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단어로 얼마나 글을 써내려갈 수 있을까..
충주 삼탄으로 들어가는 길 옆은 사과 과수원이었다. 이파리가 별로 없어 밑둥마저 앙상했던 기억으로 보아, 아마 가을 끝자락이었던 듯 하다. 아니, 사과를 거의 거두고 이파리가 시들했던가.. 내 기억은 풍경 하나를 두고 각각으로 그린 레이어를 겹친 듯 혼란스럽다.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수시로 핸들을 돌려야 하는 2차선 낡은 아스팔트길 옆의 과수원은 분명 사과였다. 쏘가리를 잡아보겠다고, 아내와 함께 수시로 차를 달렸던 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의 철길장면을 찍었다고도 했다. 그 철길을 잠시 옆으로 지나 다리를 건너면, 으슥한 산길이 나왔고, 그 길을 달리면 다시 다리가 나왔다. 어느 봄날엔가는 낚시를 하다 말고 그 다리 옆 비탈에 매달려 오디를 따 먹기도 했다. 삼탄에서 사과를 먹어 본 기억은 없다. 사과가 맛있다는 충주였지만, 사과를 먹으러 가지는 않았다. 충주 사과는 내가 서울이나 전주나 남해에 살았을 때, 마트에 가면 사 먹을 수 있었다. 기억은 분명 앙상하거나 을씨년스러웠다. 어째서 어느 계절의 과수원 사과나무들을 그런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삼탄에서 쏘가리를 잡아보지 못했을 뿐, 충주호로 흘러드는 그 물줄기와 옆의 푸른 산세를 타고 지나던 기차의 모습을 지금도 정겹게 기억하는데 말이다.
어머니는 항상 부사를 고집하셨다. 큼직하고, 약간은 퍼석한 듯 하지만, 사이사이 꿀이 박혀 과즙이 풍부하게 흐르는 부사를 제일 좋아하셨다. 슬럼가나 다름없는 도시 한 가운데의 가난한 집에도, 추석이 되면 종종 그런 고급사과가 선물로 들어오곤 했다. 어머니는 부사가 들어오면 신이 난 듯 과도를 한 손에 쥐고 그 자리에서 두어 개를 깎으셨다. 사과 둘레로 칼을 두르듯 해서 껍질을 길게 벗겨내고, 가운데 심을 중심으로 8조각을 낸 다음, 양 끝의 꼭지와 가운데 씨방을 쐐기모양으로 칼집내 거두었다. 적당한 크기의 접시에 가지런히 사과조각을 담아 우리와 할머니 앞에 밀어주시고는, 본인이 바로 한 조각을 집어 맛있게 드셨다. 그렇게 한 번 맛 본 사과는 곧 있을 명절때까지 냉장고에 고스란히 보관되었다. 추석이 오고, 할머니를 뵈러 큰/작은 아버지들이 집으로 오시면, 사과는 그제서야 며칠 전의 모습대로 손질되어 상에 올랐다. 어른들에 둘러싸인 사과를 나는 탐하지 않았다. 내 품에는 이미 작은아버지께서 선물로 주신 종합과자선물세트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포장을 뜯는 순간, 자신들이 먹고 싶은 것을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결연한 눈빛의 동생들이 옆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와서 사과 좀 먹어라’는 어른들의 무심한 권유에, 우리도 무심하게 ‘네!’ 대답하고는 종이박스 안의 과자 쟁탈전에 열중했다.
사과 껍질 벗기기 대결을 벌였었다. 누구와 그런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 동생이나 어머니였을 것이다. 아니면, 대학시절의 친구네 집에서였던가? 과도를 들고 누가 제일 가늘고 길고 얇게, 중간에 끊어지지 않게 사과껍질을 벗겨내는가. 부엌살림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어서였는지, 나도 과도는 잘 다루는 편이었다. 사과는 내 손 안에서 차곡차곡 돌고 있었고, 과도 역시 사과가 도는 속도에 맞추어 빨간 껍질을 길게 늘어뜨렸다. 분명치 않은 장소와 시절의 모호한 기억 안에서, 어떤 여자애가 말 그대로 가늘고 길고 얇게 껍질을 벗겨냈다. 과도를 잘 놀려도 투박함은 어찌할 수 없었던 나의 손 안의 사과는 그 아이보다 좀 더 굵고 두터운 껍질을 늘어뜨렸고, 그 마저도 중간에 툭 끊어져 버렸다. 겨루어 본다고 여러 사람의 손에서 때묻어가며 껍질을 난도질당한 사과 몇 알이 다시 조각이 되어 수다와 함께 사라졌다. 아마도 대학시절 어느 공간에서의 도란도란이었던 듯 하다.
영천의 3월은 추웠다. 추운날의 군복은 훈련의 서러움을 좀 더 느껴보라는 듯, 서늘했다. 마치 온기는 바로 배출하고 냉기를 품도록 옷감을 조작한 것 같았다. 당시 가요계의 정상을 구가하던 샾과 스페이스 에이의 노래가 번갈아 들리던 영내식당에서 식판에 담긴 깔깔한 아침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바로 야외훈련장으로 출발하는 이유는, 그만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봄이라는데 한겨울같은 공기에는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섞여 있었다. 그 햇살 때문이었는지, 행군하는 농로 양 옆으로 심어진 사과나무에는 사과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소총을 메고, 터덜터덜 걷다가 우연히 바라본 사과꽃에서는 사과향이 진했다. 잠시 마음이 풀어지며 나직하게 아~ 탄성이 흘러나왔다. 시선이 사과꽃에서 떨어지지 않자,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던 훈육장교가 ‘사과꽃에 마음을 빼앗기는구나~’라며 나를 재촉했다. 사과꽃을 처음 보고, 사과꽃 향기가 이렇게 향기롭구나 처음 느낀 날이었다. 춥고 괜히 서러운 군복무 시절에 감탄할 일은 수없이 많긴 했다.
깎아놓은 사과조각은 접시 위에서 갈변되고 있었다. 손이 잘 가지 않는 것을 보면, 맛이 덜한가도 싶었다. 초파리 한두 마리가 사과 위에 앉을 기회를 엿보며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사과접시가 놓은 공간의 공기는 무거웠다. 목소리도 묵직하게 흘렀다. 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사과접시를 앞에 두고 마주앉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보내고 있었다. 움직임은 연장자의 입술 뿐, 마주앉은 이는 시선을 내리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깎았는지는 모를 그 사과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이었다. 그러나, 시간과 공기에 반응했다. 예각과 둔각으로 깎인 모서리부터 갈색으로 변하고 말라갔다. 말은 일방적으로 흐르지만, 들리지 않는다. 사람의 움직임 역시 미세할 뿐인 공간이 박제가 아님을 알게 해 주는 것은 갈변된 사과가 유일했다. 사과는 공간의 무거움을 조각조각마다 애써 담아내고 있었다.
스콧 니어링은 말년에 매 끼니를 사과 하나로 해결했다. 물이나 간단한 음료가 가끔 더해질 뿐이었다. 그는 버몬트의 숲 속에서 헬렌과 함께 메이플 시럽을 만들어 팔아 생활비를 벌었고, 부족한 부분은 강연을 다니며 벌어들인 강연료로 충당했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인 그들은 먹을 것도 스스로 해결했는데, 가을이 되면 스콧은 나무상자에 톱밥을 채우고, 그 안에 직접 수확한 사과를 하나하나 묻었다. 그렇게 보관한 사과는 일년 동안의 식량이었다. 강연을 다닐 때면 그 사과를 챙겨다니며 식사를 해결했고, 인생의 끝무렵에는 하루에 사과 하나로 식사를 해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버몬트 숲의 직접 지은 돌집에서, ‘직접 팬 장작을 집안의 난로까지 직접 나르고 넣을 수 있는 힘이 남아있을 때까지’ 100세를 산 스콧은 자신의 생일날 스스로 식사를 멈춘다. 침대에 누워 사후 자신이 가게 될 세계의 존재들과 채널링을 시도하다 식사를 끊은 지 3주가 되던 날 숨을 거두었다. 현대의학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가 사과를 주식으로 하고 숲에서 자연적인 생활을 해서 병원신세를 질 일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과는 한 시대를 두텁게 살았던 위대한 실천가이자 사상가의 에너지이자 숨결이었다. 가장 흔해서 별 의미없이 먹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어 갈변되거나 버려지는 그런 과일이, 누군가의 손에 귀하게 다루어지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를 품게 된다. 채널링의 엉뚱함은 잠시 옆으로 제쳐두고, 그의 존엄한 죽음에는 사과향이 배어있었다.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유실수를 좋아하는 아내의 권유로 3년생 두 그루를 들였다. 마당은 나무들로 이미 포화상태라 처음 자리한 곳은 그늘진 남쪽이었다. 그래도 사과는 꽃을 피우고 잎을 내더니 사과 너댓개를 맺었다. 방제나 영양관리를 하지 않으니 사과는 껍질이 거뭇하고 알이 작았다. 맛은 나름 괜찮았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난 후, 녀석들의 자리를 옮겨주었다. 우선 그늘에서 벗어나, 바람은 좀 맞아도 볕이 잘 드는 자리로 옮겼다. 한 녀석은 옮기면서 가지치기를 너무 많이 했는지, 잎을 내고 자리잡는데 열중했다. 한 녀석은 자리를 옮기자마자 꽃을 피우고는 열 개 정도의 사과를 맺었다. 그냥 그대로 놔두었더니 제주의 거친 봄바람에 너댓개가 떨어지고, 태풍에 두세개가 떨어졌다. 두어 개는 내 실수로 떨어지고, 맨 아래쪽 줄기에 매달린 사과 한 알이 유일하게 남았다. 만만치 않은 태풍 두 개가 예보된 어느 날의 사과나무 모습이었다. 잘 버텨낼까 고민했지만, 일부러 무언가를 해 주지도 않았다. 스스로 거센 태풍을 이겨낸 사과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했다. 실제로 대롱대롱 낮게 매달린 사과는 두 번의 연이은 엄청난 태풍을 견뎌냈다. 아무것도 안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이 뿌듯함! 이 사과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의미에 어울릴 일이 있을까 고민해보니, 고3 수험생인 조카가 떠올랐다. 사과가 좀 더 익으면, 따서 잘 포장한 다음, 의미를 담은 편지와 함께 조카에게 보내기로 했다. 그런 기대에 들떠있던 주말 어느날, 마당을 정리하다가 뭔가 느낌이 안좋아 뒤를 돌아보니, 반려견 녀석이 사과를 따서 이빨로 갉아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아 건들지는 않겠구나 안심했는데, 이 녀석이 마지막에 대형 사고를 친 것이었다. 깊은 탄식을 하며 녀석의 주둥이를 잡고 뭐라뭐라 하며 혼을 냈다. 녀석은 자신이 왜 혼이 나고 있는지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주둥이를 잡히고 주인이 안좋은 표정으로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으니, 일단 잘못했다는 의미로 배를 뒤집을 뿐이었다. 사과의 의미는 녀석의 이빨에 상처를 입고 볕이 쏟아지는 일요일 오전의 마당에 나뒹굴었다. 상처로 드러난 사과 속살은 이미 갈변해 있었다.
사과에 별다른 감정은 없다. 굳이 사 먹지 않아도 명절이 되면 선물로 들어오기도 하고, 레시피를 보고 재료를 준비하다가 하나 사서 요리에 쓰고 남은 자투리를 먹기도 하는 그런 흔한 과일일 뿐이다. 맛있으면 좋겠지만, 맛을 따져가며 골라먹지도 않고, 그저 마당 사과나무에서 딴 것을 내가 기른 것이란 작은 의미를 두고 정성들여 끝까지 베어 문다. 평범한 만큼 평상시에는 별다른 의미도 생각도 없는 과일이 오늘의 일기의 주제가 되었다. 단지, 떠오르는 단어로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 얼만큼의 깊이까지 표현할 수 있는가 스스로 시험해 보았다. 한 자리에서 두 페이지 가까이 쓰니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지고 피로해져 글이 스산해졌다. 깊이도 재미도 별로다. 길게 쓸 주제가 아니라면 글의 길이도 조절해야 하고, 깊이를 만들 생각에도 정성과 집중을 들여야겠다 싶다. 글은 여전히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