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은 책이 내 몸을 통과한 후의 감이다.
몸이 책을 통과하여 텍스트 이전의 내가 이후의 나로 변화하는 것, 그것이 독후의 감이라는 설명에 공감한다.
학교에서 제시한 교과서와 학습지, 그리고 대학에서 제시한 전공서적이 책의 전부였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면 핑계겠지만, 나의 시간 안에 공존했던 책은 그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뒤늦게 집어 든 책들은 나를 텍스트의 바닷속으로 풍덩 집어넣었고, 몸의 곳곳으로 텍스트가 흘러지날 때마다 나는 독후의 감으로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우연으로 시작된 순전한 나의 노력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나에게 책을 권하지 않았다. 이 또한 눈치 없는 나의 미련 때문이겠지만, 뒤늦게서야 책을 집어 들고 텍스트의 바다, 잡학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내 처지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책을 통과하지만, 선택의 기준이나 흐름의 일관은 없었다. 집히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서는 원래 잡학이라지만, 근본 없는 잡학은 위험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전의 책과 지금의 책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기도 했다. 다른 분야의 주제가 만나 서로 상충하며 마찰을 일으킬 때 나의 주관은 꼿꼿하게 서지 못하고 혼란만 일으키고 있었다. 정독이 아닌 틈이 날 때마다의 통독이다 보니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으며, 특히 문장 하나하나를 부여잡고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책들은 그저 읽었다는 데 만족하고 책장을 넘기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글 좀 써보겠다고 알량한 독후의 감을 내 문장으로 남기니, 문장은 허술하고 가벼우며 심지어는 책을 모욕하기까지 했다. 삶은 되돌아봄과 반성의 연속이라지만, 적어도 내 독후의 감을 이야기할 때엔, 텍스트로 남아버린 내 독후의 감을 돌아보는 작업은 어처구니없고 민망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근본이 없는 잡학이었어도 독서는 텍스트 이후의 변화한 나를 인지해가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무에서 시작한 출발은 어떻게든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원리이다. 다행히 나는 나의 독서를 옆에서 지지해 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나름의 합리와 사상을 가진 인간으로의 면모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지지를 받으며 조건이 허락하는 대로 하나하나 집어 든 책들은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나 생각에의 조우를 주선했다. 때로는 내가 가진 생각에 정신 차리라는 듯 찬물 한 바가지를 내 머리에 확 끼얹어버리기도 했다. 모든 게 새로웠고, 하나하나 쌓은 생각들이 텍스트를 거칠 때마다 달라지는 경험은 독후의 내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하는 점에서 경이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금은 다른 시선, 몇 가지의 근본적인 사고와 사상을 가지고 내가 집어 든 텍스트를 논하기.. 내가 추구하는 독서의 방법이었으나,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다시 독후의 변화된 나의 입장에서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용렬했는지.. 내가 겸비한 사고와 사상은 얼마나 얄팍하고 따라서 내가 목적한 다른 시선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독후의 감으로 남긴 텍스트는 그래서 아무런 감흥 없이, 내가 그저 읽었다는 흔적으로의 의미만 가지는 나풀거림이었음을 깨닫는다. 오랜 시간, 오랜 공부로 단단하게 쌓은 사상을 바탕으로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집어 든 텍스트를 소화해낸다는 것. 그것은 어떤 느낌과 모습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독서였다. 나는 다시 독후의 변화된 나를 깨닫고, 알량하겠지만, 독후의 감으로서 텍스트를 남긴다. ‘~처럼’이라는 형태의 제목을 많이 싫어한다. 그래서 쌓인 책들 중 뒤늦게 집어 들었다. 집어 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깨달음을 얻은 독후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