하나 없고 목소리는 건조했다.  거대한 점포 사이 좁은 길을 오가는 관광객들이나 조금 말을 할 정도였다.  우리는 한국인 상대로 저렴하게 물건을 판다는 유명한 ‘아저씨네’를 찾아가 기념품 몇 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너무 더운 거리를 계속 걸어야 하니 우리는 쉽게 지쳤다.  지친 몸은 속도 불편하게 만들었고, 속이 불편하니 먹는 것도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아이스퀘어의 지하 슈퍼마켓에서 떨이로 마무리하는 초밥과 연어를 사고, 스미노프 보드카 맥주와 잭콕 캔을 사들고 숙소로 들어와 홍콩섬의 야경을 감상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루 여행자의 속없는 결론일지도 모르지만, 홍콩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자본주의의 극단 안에서 피로에 찌든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홍콩은 모든 것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어떤 마력이 있었고, 홍콩의 미식은 결국 좀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편안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하루의 일정 중에서 가장 맛있던 것은, 숙소에서 마신 스미노프 보드카 맥주와 잭콕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909 홍콩 여행기 : 시작과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