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듣는다. 이 섬의 지역 라디오 방송을 듣다보면 본 프로그램 방송시간 사이에 1분 건강이라는 주제로 일종의 의학칼럼이 방송된다. 어느 한의사는 젊고 분명한 목소리로 교통사고 후유증과 아이들 키성장에 대해서 설명한다.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안과의사는 나이지긋한 목소리로 노련하게 안구질환을 설명한다. 토막처럼 끼어있는 이 칼럼의 최고 인기는, 육지의 남쪽바다에 접한 도시에서 어깨를 전문으로 진료한다는 어느 병원장이다. ‘어깨는 날개입니다.’라는 나름의 유행어를 탄생시킨 그는, 약간의 높은 톤과 긴장감있는 목소리로 어깨의 여러 질환을 설명했다. 그는 노련했다. 분위기를 집중시키는 목소리로 단지 증상과 질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환자의 고통을 공감하는 내용으로 집중된 분위기에 안타까움이라는 양념을 잘 버무려내기도 했다. 그는 정말 오랜 시간을 이 섬의 라디오 방송에서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깨수술 후 드레싱을 위해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 중에는, 그 병원의 이름이 적힌 팔걸이를 하고 오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방송의 효과가 괜찮은 때문인지, 그 칼럼에 참여하는 의사들이 늘었다. 말이 칼럼이지, 실제로는 광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형식은 비슷하다. 칼럼 초반은 자기소개와 함께 자주 접하거나 관심있는 질환이나 증상들에 대해 일반적인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설명한다. 칼럼 후반에는 설명된 증상이나 진단에 대해 일반적인 치료법을 제시하는데, 마지막은 항상 이런 식이다. ‘좀 더 심각한 상태로 진행되거나 다른 질환일 수도 있으니, 반드시 병의원으로 와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 은근한 형태로 불안을 만들고, 온건한 형태로 경고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발걸음을 병의원으로 향하게 만든다. 조금 단적으로 말하자면, 의료의 전형적인 수요창출 방식이자 장사수법이다.
병원 대기실에는 곳곳에 의료와 관련된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입구에는 배너들이 서 있다. 그 중 한 포스터에는 크고 굵은 글씨체로 이렇게 써 있다. ‘비만은 과학입니다.’. 그 문구 옆으로는 청바지를 입은 뚱뚱한 백인 여성이 옅은 미소를 띄고 서 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이지만, 저 문구는 볼 때마다 무언가 어긋난 것 같은,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원인에서 결과로 이어지는 서사의 어느 중간즈음에 자리를 잡고, ‘자, 이제 우리 이제부터를 생각하자.’고 말하는 저 문구는 뻔뻔하다. 제약회사에서 제공한 포스터이니 그럴 수 있을 일이다. 그러나, 비만의 원인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제부터’라며 등을 떠미는 문구의 뉘앙스와, 비만을 ‘과학적인 의료’로 잘 ‘치료’해보자는 뻔한 다독임은 , 치료자의 입장에서는 진지한 독려보다는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져 불편하다. 다루는 진료영역에 비만도 있는 입장에서는, 마음의 한 켠을 적당히 덮어두고 현실적으로 저 문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나름의 수고가 필요하다. 대한비만학회가 제시하는 비만관리의 가이드라인은, 일차로 운동이다. 과학적 치료로서 제시되는 약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보조적 수단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의료에서는 이런 기준은 쉽게 무시된다. 그리고, 비만을 해결해보려는 환자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기준은 번거롭고 귀찮기만 할 뿐이다. 간편한 방법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의료는 철저하게 문제발생 이후에 집중한다. 의료의 역사를 보면, 신체에 문제가 생긴 다음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으로 의학은 존재했고 발전했다. 따라서 문제발생 이후에 초점을 두는 자세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의 환경과 건강상태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진 현대에, 문제발생 이후에 초점을 두는 자세는 어떤 다분한 의도를 품게 된다. 비판의 지점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비만이 대표적이다. 의도가 다분한 치료의 독려와는 달리, 비만이 어째서 발생하고 증가하는 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섭취량에 비해 운동량이 줄어든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낮은 계급에서 비만이 증가하는 이유가 고단한 노동으로 휴식과 운동의 기회가 적고, 인스턴트 등의 간편간단하고 질이 좋지 않은 음식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라는 사회적 사실들에 대해서 의학적 조언을 건네는데 게으르다. 이미 발생한 비만에 대해서는 펜터민 등의 식욕억제제를 어떻게 하면 부작용을 줄이면서 효과를 극대화시킬까 고민하며 약을 추가로 처방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요즘 민감하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 키성장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고민과 게으름이 교차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보자면 거의 대부분의 의료들이 그러하다.
문제의 원인을 간과하기로는 국가건강검진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건강검진은 ‘내 몸에 혹시 이상소견이 보이는가.’에 집중한다. ‘조기발견 조기치료’라는 원칙에 충실하다. 물론, 원인에 대한 접근항목도 존재한다. 흡연과 음주습관, 운동량, 식이습관 등등에의 체크항목이 있다. 그러나, 너무 겉핥기식이라 구체적인 조언자체가 불가능해서 항목 자체의 의미를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수준이다. 국가검진이라는 것이 사람들 하나하나의 체계적인 건강관리에 관심을 가지기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이해한다. 사람을 힘들게하고 아프게하는 사회시스템을 국가가 국민건강을 이유로 전면 재조정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조기발견으로 조기치료라는 건강검진의 취지는 암이나 질병의 악화를 막는 효율적인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아픈 원인에 대한 진지한 관심없이 이루어지는 건강검진은 어쩔 수 없이 의료소비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의료의 하나의 수단이 되어버렸다.
의료는 수시로 변하고 꾸준히 발전한다. 그러면서 치료의 가이드라인도 변한다. 고혈압을 예로 들자면, 대한고혈압학회의 진단기준은 140/90 이상이다. 그러나, 미국심장학회의 진단기준은 130/80이다. 대한고혈압학회는 고혈압의 진단기준을 고수하고 있지만, 미국심장학회의 기준에 따라 좀 더 엄격해질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이드라인이나 진단기준은 근거를 가지고 연구된 시대마다의 표준이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현상은, 이를 치료하거나 관리하기 위해서 약들이 점점 강력해진다는 점이다. 단일제에서 이중이나 삼중 복합제를 좀 더 선호하게 된다. 고지혈증도 마찬가지다. 단일제에서 복합제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변하고 있다. 당연히 약값은 상승한다. 예전 우리는 진료실에서의 진단은 보고, 듣고, 두드리고, 만져보는 진료자의 감각에 의존했다. 이제는 그러한 감각보다는 방사선 검사를, 그것보다는 초음파 검사나 카메라를 집어넣어 직접 들여다보는 방식을 선호한다. 때로는 아예 방사선이나 자기장 투사를 통해 통으로 들여다보는 방식을 후련해한다. 그에 따라 의료산업은 발을 맞추어 팽창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되지 않으면 안되는 분야가 된다. 산업과 소비는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이러한 방식을 부추긴다. 진료실에서 진료하는 입장에서 의사의 감각이란 더 이상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전락했다. 좀 더 나은 진료를 위해, 우리는 산업이 만들어낸 기계를 사들여 감각보다는 기계가 보여주는 영상과 수치에 의존해야 한다. 당연히 그 비용은 증가하기 마련이고, 기계를 사들이는 의사나 진료비를 지불해야 하는 환자 모두에게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반 일리치는 1976년의 저작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 의학의 치료기능을 고집스럽게 부정한다. 현대인의 여유없음과 과도한 노동에서 비롯된 생명체의 아픔에 ‘질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의학은 이를 치료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거짓이라고 단정짓는다. 단순한 치료적 효과에의 중독일 뿐이고, 병주고 약주기의 반복일 뿐이라고 말한다. 전문가를 자처한 이들이 장악한 의료는 하나의 권력이 되었고, 이는 의료인이 아닌 이들이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논하는 일을 자격없음을 이유로 차단해버렸다고 말한다. 따라서, 전문가가 독점한 의료를 개인과 가정이 돌볼 수 있도록 권력을 풀어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의료윤리학자 김준혁은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삶의 질을 위협하는 산업사회와, 이에 대해 문제제기나 해결하기는 커녕 덮어서 계속 곪게 만드는 의학에 이반 일리치는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고 말이다. 김준혁은 이반 일리치의 의료에 대한 비난은 인류의 문명과 의료의 역사는 언제나 함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반백신운동과 같이 막무가내의 자유와 선택권, 무모한 자연주의를 주장하는 이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대부분 터무니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산업의 고도화로 의료의 주체는 누구 또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과거 의료를 비판했던 이반 일리치의 주장을 터무니없다는 이유로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방송에 나와 간접홍보를 하는 의사들의 행위에서, 비만은 과학이라는 문구아래 치료자와 환자가 벌이는 암묵적인 가이드라인의 이탈에서, 의료산업에 점점 더 의존하며 치료자와 환자 모두 부담해야 하는 의료비용의 증가현상에서, 흐릿하고 애매한 어떤 순환고리의 중심을 잡고 조율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 동시에,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아픔의 원인들, 그러니까 사회적이며 정치적 환경적인 다양한 요인들에 의료의 조언 또는 접근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반 일리치의 주장은 의료인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무모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주체와 목적이 흐릿해지는 현대의 의학을 되돌아보자면, 이반 일리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회자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의료에는 몇가지 일반적인 원칙이 있는데 그 중 두 개를 들자면, 첫째는 ‘Do No Harm’이고 둘째는 ‘Less Is More’다. 환자에게 무엇을 하던 위해를 가하지 말 것이며, 때로는 치료를 최소화 하는 것이 최고의 효과를 내는 것이라는 의미다. 전자는 좀 더 중요해서 아주 잘 지켜지는 원칙이다. 만일 이에 반한다면 소송을 각오해야 하기도 하니 말이다. 후자는 경우에 따라 적용이 다양하다. 특히 우리나라같은 나름의 자본주의 의료체제와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는 지켜지기 어려운 원칙이다. 무엇이라도 환자에게 더 해줘야 비용을 벌어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의료는 ‘Do No Harm’원칙만 잘 지키면서 ‘Less Is More’를 애써 외면하는 시스템이다. 나 역시, 글은 이렇게 쓰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이 원칙을 지키기 쉽지 않다. 아니, 현실적으로 마음의 한 면을 애써 가리고 진료에 임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전거 페달을 밟는 횟수는 알아서 조절할 수 있어도 멈추면 쓰러지는 것처럼, 끊임없이 이익창출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미 이런 시스템에 적응한 환자들은 답정너가 된 것처럼 당연히 좀 더 무언가를 해 주기를 바란다. 이런 처치나 처방이 어째서 필요하거나 어째서 필요치 않은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일은 괜시리 내 입만 아픈 경우도 꽤 많다. 나 역시 현재의 시스템에 적응하여 ‘Less Is More’의 원칙을 많이 망각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니, 나는 내가 속한 의료시스템에서 주체는 누구인지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물러서 주체적이지 못하다 말하기엔, 내 몸을 담근 물살은 급류처럼 버겁다. 막대기 하나 강바닥에 처박고 버티며 듣는 의사들의 목소리, 내 앞에 앉아 여러 설명을 듣고는 결국 자신없다며 먹던대로 비만약을 달라는 환자의 무심한 표정, 그리고 환자마다 끊임없이 전자차트에 입력해야 하는 검사항목들과 뒤이은 처방목록들.. 점점 불어나는 급류에 내가 쥔 막대기는 이미 많이 밀려있었고,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