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22. 20190113

by 전영웅

긴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맨 모습이 의젓하더구나. 그 더운 나라에서 긴 바지가 좀 더울지는 모르겠으나, 학교란 옷으로도 학년과 규율을 강조하는 곳이니 조금은 참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린 그림들을 보았다. 아빠는 조금 놀랐다. 잘 그리더구나. 그러나, 아직은 창조적이거나 감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대로 따라 그린 모사작이었다. 작품으로서는 아직 가치를 줄 수 없지만, 모사의 능력으로는 아주 훌륭하더구나.


아빠도 그랬었다. 그림을 그렸었다. 너처럼, 작품이 아닌 모사를 했었지. 중학교 때엔 드래곤볼이라는 만화가 엄청 인기 있었다. 아빠가 가지고 다니는 노트만 한 연습장 한 장에 드래곤볼의 주인공인 손오공을 그렸었다. 그런데, 아빠가 보아도 만화책 그대로 똑같이 너무 잘 따라 그렸었다. 친구들도 그림을 보더니 너무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 주더구나. 그 그림은 장난기 심하고 성미 급한 반 친구 녀석의 손에 의해 찢겨나갔었다.


네가 태어날 즈음엔 아빠는 병원에서 외과 전공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틈새 같은 시간은 만들 수 있어서, 그 시간엔 그림을 그렸었다. 아빠의 군의관 시절을 엄마와 함께 보냈던 경남 남해섬에서 찍었던 디지털카메라 사진들을 인화지 사진으로 다시 현상했다. 그리고 그것을 똑같은 사이즈의 크로키 북과 연필을 함께 가지고 있다가, 시간이 나면 크로키 북에 사진 한 장 한 장 그대로 그렸다. 스케치하듯.. 가끔 외출할 시간이 되면 서울 시내 풍경도 그렸었다. 힘들었던 시간을 버티게 했던 작업이었다. 전공의를 마친 후에는 크로키 북의 스케치들을 장마다 아세테이지로 붙여서 흐려지지 않게 보관했다. 지금도 그 크로키 북이 집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


부산에 사는 아빠의 사촌동생, 그러니까 너에게는 부산 작은할아버지의 아들이니까 삼촌뻘이겠구나. 어쨌든, 미술을 전공한 부산 삼촌에게 그 그림들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림들을 보더니 한 마디 하더구나. ‘공부만 하고 정해진 대로만 살아온 모습이 그림에 그대로 보인다’고 말이다. 아빠는 웃었다. 그림에도 사람 성향이 보이는구나 깨달았다. 부산 삼촌은 그 자리에서 남은 한 장에 아빠가 그린 그림들 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보였다. 유려하게 선을 뻗으면서, 정말 크로키라는 것이 무언인가를 보여주듯, 순식간에 아빠의 그림을 재해석해 보였다. 아, 그냥 그림과 작품은 이래서 다른 거구나. 아빠는 그때 깨달았다. 그래서, 너의 그림을 작품이 아닌 모사라고 말했던 것이다.


너의 손은 훌륭하지만, 손에 감각을 가지려면 수없이 그려보아야 한다. 손에 담을 기술을 배워야 한다. 시간을 가지고 연습을 하는 것이 너의 그림실력을 높여주고 작품이 되게 한다. 아빠는 네가 즐겨하는 것이 나름 훌륭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쁘다. 자주 그림을 그려라. 다만, 하나에만 빠지지 말거라. 항상 말했듯이, 지금의 너는 다양한 경험과 배움이 중요한 때이다. 꾸준하되, 한 가지만으로 너의 시간을 채우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공부는 조금 늦어도 되고, 조금 늦어지며 생기는 여유엔, 시야를 넓게 가지고 다양한 것들을 보고 느껴야 한다. 그런 것들이 너의 공부에, 그림에, 음악과 생각 등에 폭넓게 배어들어야 한다.


그래서, 네가 기타를 배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그리고 책을 읽는 것, 노는 것 모두를 존중한다. 게임을 하고 유튜브를 보는 것도, 네가 시간을 줄여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아빠는 그것도 존중한다. 지금 네 학교의 과정과 숙제가 있겠지만, 그런 공부는 주어진 것만 충실히 하고 그 이외의 시간엔 공부 외의 것들을 즐겼으면 한다. 항상 너에게 편지로 말하지만, 아빠는 네가 풍성한 사람이 되길 원한다. 외골수로 단 한 가지만 잘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아빠가 사 준 책들은 다 가져간 걸로 안다. 원서와 번역서 둘 다 가져갔으니, 비교하면서 읽어라. 그리고, 네 사촌남매들과도 같이 읽어라. 날이 덥다니 여기서는 실감이 나지 않는구나. 서울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하시는 말씀마다 네 이야기를 빼놓지 않으신다. 라이는 얼마 전 목줄의 고정핀이 느슨해져 줄이 풀리는 바람에, 난데없이 자유를 만끽하며 동네를 누비다가 들어왔다. 온몸에 풀씨를 묻히고, 먼지를 뒤집어써 꾀죄죄해진 채 돌아왔다. 동네 돌아다니는 뼈다귀들과 물어뜯고 싶은 것들을 죄다 마당에 부려놓았지. 늦게 퇴근한 아빠가 목줄을 다시 고정하고 부려놓은 것들을 치우느라 고생 좀 했다. 그래도, 라이 녀석은 참 귀엽고 착하다. 너와 라이가 함께 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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