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들

[동네의원 진료실] 지루함이란 남다른 위기

by 전영웅

진료실에 종일 앉아 있는 일은 지루하다.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움직여도, 진료실 내부와 옆의 처치실에 잠깐 오가는 일이 전부다. 종종 위층의 내시경실에 올라가 내시경을 하기도 하지만, 진료는 진료실에 갇히는 일이다. 그래서, 3명의 의사가 같이 일하는 의원이지만, 3명이 얼굴을 보는 일은 정말 오래간만에 발생한다. 물어볼 일이 있어 진료실로 찾아가거나, 가끔씩 회의차 모이는 일로 말이다.


외과의사로서의 진료와 동네의원 원장으로의 진료는 다르다. 둘 다 병원이라는 구조물 안에 매몰되는 느낌은 비슷하지만, 지금은 진료실에 좀 더 틀어박히는 기분이다. 진료실과 수술실 그리고 추가로 병동을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진료실과 바로 옆 처치실만 가끔씩 오갈 뿐이다. 공간 속의 공간에 틀어박혀서 화장실에 가는 일 마저 부담스러워지는, 자초한 고립상태가 되어버린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고립된 공간은 사고의 영역마저 고립시킨다. 진료실은 사람을 만나 삶의 흐름을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한정된 무엇밖에 볼 수 없어 생각이 자라지 않는다. 마치, 좁은 화분에 뿌리가 자라지 못하고 모양대로 엉켜버리는 것과 같다.


지루함은 반복에서 기인한다. 엇비슷한 증상이 생긴 환자들에게 거의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버튼을 누르면, 방금 했던 이야기가 입에서 그대로 나올 것 같다. 반복은 익숙함을 낳고, 익숙함 속에서 명료함을 스르르 놓쳐간다. 이미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온 환자들이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전에 들른 병원에서는 별 말없이 괜찮다고만 했어요.”


익숙함 안에서 상대에 대한 명료함을 놓치면 모든 환자는 똑같은 객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가 반복했던 말은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환자에게도 했던 말이 되고, 환자는 의사에게 별 말을 듣지 못한다. 나는 그런 의사들의 심리를 매우 이해한다.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고, 지루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환자에 대한 명료함을 유지하는 일이란 이렇게 어렵다. 반복은 사람을 매너리즘에 빠뜨린다. 의식하지 않는다면 비난은 쉽게 나를 때린다. 세상은 어렵고 힘든 일을 견뎌내는 이에게 보내는 칭찬보다, 그렇지 못한 이에게 보내는 비난을 더 쉽게 여긴다. 은근하게 깔려있는 의사들에 대한 이미지의 일부분은 이런 원리와 현상에 기반한다.


외과의사 시절,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많은 시간을 수술실에서 보내야 했지만, 진료실에서는 어느 정도의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 짬짬히 책도 읽고 짧은 글도 쓰고 그랬었다. 고민은 항상, 내가 수술한 환자의 경과와 내 술기를 돌아보는 일이었다. 지금은 책이나 글을 접하는 일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진료한 환자의 경과에 대한 고민은 가끔 있어도, 간단한 처방과 처치만 이루어지는 요즘엔 진료와 진료 사이의 한숨만 늘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일은 더욱 늘어서, 목과 허리의 불편감 역시 늘었다. 움직임은 줄어드니 살과 두통이 늘었다. 따로 몸관리를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심폐기능에 문제가 생길 것만 같다. 노동과 운동은 결이 다르고,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둘 다 챙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동과 운동이 너무 분리되어 있는 삶인데다, 노동시간이 짧지 않은 일상에서 운동을 따로 챙겨야 하는 일은 왠지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 커진다. 일상의 시간에 운동을 포함시킨다 말하지 않고 운동을 ‘때려박아 넣었다’고 말한다. 운동이 필요한, 내 또래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환자들에게 운동하는 내 일상을 그렇게 말한다. 환자들은 다짐과 상관없이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말하는 내 입장에서도 이 말은 그저 웃플 뿐이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무한에 가깝다. 모든 것에의 접근을 쉽게 만들고, 분야나 역할의 경계를 쉽게 허물고 누구든 반갑게 맞이한다. 한정된 공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위만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인터넷이다. 모니터와 새끼손가락보다도 훨씬 가느다란 선으로 외부와 연결된 장치, 또는 보이지 않는 전파로 연결된 손바닥만한 모니터를 통해 새로운 공간에 진입한다. 한정된 공간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이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즐기며 활용한다. 나 역시 그렇게 즐기고 있다. 그러나, 한정된 공간에서 생각이 자라지 못한 채 엉켜버린 누군가들은, 새롭고 무한하지만 무책임하게 자유롭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난무하는 인터넷 공간에서 존재가 뒤틀려버린다. 익명의 공간에서 보여주는 배설의 모습은 참담하고, 사실이 아닌 음모론과 추측설에 빠져 그것을 파헤치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다. 반일감정이 절정에 달하여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한창일 당시, 어느 공항 주차장을 돌아다니며 일본차만 긁고 다니다 붙잡힌 사람은 직업이 의사였다. 그의 기이에 가까운 행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측은한 심리가 왠지 이해되려고 하는 나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물론 모든 의사가 이렇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일상창작물과 에피소드 안에서 너무 흔하게 묘사되는 의사들의 꼰대성, 희박한 일상적 감각과 공감능력은 의사집단의 보편심리나 생각이 안에서 얼마나 뒤엉키고 뒤틀려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간접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얼마 전에 절실하게 보았다. 코로나19 판데믹에 따른 정부정책에 대한 의사들의 집단행동 말이다. 정부가 발표한 의료정책은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로 논리가 없었는데, 그에 반발하는 의사집단 역시 전혀 공감을 주지 못했고 논리역시 경악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산다는 것은 지루하고 답답한 일이다. 반복은 우울과 매너리즘을 낳는다. 그것이 생각마저 굳어버리게 만드는데, 비단 의사들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몇몇 환자들은 사고의 여유가 굳어져 자기생각과 주장만 고집한다. 철저할 정도로 내몰린 한정공간 안에서 여유를 잃어버린 직업적 삶의 경험은 어떤 위기를 느끼게 한다. 심리적으로 뒤틀릴 것 같은 두려움, 생각이 꼬여 방향성을 상실하고 공감을 잃어버릴 것 같은 긴장이 쌓인다. 제정신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굴뚝인데,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 잣대는 없으니 피로는 더해만 간다. 다행이랄까, 어느 직업이나 또는 어느 노동하는 사람들이나 처지는 나와 비슷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까지도 스스럼없이 하는 이들이 보인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밥벌이는 지겨운데, 지겨움에 내가 매몰되고 뒤틀리지 않을까.. 동네의원 진료실에 앉아있는 일은 남다른 위기임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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