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24. 20190128

by 전영웅

순천 고모네가 제주에 놀러 왔다. 그래서 주말 동안 같이 밥을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너에게 보내는 편지가 조금 늦었고, 라이도 산책을 가지 못했다. 대신 아빠는 다시 제주를 여행하는 마음으로, 평소에 발이 잘 닿지 않는 곳들을 다닐 수 있었고, 다시 감상하고 싶었던 공연인 빛의 벙커 클림트 전을 관람했다. 시간을 가득 채운 느낌이다.


형과 누나, 그리고 고모는 너와 함께 하지 못한다고 조금 서운해했다. 아빠도, 너와 엄마가 없이 혼자 같이 다니려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형은 이제 군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더한 듯했다. 아쉽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마음공부라는 걸 너도 크고 작은 일들에서 배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를 통해서 너의 새롭게 시작한 학기의 공부가 조금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갑자기 담벼락처럼 높아진 난이도에 너 역시 당황스럽고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라는 걸 아빠는 어렴풋이 이해한다. 공부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그런 기분을 아빠는 몇 번 경험했었고, 그때마다의 기분이 지금의 너와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그런 당황스러운 기분을 처음 느꼈던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국어과목이었다. 책만 잘 읽고 이해하면 되는 것인 줄 알았던 국어에서 갑자기 문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두음법칙, 연음법칙 등등의 생소한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저게 대체 뭐지? 하는 생각만 가득해졌다. 당시 국어과목은 선생님이 안 계셔서 농업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국어를 지도해주셨는데, 문장에서 발견되는 법칙들을 단조로운 목소리로 흘러가듯 설명하고는 진도 나가기에 급급했다. 생소해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를 한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수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수많은 법칙들을 일일이 외우기만 하고 시험을 보니 점수가 잘 나올 리도 없었다. 그때부터 아빠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국어를 싫어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하나하나 차근하게 공부를 했으면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었는데, 아빠는 엄청나게 쏟아지는 생소한 것들에 질렸던 것 같다. 시간에 쫓겨 그걸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외우려고만 들었었다. 결국 학생 시절의 치명적 약점 하나를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벽을 쌓아버린 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아빠의 잘못이었다.


원어로 된 소설이나 시를 읽고 이해하고 주어진 문제를 푸는 일 앞에서 너는 엄청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작업은 앞으로 공부하는 데 있어 반드시 익숙해져야 할 기본 중 하나이다. 실제로 한국의 수능도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게 하고 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너의 가장 큰 이유인 영어라는 점에서, 네가 앞에 둔 부담은 반드시 익숙해져야 할 일이다. 엄마는 아빠까지 동원하여 너의 숙제를 도와주려 했지만, 숙제 기한은 충분해 보였고 힘들더라도 네가 꼭 경험해야 할 과정이기에 아빠는 너 스스로 해결하도록 두자 말했다. 숙제를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장거리 달리기를 끝까지 완주하는 마음으로 노력해보길 바란다. 아빠가 보기엔 당장 잘 해내기보다는 네가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도록 마무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원서를 읽어내는 일은 너에겐 필요한 일이다. 아빠가 이번에 사 준 책들을 한글 번역본과 원서 본으로 묶은 이유이다. 항상 말하지만 너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성적이 아니다.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마지막까지 완주한다는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벽을 만난 듯한 기분은 네가 공부를 하거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번 마주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벽을 만난 듯한 기분을 정말 벽으로 만들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 지치지 말길 바란다. 아빠는 훌륭한 결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노력을 바란다.


며칠 있으면 아빠가 너를 만나러 그곳으로 간다. 너를 만나면 아빠의 마음이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리고, 너를 홀로 두고 올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리다. 너를 만나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함께 다닐 순간만을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다. 엄마와 아빠가 함께 다닐 일정을 고민하고 있다. 그 시간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너와 아빠가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하는 고민이 조금 많아졌다. 가끔은 필요한 듯하면서도, 마음이 점점 아파지는 일이 많아 힘든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목적했던 과정만 잘 마치고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사실, 너와 엄마와 아빠 모두에게 필요한 건 행복인데, 우리 가족은 행복한가? 종종 생각한다. 아빠가 네가 정말 보고 싶긴 하나보다. 다짐하고 널 그곳으로 보낸 마음이 많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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