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교회의 문제, 또는 죄가 있다면 그것은 무심함이다.
성장자본주의 시대에 편승하여 함께 성장한 교회는 물질의 축적은 축복이라 강변했다. 자본주의적 물질축적의 문제점을 돌아보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축복한 교회의 죄는 지금 그대로 드러나는 중이다. 거대교회, 땅장사 건물장사에 빠진 목회자, 물질축복이 전부이기에 성찰도 영성도 없이 범죄수준의 아무말 아무짓이나 하는 교인들의 모습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을 축복이라 여기고 그 안에서 안주와 기대를 누리는 교인들.. 우리는 이제, 이러한 모습들의 측은함 안타까움을 어렵지 않게 느끼고,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담아 바라본다. 이미 이들은 종교의 상식선의 범주 바깥이나 언저리로 밀려나 있다. 이들에 대해 비판이나 혐오의 말을 쏟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누구나 바라보아도 잘못되었다 판단되는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일은 그저 쉬운 일이다. 전광훈이나 김홍도, 오정현 류의 종교인들을 욕하는 일이, 현시대에는 어려운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보편 또는 주류 교회는 자본의 흐름, 세상의 우려스러운 변화 등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흐름에 편승하며 그 안에서의 축복거리를 찾는다. 그 축복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출세나 물질축적이다. 그것이 비난받는 종교인들의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비난받지 않는 이유는, 개인과 일상 안에서 소소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교회에서 찾는 평온과 안정은, 마찬가지로 개인과 일상의 수준 안에서 머문다. 사실 이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개인의 평온과 일상, 평정을 유지하게 해 주는 적절한 수준의 물질과 부는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보편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찾는 그런 것들은, 인간의 삶에서 좀 더 깊이 파고들어 생각해야 할 근본적인 것들에의 고민을 차단한다. 그리고, 각자가 편승한 세상의 흐름의 방향성이 과연 옳은지 아니면 무언가 이상한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이 그저 한둘의 현상이라면, 그들만의 무심한 삶의 자세려니 무시할 수 있겠지만, 커다란 집단이 되면 하나의 사회현상이 되어 문제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교회는 조용하고 은근한 위험으로서, 평온과 안정 그리고 소소한 기대를 기반으로 하는 무심함을 양산하는 공간이 되어간다.
무심함을 비유하자면, 선거때마다 느끼게 되는 사람들의 무관심, 또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기대와 비슷하다. 가치판단을 함부로 내릴 수는 없지만, 고민하지 않는 이들 특유의 ‘그냥 이것이 좋을 것 같다.’,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닌가.’ 같은 것들이다. 또는 ‘이것이 나에게 좋기 때문.’이라는 합리적 이기심에도 약간 닿아 있다. 개인의 생각과 판단이라면 납득할 수 있는 문제들은, 세상을 향하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매우 다른 문제가 된다. 세상을 뒤덮는 거대한 이기심과 무심함의 발원지가 되기 때문이다.
무심함은 좀 더 좋은 차, 내가 가진 땅값의 상승에의 당연한 기대 뒤에 숨은, 자본주의의 거품, 분배의 불평등이 만들어 낼 불합리한 계급격차를 고민하거나 뒤돌아 볼 기회나 능력을 차단한다. 좀 더 나은 수입과 좀 더 나은 돈벌이에 대한 인정할 만한 기대와 노력 뒤에 숨은, 기회의 평등함이나 공정함, 노동가치의 합리에 대한 고민을 차단한다. 필요 이상의 편리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에 당연한 권리를 부여하며, 그 뒤에 숨은 환경파괴의 문제, 물질배분의 불평등, 상대적으로 고통당하는 누군가에 대한 배려를 망각하게 만든다. 교회는 그렇게 인간의 당연함을 존중하며, 뒤에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제시하지 않는다. 교회는 그렇게 인간의 욕망에 편승하면서 신이나 영성이 아닌, 인간에 의한 종교로 타락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교회는 이제 신을 스스로의 형상대로 만들어 낸 인간의 결과물로 전락시켰다. 결과물인 신을 앞에 내세우고, 스스로의 욕망이 가장 가벼운 수준의 양심을 기준으로 불편하지 않도록, 사람들을 다독인다.
굳이 자본주의나 세상의 문제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교회사적 입장에서 교회는 위기적 상황에 놓여 있다. 연합이나 변혁없이, 아주 낡은 관점을 가지고도 교회가 가진 많은 기반을 이제껏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 자체의 생명력 때문이라기보다는, 교회를 대체할 수 있는 만족할 만한 대안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론과 영성에 있어 궁극적이고 최후적인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어느 종교학자는 주장한다.
자연에 대한 막연하지만 느껴지는 두려움, 생명의 순환과 인간의 존재 안에서 깨닫는 어떤 질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현상들에 모든 감정을 넘어서 받아들여야 하는 무기력함.. 나는 이런 것들을 영성이라 생각한다. 영성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는지, 방향성은 옳은 것인지에의 고민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쉽게 빠질 수 있는 무심함, 그 편안한 심리적 상태는 이 고민을 차단한다. 어떤 많은 형태로 느끼는 삶의 위태로움이 결국 사회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았던 심각한 저출산의 상황으로 빠져들듯, 무심함의 편리한 무감각은 인간의 삶을 공존과 지속가능성이 붕괴된 일회성의 상태로 빠뜨릴 것이다. 지금의 교회는 이 위기를 부추기는 중이다. 편안하게, 안심하며 무심함 안에서 안주하도록 사람들을 다독인다. 왜곡된 위로나 위안의 모습으로 타협한다. 영성은 이미 사라지고 어떻게든 회복시켜야 할 과제로 만들어버린 채 말이다. 남은 것은 인간이 깎아 만든, 단상 위의 십자가와 그 위에 매달린 깡마르고 헐벗은 어느 남자의 몸뚱아리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