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창 밖을 보면 하얗게 벽을 칠한 지중해 풍의 교회 뒤로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이 보이고, 그 뒤로 범섬이 보였다. 지금은 교회 옆에 지어진 10여층 높이의 건물에 가려진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 반대로 비스듬하게 바라보면, 조금 가파른 언덕길을 채운 건물 뒤로 고근산이 보인다. 두 풍경의 사이, 그러니까 동쪽으로는 작은 시가지너머 아파트 단지들이 보인다. 저녁시간 즈음에 의원 문을 열고 계단통로로 나오면 서쪽으로 지는 해에 신시가지 아파트들이 그늘져 검게 보이고, 아파트 건물 틈새로 멀리 박수기정이 보이는 날이 있다. 내가 있는 동네의원에서 보이는 풍경들이다. 그리고 그 풍경들은, 대략적인 나의 진료영역으로 체감되는 공간이다.
큰 병원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던 동네가 작은 의원에서는 느껴진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일치감이 있다. 얼마 전 점심식사를 했던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가 환자로 오고, 잠시 들렀던 까페의 직원이 환자로 왔다. 찾아오는 환자들의 주소지는 대부분 동네였다. 그리고 꾸준하게 마주한다. 일정영역의 공간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진료실에서 마주하다보면, 동네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 밉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어떤 감정자본주의적 생각과 함께 동네를 채우는 삶의 단편들이 줄기처럼 엮여 잔잔하게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시선이 달라진 동네는 내가 바라볼 수 있는 풍경들의 경계와 대략 일치한다. 출퇴근 때마다 지나는 고층 아파트 사람들의 사는 모습들이 조금 보인다. 아, 저 식당 주인 부부는 얼마 전 기운이 없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좀 나아지셨나? 이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일하다가 손을 다친 아르바이트 학생은 요즘 왜 안 오는거지? 마치 동네가 움직이는 데 한 역할을 담당한 운영자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동네의원의 진료실은 지루하다. 진료실에서 다루는 질환의 영역은 넓은데, 증상들은 경미하다. 경미한 증상들의 특징은 흔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감기증상, 체한 증상, 관절이 아픈 증상 등등, 누구나 살면서 한 두번 이상은 경험해 보았을 그런 증상들을 하루에 수십 건씩 마주한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거의 비슷한 상황들 앞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스트레스다. 어쩌면 수술을 주로 했던 외과의사였기에, 상대적으로 경미한 증상들에 본능적으로 심드렁함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경계해야 할 자세다. 환자의 통증은 주관적이고 직접적인 괴로움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경미한 증상아래 숨어있을 지 모를 중대한 문제에 예민해야 하는 것이 1차의료를 담당하는 의사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지루함의 연속에서 시선과 마음의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어떻게든 견지해야 하는 자세이면서도 어렵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를 해소할 나름의 방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동네의원 진료실에 앉아 있는 일은 잔잔한 장편의 드라마에 비유할 수 있다. 종합병원에서 만나는, 심각한 질환을 진단받은 환자들 하나하나의 삶 자체가 긴장과 기복이 교차하는 중편의 묵직한 드라마다. 응급실의 풍경은 자체로 긴박하고 긴장이 폭발하는 단편의 임팩트있는 드라마다. 그래서, 의료와 관련된 글은 종합병원이나 응급실을 바탕으로 생산된 글들이 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종합병원 외과과장을 그만 둔다고 했을 때, 나의 글에 도움을 주던 친구는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었다. 글을 위해서라도 칼을 계속 잡는 건 어떻겠냐고.. 나 역시 많이 공감했다. 그러나 자의가 아니라 상황때문에 칼을 내려놓아야 하는 입장에서 친구의 걱정은 공감 정도에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친구의 걱정은 지금도 내 마음 속을 맴돈다. 의사로서 그리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 유지하고자 했던 정체성은 꽤 오랜 시간 방황했었다. 어느정도 자세를 가다듬고, 현재의 위치인 동네의원 진료실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 보자 시작했지만, 글을 이어나가는 일은 이전보다 꽤 어렵다. 잔잔한 장편의 드라마는 순간마다 밀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이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삶은 생각보다 지루하다. 사람들이 아파서 찾아오는 곳이 가까운 동네의원이고, 그 중에는 내가 자리한 진료실이 있다. 사람들이 아픈 이유는 대부분 ‘많이 써서’다. 그리고 일상에 늘 있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먹거리들을 ‘잘못 먹어서’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공간에 머무르다 보니 ‘환경이 나에게 맞지 않아서’도 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지루한 시간을 애써 보내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그래서 괴로워서 가까운 의원을 찾는다. 그리고, 진료실에서 나와 마주앉아 그 괴로움을 호소하다보면, 역으로 지루한 삶이 드러난다. 진료를 마치고 진료실 밖으로 나가는 환자의 뒷모습에는 왠지 모를 억울함이 묻어있다. 지루한 삶의 반복이 진료실에서도 드러나고, 그 드러남은 진료실에서 반복되는데, 그것이 절대 흥미진진하거나 재미있을 리 없다. 그래서, 지루한 사람들끼리의 만남장소는 동네의원 진료실이다. 만남의 흔적은 왠지 모를 억울함으로 남고, 억울함을 바라보는 의사는 서운함을 주지 않을 일말의 명료한 마음을 견지해야 한다. 결국 버티는 일이다.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버티며 살아오다가 마주쳤을 때, 이제껏 서로 잘 버텨왔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간 중 하나가 진료실이다. 그래서 동네의원은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몸담은 일상의 공간 어딘가에 동네의원이 있고, 일상의 가능하나를 도맡아 존재한다. 버티는 삶이라는 어떤 우울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공간에서 생산되는 글이 위로의 글이라면 모를까, 흥미진진한 글이기는 당연 어렵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의 글이 공감을 많이 받는 것인가 싶다.
진료실에 많은 시간을 앉아있는 나 역시 잔잔하고 지루한 삶을 이어간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 진료실로 들어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하던 치료를 잇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과정으로만 여기는 환자들이 있는가 하면, 앉아서 아픈 곳을 말하다가 순간 울음이 터져 잠시의 정적이 흐르기도 한다. 대부분은 간결하고 단순한 진료와 처방이 이어지는 공간에서 어떤 의미를 쌓아가고 있는 주체는 시간이다. 시간이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에 깊이를 만들었고, 시간이 환자를 마주하는 지루한 반복에 어떤 경험과 의미를 두텁게 만들었다. 그것이 의학지식 외에 환자를 진료하는 도구이자 수완이 되었다. 체감으로 느끼는, 내가 기능하는 영역 안에서 나는 점점 뿌리내림을 의식한다. 그것이 조금은 지루하고 어떻든 버텨야 하는 일이긴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내가 해야 하고 그러함을 유지해야 한다. 창 밖의 풍경 속에 내가 진료하는 환자들의 삶이 보인다면, 동네 누군가의 풍경 안에는 내 진료실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즐겁든 즐겁지 않던 간에, 재밌거나 재밌지 않던 간에 말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결속의 풍경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