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들

필요와 편리 : 20210402

by 전영웅

냉장고를 열어 볼 때마다 절망한다. 요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모든 욕구가 급격하게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득그득,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는 잡다한 내용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 안에서 내가 원하는 재료나 용기를 찾아 낼 수는 있을까 하는 공황이 생긴다. 빼곡한 용기들을 뒤져가며 뭔가를 찾다가 혹시 사고라도 치면, 주방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들을 치우다가 내가 하려고 했던 일들을 미련없이 단념해버릴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요리를 해야 하는 경우라면 내면의 혼란을 꾹 참고 과정을 이어나간다. 만일 나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냉장고를 열었다면, 그냥 요리를 단념하고 나가서 먹거나 간단히 라면을 끓였을 것이다.


주방살림은 아내의 몫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한 부부라도 각자의 취향은 제각각이어서, 나는 주방살림을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긴다. 아내의 주방살림은 한가득이다. ‘필요 이상’으로 한가득 빼곡한 공간에서 요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전적’으로 손을 놓는다. 각자의 취향은 존중되어야 하기에, 나는 아내의 취향을 존중한다. 그러나, 고민은 어쩔 수 없이 생긴다. 필요 이상으로 쌓아두는 것은 옳거나 괜찮은 일일까.


주방에는 많은 기구나 장비들이 있다. 냉장고를 비롯하여 오븐, 전자레인지, 에어프라이어, 인덕션, 김치냉장고, 식기세척기 등의 전자기기부터, 블렌더, 채칼, 후추 그라인더, 전동 와인오프너 등등.. 내 기준으로 이 기구들의 쓸모를 말하자면, 식기세척기는 쓸모를 느끼지 못해 사용하지 않는다. 에어프라이어 역시 간편하지만 결과물에 그닥 만족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는다. 인덕션은 왠지 불에 직접 데우는 것과 비교해 영혼없이 끓는 느낌이다. 집안에 김치냉장고까지 해서 냉장기기가 세 대나 있다는 점은 그닥 달갑지 않다. 내게 필요한 기구는 오븐, 전자레인지, 인덕션, 그리고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몇 가지 간단한 조리기구들 정도다. 나는 이 정도를 필요의 범주 안에 넣고 사용한다. 이 이상을 활용하는 일은 편리하다는 점은 인정하나, 필요하지 않기에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냉장고도 한 대 정도면 나에겐 적당하다고 판단한다. 필요와 편리의 기준에 있어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기준이다.


필요와 편리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러나, 각자가 경계를 설정하고 인식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요는 일상이나 삶을 영위할 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편리는 간편과 편의를 주지만 없으면 안 될 것들은 아니다. 편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 대가를 요구한다. 마치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컴퓨터로 자판을 두들기며 손글씨의 감성을 그리워하게 되듯 말이다. 냉장고에 그득한 내용물을 보면, 냉장고의 편리는 낭비와 과소비를 댓가삼는다. 강신주가 말했다. 냉장고를 사랑하는 일은 마트로 대변되는 대기업 자본의 성장을 돕는 일이라고. 자본주의의 활성이 각자의 이기와 욕심을 부추긴다면, 냉장고는 과소비와 낭비를 전제로 하는 각자의 탐욕의 상징이 된다. 보관능력의 발달이라는 편리가 개인의 탐욕과 소유의 불평등을 부추긴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냉장고의 편리는 탐욕과 불평등을 전제로 누리는 일이다.


필요 이상의 편리는 언제나 불편한 무언가를 전제로 누려진다. 코로나19 판데믹으로 침체된 경제상황에서 호황은 택배와 배달분야에서 관찰된다.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택배와 배달분야의 호황은 과도하고 위험한 노동을 기반함이다.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은 어쩔 수 없이 호황산업으로 몰리고, 그들은 그렇게 달갑지 않은 상황에서 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동네에는 밤낮으로 배달용 바이크가 골목 곳곳을 빠른 속도로 달린다. 막연한 위험에의 긴장은 배달 중인 노동자나, 골목을 걷는 행인이나, 차를 몰아 어딘가를 향하는 운전자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비대면 서비스가 필수인 판데믹 상황이지만, 우리는 편리하니까 핸드폰을 열어 가볍게 물건을 주문하고, 배달앱을 열어 터치 몇 번으로 치킨을 배달시킨다. 그 순간부터, 누군가는 우리의 주문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의 편리는 누군가의 위험과 고난을 기반으로 누려진다. 일련의 과정이 별 문제없이 마무리된다면, 우리는 그저 당연한 마음으로 별 생각없이 편리를 누리고 만다. 그러나 그 과정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는 ‘문제가 무엇이고 왜 생기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토론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문득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서 다시 편리하게 핸드폰을 열고 몇 번의 터치로 무언가를 주문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저 즉흥적으로 발생한 욕구를 우리는 무심하게 화면터치를 반복함으로 해결하려 한다. 화면을 터치하는 당신의 편리는, 그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은 누군가의 고난과 위험을 전제로 누려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시스템의 근본은 당신이 잠시라도, 또는 한 번이라도 뒤돌아 고민해 볼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이 경제활동의 유지 또는 발전, 시스템이 돌아가는 원리이자 이유라며 말이다.


조금 더 극단의 영역으로 필요의 문제를 몰아보면, 이반 일리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교통수단은 자전거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몸이 불편하거나 기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전기자전거를 제공하면 된다고 말한다. 환경과 사회활동의 영역면에서, 그리고 교류활동의 인간성 면에서도 자전거는 필요영역의 최상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자동차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현대인들에게 그리 익숙하지 못한 주장이다. 그러나, 논리와 합리적 면에서는 납득할 만 하다. 환경적 면에서 내연기관 자동차의 대안을 현대인들은 전기자동차를 말하지만, 전기자동차를 만드는 일 자체가 환경에 좋지 않다는 점을 들어 환경과학자들 조차도 전기자동차를 대안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공통되고 합의되는 경계로서 사회의 필요와 편리는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발생한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지속가능성, 그리고 인간성의 문제에서 바라보자면, 사회적 필요와 편리의 구분은 절실하다. 자본주의의 거침없는 성장이 세상의 편리와 맞물린다면, 편리는 비인간성, 계급격차와 불평등의 심화, 환경오염 등을 전제로 누려지기 때문이다. 필요영역이 보존되며 편리의 영역이 줄어든다면, 그래서 조금 불편함을 감내한다면, 세상은 좀 더 살만한 곳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옆으로 비껴 선 자리에서 하던 이야기를 이어보면, 교회는 이러한 편리를 신의 축복으로 설명하며, 개인의 무한한 편리를 감성적으로 정당화한다. 돌아봄의 노력과 고민을 무마시키며, 무심하게 세상에 주어진 편리를 누리도록 종용한다. 자본주의가 키운 편리의 중독은 교회에 의해 감각을 마비당한다. 그저 쾌락만 남은 신의 축복.. 역시 자본주의와 영성은 만날 수 없는 영역이다. 영성을 빙자한 소마soma를 남발하는 자본적 교회만 남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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