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들

노동시간을 생각함. 20201124

by 전영웅

케인스주의 경제학으로 유명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대 공산주의에 경도되어가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강연에 나선다. 그는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설명하기 위해 ‘삶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제시하는데,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록 ‘우리의 자녀나 손자시대에는 하루 3-4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며, 미래시대의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남는 시간’이라고 역설했다.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수렵과 채집을 하던 인류의 평균 노동시간은 일주일에 10-20 시간이었다고 한다.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단순한 시대이긴 했지만, 인간의 삶에 필요한 노동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게다가, 영양상태도 훌륭했다고 한다. 수명이 길지는 않았지만, 삶의 질 측면에서는 휼륭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노동시간이 늘어난 것은 식물을 한 곳에 모아 기르고, 야생이던 동물들을 한 곳에 가두어 기르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는 식량공급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었고, 이에 따라 인구 수도 늘어났다. 인구가 늘자 계급이 생기고, 계급에 따라 노동을 담당하는 계급은 더 많은 시간을 노동에 할애해야 했다. 계급 불평등의 시작인 셈이다.


케인스의 말대로라면 세상의 부는 엄청나게 늘었고, 그의 말마따나 우리는 굳이 주당 52시간을 사수해가며 일하지 않아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분배의 문제를 악화시킨 이면에는, 우리에겐 그만한 부가 축적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우리는 노동시간을 가지고 싸울게 아니라 어쩌면 좀 더 근본에 있는 분배의 문제를 가지고 싸워야 할 지 모른다. 하루 3시간 노동까지는 아니더라도 노동시간을 좀 더 단축할 수 있는 분배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코로나19시대에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 시대에,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없으니 일을 쉬면 생활이 유지되지 않아 결국 택배/배달 노동같은 고위험 노동에 내몰리는 이 시대에, 분배의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고 필히 요구해야 하는 문제 아닐까 생각한다.


한주 동안 지난한 노동시간에 마음이 지쳐도, 늦은 시간이라야 병원에 올 수 있고 주말이라야 병원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노동시간이 줄던지, 아니면 아프면 근무시간이라도 잠시 병원에 올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미증유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으니, 인간의 경제적 삶은 점점 더 나락으로 내몰리고, 버틸 수 있는 사람과 버티지 못하는 사람의 격차가 점점 벌어짐을 느낀다. 수렵 채집에서 농경 목축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며 소유의 개념이 생기던 오래전 인간에게도 계급이 생기며 소수의 권력자와 다수의 피지배자로 나뉘었다. 자본이 갈라놓은 이 시대의 소수의 상위계급과 다수의 하위계급은, 바이러스의 창궐로 점점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단순비교가 무리이기는 하지만, 수렵 채집 시절의 인간의 삶에 비해 현재의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조금 품어볼 수 있겠다. 격차는 다수를 열악함으로 내몰고, 그들은 아픈 몸을 겨우 시간을 내어 병원으로 이끈다. 그 현상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나는 나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싶다. 그러자면,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노동시간도 줄어야 하고, 같은 노동시간 안에서 교류도 가능해야 한다. 아이러니는, 오랜 노동을 해야 하고 아픈 몸을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계급의 격차와 분배의 정의 문제에 있어 스스로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경험하지 못한 변화는 세상을 망하게 한다’는 어떤 신념을 가진 것 같이 행동한다. 소수의 상위계급을 분배의 정의를 통해 끌어내려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 생각한다. 사다리는 이미 걷어차여 있거나, 어느 한 쪽이 썩어서 잘못 디디면 바로 부러져버릴텐데 말이다. 여러모로 답답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양이를 애도함 : 2020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