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영웅 Sep 15. 2019

201909 홍콩 여행기 : 시작과 끝

  생애 첫 홍콩이었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여행은 작은 불안과 적당한 만족으로 시작되고 끝맺었다.  홍콩 행정부 장관이 송환법 철회를 발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홍콩행을 결정했다.  이번 추석은 조용히 보내야겠다 생각 중에, 출발 일주일 전에 번갯불에 콩 튀기듯 결정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나머지 4개 요구안에 대한 시위를 계속한다 발표했고, 나의 여행은 불안을 안고 시작해야만 했다.


  아내는 조호르바루에 있었다.  싱가포르를 거쳐 홍콩으로 새벽 비행기를 타고 홍콩으로 향했고, 나는 이른 아침 비행기로 제주에서 홍콩으로 날아갔다.  지난봄, 둘만의 교토 여행에 이은 두 번째 둘만의 여행이었다.  아내는 네 시간을 공항 라운지에 머물렀고, 추석 연휴 첫날 오전에 우리는 홍콩 공항에서 조우했다.  설레는 순간이었다. 

  홍콩은, 다양하고 극도로 밀집되어 있는 도시였다.  대륙의 끝자락과 홍콩섬에 수많은 것들을 꾹꾹 눌러 담아, 조밀하고 정교하게 요동치며 영상을 만들어내는 픽셀들의 군무 같았다.  극도의 밀집 안에서, 사람들은 조금 숨막혀했다.  홍콩에 가면 친절은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조밀함 안에서 간극의 차이 역시 넓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함이 도시를 뒤덮었다.  그러나, 화려함 뒤켠으로 한 발짝만 들어서면, 녹아내릴 듯한 풍경의 빈곤함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나는 화려함과 빈곤함의 간극이 어색했고, 잘 이해되지도 않았다.  도시가 어떻게 이런 풍경을 동시에 안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밤이 되면, 간극은 나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밤은, 도시의 조밀함과 수려함으로 간극을 뒤덮어버렸다.  감탄이라기보다는 납득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이래서 홍콩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인가 싶었다.  이 역시, 자본의 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 상해 여행을 떠올렸다.  드높은 빌딩 사이로 내려다보이던 낡고 낮은 건물들과 판자촌이나 다름없던 집들이 생각났다.  그 풍경은 우울했다.  그러면서도, 번화한 뒷골목에서 윗옷을 벗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깡마른 체구의 동네 노인이 즐기던 어떤 여유가 생각났다.  홍콩의 화려함과 빈곤함의 격차 안에서도 우울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상하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Canton road를 따라 늘어선 명품 매장을 보다가 두 블록 옆의 청킹맨션 뒷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칠이 벗겨지고 검은 때가 뒤덮인 수백 개의 에어컨 실외기에서 물이 비처럼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아..  그건 우울함에 닿지 못하는 풍경이었다.  이상하게도 작은 탄식이 나오는 정도에서 감정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홍콩 사람들의 여유 없고 불친절한 모습 안에서도 충분히 추출해낼 수 있는 감정 이건만, 나는 의식의 언저리에서 그들의 삶의 문제라는 식으로 사고의 뒤켠으로 밀어 두고 있었다.    


  꽉 채운 2박 3일의 일정은 뭐랄까, 자본의 매력 안에서 부정의 기운을 거세당한 경험이었다.  내가 가진 시야와 판단으로 부정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들은 충분히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생각들을 분명하게 표현하거나 정리해내지 못했다.  아내는 돌아다니는 내내 약간 들떠 있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분명히 존재했다.  사람들이 홍콩을 찾는 이유가 있구나 하는 정도로 나는 납득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을 좀 더 비판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나에게는, 일종의 허무한 굴복이자 의문의 1패 같은 것이었다.  

  여행자로서의 홍콩은 정해진 동선 안에서 새롭지 않았다.  잠깐 들른 여행자가 홍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관광지로서의 홍콩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홍콩 안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는 만족을 느꼈다.  물가는 한국과 비슷했고, 여행자가 챙겨간 수많은 정보들은, 그저 돈을 좀 더 쓰면 기분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다는 정도로 수렴하고 결론지었다.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자는 그림자가 없는 존재라 했다.  여행자는 여행하는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는 여행지를 거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 어디가 좋고 어디가 맛있다는 정도의 피상적인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연필일 뿐이다.  다시 지워지고 다른 존재의 흔적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 역시, 생애 처음의 홍콩은 그런 흔적으로 이렇게 기록할 뿐이다.  홍콩뿐만 아니라, 내가 다녔던 다른 여행지 역시 그러하다.  그러니,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할 뿐이고, 내가 남긴 정보는 의미가 없다.  나는 홍콩에서 그림자가 없는 존재였다.  


  홍콩 여행의 시작이자 끝인 이 기록을 나는 홍콩 공항의 어느 라운지에서 써 내려가고 있다.  내 맞은편에는 이제 두 시간 후면 다시 조호르바루에 있는 아들 녀석에게 돌아갈 아내가 앉아 있다.  홍콩의 습한 더위에, 둘 모두 지치고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래서 제대로 먹지 못한 아내는 라운지 음식으로 그 아쉬움을 채우고 있고, 나는 마저 마시지 못한 알코올이 아쉬워 편의점에서 사두었던 하이네켄 맥주와 라운지에서 판매하는 칼스버그 생맥주를 마시며 기록을 이어나간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하면 동이 트는 시각이다.  집에서 혼자 집을 지킨 반려견 녀석이 여행 내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도착하면, 잠시 모자란 잠을 채우고 녀석과 조금 긴 산책을 할 생각이다.  하루 2만 보 이상 걸었던 여행이라 다리가 아프지만, 집에 가서도 다시 걸어야 할 이유는 무척 엄중하다.  아내와 나는 단 둘이, 3일간의 설레는 여행을 함께 했고 이제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다.  삶을 계획하고 그대로 이끌어가는 과정에서의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지만, 설렘이 있었다는 건 어쩌면 축복이기도 하다.  고백하자면, 3일간의 여행 내내 들떠 있던 아내의 모습에 나는 흐뭇하고 고마웠다.  그것이 나의 부정적인 고민을 무력화시킨 이유였을지 모른다.  다시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하며, 여행의 시작이자 끝인 이 기록을 마무리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201908, 조호르바루 여행기, Epilogu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