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장님의 갑작스러운 검도 승단심사 준비하라는 문자 덕분에, 아빠 혼자만의 시간은 날마다 도장을 나가 심사 연습에 할애해야 했다. 라이 역시 아무도 없는 집을 지켜야만 하는 시간이 늘어나 버렸다. 지금 너에게 쓰는 이 편지를 마무리하고 나면 잠깐 병원 회식에 들렀다가 바로 도장으로 가서 최종 마무리를 해야 한다. 바로 내일이 승단심사 날이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검도를 잘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꾸준하게 도장에 나가서 열심히 죽도를 휘둘렀을 뿐이다. 실력이 좋아지든 그대로이든, 꾸준하게 하다 보니 승단 심사를 보아야 할 시간이 다가왔고, 그래서 심사에 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빠가 검도를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너무 뒤늦게 시작한 운동이기도 한 데다 몸 자체가 뻣뻣하고 운동감각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아빠가 내세울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꾸준하게 출석하고 할 때는 열심히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아빠의 검도 실력을 떠나 아빠 스스로가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이다.
생각해보면, 아빠는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잘하는 게 없었다. 무언가를 시작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하는 것들 중에 남들 눈에 띌 정도의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없었다. 아빠는 그저, 꾸준하게 무언가를 했던 것 같다. 공부도 그러했다. 아빠는 고등학교 졸업까지 단 한 번도 반에서나 전교에서나 1등을 해 본 적이 없다. 고 2 땐가 딱 한 번 전교 1등 점수를 받긴 했는데, 정식으로 인정받는 시험이 아닌 모의고사 성적이었다. 성적은 언제나 2등급 언저리에서 머물렀던 것 같은데, 주변 친구들의 성적이 들쭉날쭉 이었는지 아빠의 고 3 최종 성적 등급은 1등급이 나왔다. 아빠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저 꾸준하게 한 공부가 이렇게 생각지 못한 결과를 내어주었으니 말이다. 대학에 와서도, 아빠는 공부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꾸준함을 유지해서, 한 해를 다시 다녀야 하는 유급은 당하지 않고 제 때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병원에 들어가 인턴수련을 할 때에도 특별하게 일을 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특유의 꾸준함으로 나름의 인정을 받아 인턴 성적 1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아빠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머리가 아주 좋거나 어떠한 분야에 남들보다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무언가 주어지면 끈기를 가지고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능력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우습게도 말이다, 그렇다는 걸 확신한 것이 이번에 PG 스케일 건담 두 키트를 완성시키면서였다. 만들어놓고 보니 아빠 주변의 반응들이 그랬다. 이것을 몇 달이라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만들어냈다는 점을 놀라워했다. 아빠는 그저 꾸준하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너는 엄마의 피도 물려받았지만, 아빠를 많이 닮았다면 너도 아빠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까지 너는 아빠와 비슷한 면모를 참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하는데 ‘난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잘한다’는 생각은 어떤 면에서는 오만이나 착각일 수 있다. 더욱이 나이가 아직 어릴 때 그런 생각이나 판단을 하는 건 정말 경계해야 할 일이다. 반면에 꾸준히 무언가를 해 나가는 능력은 장점이 될 수 있다. 꾸준하게 하면서, 시선이 가지를 치고 시야가 넓어진다면, 스스로가 재미있어하고 좀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알아 갈 수 있다. 그래서, 아빠는 너에게 공부보다는 다양한 취미나 활동을 권유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엄마가 학교면 담을 하면서 보내 준 너의 면담 결과와 활동 평가서를 보았다. 이제 겨우 몇 개월 다닌 너에게 그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빠는 그 내용들에서 앞으로의 네가 점점 발전하며 적응하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본 것 같아 흐뭇했다. 너는 그곳에서 잘하고 있었다. 이제 반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 시간이 너를 좀 더 크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많이 생겼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꾸준하게 즐기면서 남은 시간을 보내거라.
일주일 후면 네가 오는구나. 아빠는 승단심사가 마무리되면, 농어 낚시에 집중하려고 한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너와의 약속은 지키고 싶거든.. 미리 말해둔다만, 네가 오자마자 맞는 주말 토요일엔 도장 송년회가 있어서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오자마자 독감 예방접종부터 하자. 지금 한국은 독감주의보까지 뜬 상태라 접종이 많이 늦었다. 이번 주말엔 일요일 하루 라이 녀석과 좀 놀아주려고 한다. 좀 긴 산책을 할까 생각 중이다. 녀석이 많이 심심하고 답답하고 서운할 거야. 요즘 마당 곳곳에 구멍을 많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아빠가 집에 들어갈 때마다 날뛰는 모습을 보면 미안함이 솟구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