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시작은 귀 뒤쪽의 멍울이었다. 진단을 받기 얼마 전, 동생은 나에게 병변의 사진을 보내왔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답해 주었다. 귀 주변에는 그런 멍울들이 종종 생길 수 있다고 말이다. 아프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라는 말과 함께. 멍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자, 동생은 조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몇 개의 멍울이 관찰된다는 설명과 함께 조카는 조직검사를 위해 멍울을 절제하는 간단한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결과는 그러했다.
소식을 듣고 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울먹이고 있었다. 사는 곳의 대학병원에 있는 어린이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검사일정을 상의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더 해 줄 말은 없었다. 일정 나오면 알려주고, 중간에 혹시 변동이 있으면 알려달라 말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나는 조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가지고 있던 작은 원칙들이 무너졌다. 나는 환자들에게 긍정적이고자 했다. 불안을 안고 내게로 오는 환자들에게 불안을 좀 더 각인시켜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방법들을 통해, 환자가 생각하는 불안이 실은 근거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생각하시는 그런 심각한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아요.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서 나는 발목의 복사뼈 주변의 염증이 잘 낫지 않는다며 전화하신 어머니에게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 열심히 받으면 나을 거라고 안심을 시켜드렸다. 친구가 물어보는 자신의 어깨 통증에 대해, 많이 써서 생기는 것이지 심각한 문제는 아닐거라고, 물리치료부터 열심히 받아보라고 권했다. 코로나19 백신의 부작용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그럴 확률은 마른하늘의 날벼락보다도 더 적으니 안심하고 접종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조카의 증상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어린 사춘기 학생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수많은 불안에 대해 그러했듯이,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는 귀찮음이 아니고 별 문제 아닐 것이라는 긍정을 담으려 노력했다.
확인된 결과에 대해, 나부터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긍정을 먼저 주고자 하는 태도는 정말 옳은 것인가. 혹시 나는 직업적 일상을 모험으로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근거없는 위안에 상처받은 환자들은 얼마나 있었을까. 어째서, 긍정적이고자 하는 나의 직업적 원칙이 내 가족을 통해 뒤흔들려 버린 것일까.. 참담함은 진료실 책상에 앉자마자 두려움으로 변했다. 내가 무언가를 크게 잘못하고 있을 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이어지는 진료는 평소에 하던 대로의 설명으로 채워졌지만, 자신감이 떨어졌다. 목소리는 작아졌고, 힘이 떨어졌다.
의사의 입장에서 불안은 확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진단마다 다르긴 하지만, 하나의 진단이 내려질 확률은 통계적으로 그리 높지 않다. 심각할 질환일수록 통계적 확률은 낮아진다. 예를 들어, 지난 2020년 1월에서 9월 사이의 우리나라 전체 암 산정특례 환자는 약 2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5%를 넘지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속쓰림과 소화불량 증상에 내가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맞아떨어질 확률은 0.5%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시경을 시행해서 위암이 발견된다면, 환자 개인 입장에서는 확률 100%의 사실이 되어버린다. 이런 경우, 별 문제 아닐 것이라는 단순한 긍정과 위안은 거짓말이 된다. 요즘같이 의심과 불안이 팽배한 시대에 이런 경우는, 원망과 불신이 되어버리고 때로는 법적인 공방으로까지 치닫는다. 말을 아끼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때로는 불안의 해소를 빌미로 온갖 검사를 권유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불안은 의료수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세상은 불안을 생산한다. 텔레비전의 아침 정보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증상이 있으면 심각한 질병일 수 있으니 꼭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며 진료실에 들어온다. 알고 지내던 누가 이번에 무슨 병을 진단받았다더라 하는 주변의 신상변화에서 불안은 피어난다. 그리고, 현실에 조심스러운 의사는 할 수 있는 여건과 능력 안에서 불안의 해소라는 목적을 두고 여러 검사를 진행한다. 대부분은 정상에 가까운 결과로, 별다른 문제가 없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건강검진도 이와 비슷하다. 건강증진을 목적으로 한다지만, 현실은 ‘검진으로 문제가 일찍 발견되면 치료도 쉬워질 수 있으니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라’에 가깝다. 즉, 국가가 불안을 해소해주겠다는 의미에 가깝다.
건강증진이라면 검진이라는 전문영역의 틀을 넘어 좀 더 포괄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깨와 손에 심한 통증을 느낀 환자가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시간에 진료실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통증이 자신의 몸에 혹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통증이 시작된 시기와 직업을 물어보니, 무거운 상자를 수시로 들어 옮겨야 하는 택배노동자였고, 통증은 몇 달 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간단한 방사선 검사와 함께 전반적으로 진찰을 하고 난 후, 고된 노동에 의한 그러니까 너무 많이 쓰고 무리해서 생긴 통증임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제일 필요한 물리치료는 마감시간이 임박해 받지 못하고 처방전만 받아 돌아갔다. 그는 근무시간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이나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처지였다. 국가가 정말 국민의 건강을 증진시키고자 한다면, 통증을 느껴야만 하는 무리한 작업에 제한을 두는 작업환경을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통증이 혹시 심각한 상태라는 신호는 아닐까 하는 불안에서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병원진료와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노동시간에 붙잡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없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불안 앞에서 조용히 귀를 열고, 증상을 판단하며, 어떤 이야기를 건넬까 고민한다. 마냥의 긍정과 위안은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미 오래 전부터 깨달은 사실이다. 내가 위치한 자리에서의 여건과 나의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다면 환자의 불안은 근거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환자의 불안을 방치하거나 빌미삼고 싶지 않은 고집이, 고집스럽게 남는다. 그래서 마치 본능처럼 ‘대부분은 심각한 문제가 아니고 많이 쓰거나 생활습관 또는 환경요인에 의한 가벼운 증상일 뿐이니 너무 걱정부터 하지 마시라.’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서 실제로 그러함을 확인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불안해진다. 내가 환자에게 건넨 이 긍정에는 얼마만큼의 진실이 담겨 있고 얼마만큼의 힘이 있을까? 환자에게 내려진 진단은 그에게는 100%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전하게도 흐릿하고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순환의 고리에 묶여 구르고 있는 중이다. 불안하게 구르던 나는 충분히 뾰족한 돌부리에 걸려 제대로 넘어져 버렸다. 예리하게 파고든 아픔은 나를 뒤흔들어 버렸고, 불안의 순환고리는 나를 납작해질 정도로 위축시켰다. 현실과 신뢰의 문제에서 모두가 조심하는 이유를 내가 뒤늦게서야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불안하다. 남은 건, 그럼에도 조금씩 건네는 나의 긍정은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고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