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직접 만난 건 아마 8년쯤 전이었을 것이다. 제주의 작은 도서관에서의 초청 강연이었다. 그는 밝고 명쾌했다. 세상을 바꾸고 이끌어나가는 데 무한이다 싶을 만큼의 자신감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의 이력에 대해 내가 자세히 아는 것은 없다. 여성인권 변호사로 출발해,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가게, 희망제작소 등의 큼직한 단어들로 이어져 온 대표성과 상징성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이다. 참여연대의 성장과, 그가 서울시장으로 활동하면서 느껴졌던 서울시의 이미지적 변화가, 아는 것이 없는 나의 조금 더 들어간 디테일이다. 그런 와중에,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 광장을 둘러보러 수행원들과 구석진 도로를 걸어가는 모습을 본 것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여성인권 변호사로 시작해서 성추행 혐의자로 삶을 종결시켰다는 점은 그의 심각한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이 아이러니와, 급작스러운 그의 죽음이 지금 한국사회를 대혼란 상황으로 빠뜨렸다. 혐의에서 멈추었고, 그의 죽음으로 공소권이 소멸되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의 성추행 혐의는 거의 사실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그리고, 그가 한 줌의 재로 흙에 묻히고 난 지금은, 추모할 수 없다. 미투 혁명이 세상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음에도, 그는 스스로를 부정하면서까지 혁명을 거스른 역인이 되었다. 세상의 구조 안에서 약자가 강자 앞에서 얼마나 취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인지를 가장 잘 알던 사람이, 그것을 이용해서 그가 세운 가치의 많은 부분을 스스로 훼손시켜 버렸다.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일단 분명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비난을 할지 말지는 그다음의 일이다.
그의 행위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사실 상대방을 폭력적이거나 위압적으로 상대하려는 일은 본성의 일부이다. 현재의 인간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또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게 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이성으로서 타인에게 피해가 가는지 스스로 판단하고 자제하는 능력과, 갈등이 발생했을 때에는 시스템이 정한 규정에 따라 판단하고 조절하는 구조가 있다. 일방적인 피해가 발생한 이유는 그런 이성의 미숙함과 규정의 허술함에서 기인했다. 그는 이런 이성적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구조의 허술함을 재정비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바라보는 그는 그런 사람보다는, 결국 본성에 지배당해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원초적 가해자로 남아버렸다. 아직 온전히 정립되지 않은 이성적 인식과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혼란스럽다. ‘여자가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해서..’, ‘4년이나 시달렸다는데 그동안 무얼 한 거지?’라는 식의 미숙하고 몰상식한 의문을 피해자에게 스스럼없이 던지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드러난다.
누군가는 전후세대의 빨갱이 트라우마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고쳐지지 않고 단지 세대가 소멸함으로써만 고쳐질 수 있다고 말했다. 뒤이어, 386세대의 어떤 인식들은 사회구조의 파악과 인간적 노력으로 수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낮은 성 인지도, 민주화의 결실로 자본화를 거쳐 권력화 된 그들의 우월주의 성향은 결국 그 세대가 소멸함으로서만 고쳐질 수 있는 것임을, 그가 증명해버렸다고 개탄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절망스러울 만큼의 단언 앞에서 무언가를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주변의 시간적 전후를 둘러보니 아무렇지 않은 무례함과 이따금씩 드러나는 천박함 저열함이 어렵지 않게 보였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어둠은 얼마나 더 깊은 것인지 두려워졌다.
그의 죽음 앞에서 세상은 환멸스러웠다. 그의 죽음을 뒤쫓으며 보여주었던 언론들의 폭력과 저열함, 죽음을 비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였던 무례한 자들, 혼란의 심연 안에서 체가 망가진 탈수기처럼 걸러지지 않은 채 쏟아지는 말과 말들.. 그 사이에서 웅크린 나는 입을 닫았고, 그렇게 흐르는 시간 안에서 일상을 채워나가야 했다. 내 주변에서도, 공황에 빠진 사람들은 저마다의 말들을 쏟아냈다. 움직이는 저마다의 입술은, 옳은지 그른지, 자신의 어디까지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지,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판단과 절제는 진흙탕 속으로 처박아버린 아수라장이었다.
그의 가치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가 세상의 긍정과 희망을 위해 만들었던 가치들이 온전히 부정당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그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과, 그가 세운 가치를 돌아보는 일은 분명 다르다. 그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일말의 후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후퇴를 막으려는 사람들과, 생각 없이 후퇴의 물결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내 주변뿐만 아니라, 내가 몸을 담은 사회는 이미 얼만큼의 진흙탕이 되어버렸다. 그는 죽어 그가 논란의 중심이 될 세상을 피했지만, 산 자는 그가 만들어 놓은 논란과 혼란 속에서 괴롭기만 하다. 그의 가치를 지키는 일과, 그가 부정한 것들을 비판하고 재정립해야 한다는 가볍지 않은 과제가 남겨졌다. 피로한 사람은 이렇게 적지 않은 새로운 피로를 더 얹고 살아가야 한다. 그것도, 진흙탕 안에서 휘둘리면서도 입을 다물고 묵묵한 채로 말이다. 그를 추모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다. 가장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는 단지 피해자에만 던져진 것이 아니다. 한탄만이, 그에게 가질 수 있는 나의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