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 커피나무를 들였었다. 지인의 집에서 싹을 틔워 3년 정도 자란 두 녀석이었는데, 산북인 제주의 가정집 베란다에서 그리 잘 자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비실거리는 것은 아니었는데, 버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지인은 직접 키우려면 가져가도 좋다고 했다. 나는 녀석들을 화분째 데리고 왔다. 그리고 진료실 창가 적절한 자리에 배치했다.
병원 건물은 서귀포 신시가지 언덕에서 동남향으로 창을 내고 있는 건물이다. 그것도 통유리 구조다. 섬에서도 산남인데다 거의 남향인 통유리 구조의 의미는, 그대로 온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에어컨을 열심히 돌려도 쉽게 시원해지지 않고, 한겨울에는 유리벽에서 냉기가 흘러내린다. 여름에는 온실효과가 있고, 겨울에는 추워도 실내온도가 15도 이상 유지되었다. 내가 커피나무를 진료실에 놓기로 생각한 이유였다. 말그대로 온실에 이사 온 녀석들은 점점 생기가 돌고 목질이 두터워지는 듯 싶더니 여기저기서 새순을 내었다.
식물을 키우는 것을 좋아한다. 진료실에서는 커피나무와 몇가지 허브를 키워보았고, 내가 사는 집 안에는 레몬나무가 거실 한 켠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당의 3분의 일 정도를 텃밭으로 만들어 매 해 농사를 짓는다. 아내는 유실수를 좋아하고 나는 허브류를 좋아해서, 마당을 허브가 둘러싸고 그 중간중간에 레몬나무 블루베리 사과나무 올리브나무 등등이 심어져 있다. 키운다고 해서 식물의 생태에 대해 공부하거나 잘 키우는 방법 등을 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일 년에 한 두번 비료를 주면서 물 열심히 주고, 가지를 쳐 주고, 좁아진 화분을 바꿔주는 정도다. 그래서, 나는 식물을 키우는 일을 좋아하지만, 내 손에 돌보아지는 식물들은 어쩌면 조금 불쌍한 녀석들인지 모른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위안이었다. 구조 안의 문제와 피로감 그리고 불안을 안고 일하던 전공의 시절, 스트레스가 정점을 찍는 날들의 연속에 아내는 텃밭을 권유했다. 오프를 받은 주말 어느날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달려간 곳은 경기도 광주의 귀여리였다. 주말농장의 땅 몇 평을 배분받고 별 생각이 없는 채로 그 자리에서 나누어주는 모종을 심었다. 심어 둔 것에 대한 작은 책임 때문이었는지, 계곡물과 초록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후로 오프만 받으면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인 텃밭으로 달려갔고, 잘 모르는 채로 호미질을 하고 뭔가를 거두어오면 답답했던 속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기분을 느꼈다. 텃밭은 점점 위안이 되었고, 나는 해마다 집 근처 어딘가에서 분양하는 주말텃밭을 알아보고 가꾸었다. 위안에 이어 매년 반복되는 일상이 된 텃밭은 제주에 와서도 이어졌고, 지금은 마당 한쪽을 텃밭으로 만들어 매번 가꾸고 있다.
텃밭과 마당의 나무들을 가꾸는 일은 여전한 위안이다. 특성상 일에 매몰되어 자기중심적이 되거나 고립되기 쉬운 의사라는 직업에 생각의 환기를 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땅을 돌보는 일의 소중한 경험이나 위대함 같이 거창한 의미는 아니다. 진료실의 풍경도 해마다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하지만, 땅을 갈고 텃밭을 돌보는 일도 해마다 비슷한 반복을 보인다. 같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느끼는 다른 반복은, 하나의 반복이 주는 스트레스를 서로 상쇄시킨다. 생각은 다양해지고, 하나의 일에 매몰되기 쉬운 생각이 스스로 쌓아버리는 벽에 소통과 환기의 통로를 낸다. 몸을 움직이며 생기는 피로감은 그리 기분나쁘지 않다. 오히려 감정과 고민으로 쌓인 정신의 피로를 몸으로 덜어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루함에 매몰되어 뒤틀릴 지 모를 내 자신을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초록의 식물들 사이에서 다잡는다.
커피나무는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낮에는 햇볕과 온도가 녀석들의 고향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가니 신이 난 듯 연초록의 순을 무섭게 올렸고, 가끔씩이지만 작은 창문을 열어 쏘여주는 바람에 신이 났다. 데려 올 때에는 화분까지 해서 내 다리길이를 못 채웠는데, 일 년이 지나서는 내 키 가까이 자랐다. 커피나무를 두기에 진료실은 좁았다. 제대로 자라게 하려면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려 볼륨을 주어야 했는데, 공간이 그러지 못해 녀석들은 위로만 뻗어올랐고 나는 그 모습을 그대로 두었다. 2미터를 넘는 천장에 새순이 닿을 무렵에는 때인지 모를 커피꽃이 하얗게 피었다. 그게 아마 초가을 쯤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커피열매가 생기더니 한겨울 즈음에는 열매가 빨갛게 익었다. 그렇게 한 해를 반갑고 신기한 모습으로 마무리한 다음해에는, 더 이상 뻗을 높이가 없어 새순은 천정에 닿아 옆으로 꺾이고 있었다. 별 수 없어 가장 높은 줄기를 가지쳐주었더니, 목질 옆에서 순을 내어 다시 위로 뻗었다. 그리고, 전 해보다도 훨씬 많은 꽃을 피워 특유의 향을 진료실 안에 가득 채웠다. 대부분의 꽃들은 그대로 열매를 맺었고, 오랜 시간을 두고 빨갛게 익어갔다. 빨갛게 익은 커피체리들을 수확해 보니 30센치 너비의 쟁반을 가득 채우는 양이었다.
두 그루의 커피나무는 하나는 내 의자 뒤쪽에, 하나는 창가 보호자가 앉는 의자 옆에 있었다. 동남향의 통유리벽 한 면을 양 옆으로 호위하듯 서 있었다. 진료실에 들어오는 환자와 보호자들은 커피나무의 성장속도와 피는 꽃들과 뒤이어 맺는 커피체리에 신기해 했다. 어떤 환자들은 나더러 식물키우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만, 커피나무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그저 조건이 잘 맞았을 뿐임을 알고 있었다. 그 전에 작은 화분에 바질과 라벤더를 심어 가져왔지만, 바람없이 물과 햇볕만 받아야 하는 허브들은 이내 시들어 말라버렸다. 물, 바람, 햇볕이라는, 식물이 자라는 데 꼭 필요한 3대 요소는, 아무리 볕 좋고 온도높은 산남이라도 식물을 키우는 용도와는 거리가 있는 실내에서는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다.
천정에 닿아 더 이상 자랄 곳 없는 커피나무들에 미안해졌다. 3년생을 데려와서 3년을 키웠다. 폭풍성장이라는 말이 적확할 정도로 자라버린 커피나무는, 내가 더 돌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공간과 환경조건이 더 좋은 곳으로 보내야겠다 다짐하고, 보낼 곳을 수소문했다. 산남의 어느 까페 주인이 녀석들을 데려가기로 결정이 되었고, 어느날 오후, 녀석들은 커다란 승합차에 실려 새로운 곳으로 출발했다. 넓지 않은 진료실이 갑자기 휑해졌다. 녀석들의 존재감이 이 정도였나 싶을 만큼 진료실은 텅 비어버렸고, 소리를 낼 리 만무한 녀석들이었는데도 비어버린 공간에는 적막이 함께 흘렀다. 아쉬웠지만, 잘 한 결정이었다 스스로 위로했다. 그리고, 빈 공간에 어떤 녀석을 데려와 키울 것인가 고민했다.
지금은 진료실 의자 뒤로 레몬 나무와 브룬펠시아 자스민이 자리하고 있다. 커피나무를 보내고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유칼립투스 블랙잭과 폴리안 종을 들였었다. 잘 자라겠지 기대를 했지만, 역시 바람이 없어서인지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시들어버렸다. 조금 더 버티는 듯 했던 폴리안은 집으로 다시 가져와 마당에 심었다. 귤이 잘 자라는 동네니까 혹시 하는 마음으로 황금향 묘목과 오렌지 묘목 그리고 레몬나무를 들였다. 그러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부족해서인지 비실거렸고, 게다가 병이 있었는지 모양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별 수 없이 집으로 데려와 돌보았다. 남은 것은 레몬나무였다. 그리고, 지인의 허브농장에서 얻어온 브룬펠시아 자스민이 있었다. 자스민은 일 년에 두 번 정도 꽃을 피우며 특유의 향을 발산했다. 레몬나무는 반 년을 버티는 듯 하더니, 이제 줄기 곳곳에서 새 순을 내기 시작했다. 레몬나무가 자라기에 아주 좋은 환경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보면, 3년을 함께한 커피나무가 가장 무난히 잘 자라주었다. 내가 잘 키운 것이 아니라 조건이 맞아 잘 자라주었음을, 다른 나무들이 증명해주었다. 환자들은 지금도 진초록으로 무성히 자라던 커피나무는 어디로 간 것이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 역시 녀석들이 새로 옮긴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진료실 안의 나무들은 나를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커피나무는 스스로 잘 자라며 나에게 그렇게 해 주었다. 어찌보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하게 받으려고만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지금 함께 있는 레몬과 자스민에도 그러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주기만을 바란다. 적절하게 물을 주고, 덥거나 추워도 작은 창문하나 가끔씩 열어주는 정성을 조금 알아주길.. 역시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나는 진료실의 나무들과 집마당의 텃밭에서 나를 다잡고 직업적 삶의 시간을 잇는다. 생육 방법에의 무지한 머리와 이기의 마음을 가진채, 내 감사의 마음이 조금 알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