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장들

[동네의원 진료실] 생선가시의 사회학

by 전영웅

녀석들의 몸에 가시가 돋아 있음은 그저, 본능이 요구한 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먹어치우려는 다른 생명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억겁의 시간동안 유전자가 몸부림쳐 만들어낸 생체의 무기이자 방패다. 녀석들의 가시는 그렇게 몸에 최적화되어 곳곳에 자리를 잡고 돋아났다. 심지어 어떤 녀석들의 가시는 배열과 모양에 미적 또는 자연과학적 감각까지 배어 있다. 여전히 먹고 먹히는 생태 피라미드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진화의 계책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몸의 가시를 바짝 세우고 경계하는 녀석 앞에서, 천적은 몇 번의 망설임을 보이다 포기하고 도망을 가기도 하니 말이다. 설령 먹히더라도 나를 잡아먹은 녀석에게 일말의 상처를 안기기도 한다. 끈질긴 또는 뒤끝있는 저항이자 복수다. 가시를 바짝 세우고 긴장한 채로 파도 사이에서 바늘이나 그물에 걸려 올라오는 녀석들과, 어판장 나무상자 위에서 단말마의 퍼덕임 끝에 축 늘어진 녀석들의 끈질긴 저항 또는 복수는,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남자 둘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눈에 띄는 건 마치 벌떼에 집중공략을 당한 것 같이 여기저기 벌겋게 부어오른 양 손이었다. 다른 곳은 멀쩡하고 양 손만 그랬다. 무슨 일인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조기잡이 배에서 방금 내렸다고 했다. 그물에 걸린 조기를 뜯어내는 작업을 했는데, 장갑을 두 개를 겹쳐 껴도 가시가 손을 찔렀단다. 당시 나는 한림의 작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때는 조기가 아직 서해로 올라가기 전 조업을 하는 배들이 한림으로 모이던 때였다. 젊은 친구들은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조기잡이 어선에서 일당 인력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오른 듯 했다. 일당이 꽤 높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손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내뱉듯 말했다. ‘다시는 배에 안 탈거야.’


가시에 찔린 부위 중심으로 피부는 벌겋게 부어 올랐다. 찔린 자리는 찔리기만 하거나 작은 가시가 박히거나 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기 가시는 아주 작고 투명했다. 그 수많은 부위를 가시가 있는지 없는지 일일이 살필 수도 없거니와, 박힌 가시 일부는 피부 아래로 숨어버려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시가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면, 마취하고 일일이 피부를 도려내는 방법도 있는데, 아주 작은 가시를 두고 그런 처치를 하기엔 일이 너무 커보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린 결론은 일단 염증과 알러지 반응에 염두를 두고 약을 처방하는 일이었다. 가시가 없는 부위는 약을 복용하면 좋아지겠지만, 만일 가시가 피부 안에 있다면 병변이 좋아지지 않거나 좋아져도 다시 부어오를 것이다. 그 때 가서 필요한 조치를 고민하는게 낫겠다, 설명하고 처방전을 내 주었다. 뱃일에 질려버린 두 사람은 바로 육지로 올라갈 것이라 말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공은 이 친구들이 집에 들렀다 찾아갈 다음 의사에게로 넘어갔다. 부디 합리적이고 적절한 처치가 이루어지기를..


생선 또는 바닷것이 품은 가시의 지정학 또는 사회학이 존재한다. 당연하게도 가시박힌 상처는 바닷가에서 많이 발생한다. 제주에 내려와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보면, 생선가시가 손이나 발에 박힌채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생선을 다룰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장갑을 끼고 온갖 보호장구를 갖추어도 집요하게 파고드는 생선가시에, 또는 잠시 다른 생각이나 한눈을 팔다가 푹 하고 찔린 가시에 아린 손을 부여잡고 병원을 찾는다. 배 위에서 물 속에서 또는 생선들이 널린 여러 장소에서, 사소하다면 사소할 그런 사고는 수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치는 사람들은 직업적으로 생선이나 바닷것을 다룰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바다나 갯가에서 사람들은 많이 다친다. 특히 제주의 바닷가 현무암을 날이 서 있어서 맨살이 닿으면 쉽게 상처를 입는다. 갯바위에서 넘어져서, 물 속에서 놀다가 바위에 긁혀서 생긴 상처로 병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려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제주도 현무암의 날카로움을 모르고 준비없이 달려들다 다친 여행객들이다. 그들이 생선가시나 성게같은 바닷것에 찔려 병원을 찾는 일은 많지 않다. 가시는, 자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위협하고 다루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해녀 할망들도 종종 병원을 찾는다. 대부분은 몸 여기저기에 혹처럼 매달린 통증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러 오지만, 손이나 발에 성게가시가 박혀오는 경우도 자주 있다. 물질을 하다가 모르는 새, 발이 바위틈을 스치다 따끔하면 성게 가시가 박혀 있었다. 성게를 따다가 또는 작업하다가도, 손에 가시가 박혀 아프다고 병원을 찾는다. 성게 가시는 골치가 좀 아프다. 방사선 검사를 해 보면 쉽게 보이고 색도 검어서 찾는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들은 조금만 살짝 힘을 줘도 살갗 안에서 똑똑 부러진다. 그래서 찾아내면 부러지지 않게 살짝 잡고 빼내는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 가장 고통스러워 보이는 경우는 성게가시가 손톱 아래로 박혀있는 경우다. 염증반응도 심해서 간단한 마취를 하지 않으면 빼내는 시술 자체가 더한 고통이다. 손톱 아래로 보이는 성게가시의 검은 선을 따라 손톱을 길게 자르고, 가시를 요령껏 잡아 부러지거나 으스러지지 않게 잘 뽑아낸 다음, 미세하게 남은 부스러기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드레싱을 한다. 마취가 풀리면 손톱이 들린 부위는 얼마나 아플지.. 아프지 않게 약 열심히 드시라는 말이 전부인 것이 무색하다.


생선가시는 방사선 검사로 관찰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럴땐 초음파 검사를 진행한다. 그래서 가시가 피부 안으로 박혀 있음을 확인했다면, 시작은 그 때부터다. 가시가 크다면 마취 후에 피부절개를 하고, 절개창을 통해 가시를 찾는 과정을 거친다. 만일 가시가 작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면, 가시가 있을 부위를 한 번에 절제하고 봉합하기도 한다. 가시를 찾는 일은, 말하자면 수학공식 외에 존재하는 다양한 응용의 영역이다. 그래서, 원칙에 대한 분명한 견지와 시술자의 합리적 센스를 요한다. 한마디로 쉽지 않다. 생존과 방어를 위한 진화의 산물은, 자신을 탐하는 이들을 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의 살로 너의 삶을 유지하려면, 그 정도 고통의 댓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조용하게 다그치는 것 같다.


그러나 고통의 사회학은 균등하지 않다. 인간의 손에 넘어 온 바닷것들은 깊은 고무장화를 신고 길다란 비닐앞치마를 두른 채 손에 장갑을 낀 누군가의 손질이라는 서비스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손질된 것들은 깨끗하고 정갈하게 차려진 상 위에 놓여, 그 앞에 편안하거나 깔끔한 차림의 누군가의 손에 들린 젓가락에 잡힌다. 돈의 흐름은 그렇게 소비의 과정을 나누었고, 과정의 간극에는 희미하게 계급의 냄새가 배어있다. 행여 정갈한 상 위의 생선살에 길다란 가시 하나가 남아 있다면, 진화의 몸부림이 만든 한때 살아있던 것의 저항이 아니라 손질한 인간의 실수로 단정된다. 우연히 남은 그 가시 하나가 벌일지 모르는 모든 일들은, 한 때 살아있던 것의 복수로 이해되지 않고 손질한 인간의 책임으로 돌려진다. 손과 발에 가시가 박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다시 돈의 흐름체계 안에서도 실수하면 책임을 져야하는 위치에서 경계가 둘러진다.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와 소비의 과정에 들어선 것들의 한 때의 숨은, 의미는 커녕 실수로 남은 저항의 흔적조차도 존중받지 못한다. 마치 흘러내리는 용암에 흔적없이 타버린 풀잎처럼 말이다.


가시라 하면 당연히 생선가시만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가시가 박혀오는 환자들도 있고, 이 곳은 남쪽 섬이니만큼 야자나무 가시가 종아리나 손에 박혀 오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생선가시가 손과 발에만 박히는 것은 아니다. 맛있게 먹던 고등어 가시가 편도나 목젖에 박히기도 하고 깊다면 후두 가까운 인두에 박히기도 한다. 가장 무서운 상황은 자리돔 가시이다. 억세기로 유명해서 자리돔 가시나 날카로운 파편이 식도에 걸리면, 식도천공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내시경적 제거술을 시행해야 한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의학적 상황은 때마다의 합리적 센스를 발휘하여 대처하면 되는 일이지만, 바다내음 또는 간간한 비린내를 피할 수 없는 이 섬에서 손과 발에 박힌 바닷것들의 가시는 생각의 특이점을 자극한다. 생계를 위해 피할 수 없는 것들에의 부담과 고난 같은 것들.. 물론 그것이 비단 바닷것을 만져야만 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머무는 이 섬에 자리잡은 진료실에서는, 손과 발에 가시박힌 이들의 표정을 자주 보게 된다. 그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에는 보편이면서도 바닷가이기에 느끼는 특이점이 존재한다. 조금 더 생각을 이끌어보면, 역시 보편이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계급 또는 간극의 흔적들이 느껴진다. 그래봤자, 나는 내 머리와 마음 속에서만 생각을 순환시킬 뿐이다. 드레싱을 마친 환자가 묻는다. ‘이거 물 닿아도 되나요?’.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당연히 안 됩니다.’. 그들의 씁쓸한 표정에 내가 무슨 도움이 되고, 내가 생각하는 특이점과 흔적들에 나는 무슨 깊이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동네의원 진료실] 아침과 저녁이 뒤바뀐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