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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장들

[동네의원 진료실] 통증의 사회학

by 전영웅

그는 택배노동자였다. 하루 종일 골목골목 탑차를 몰고 무거운 상자를 들어 옮기고 나면, 해가 긴 여름임에도 날은 금방 어두워졌다. 팔을 올릴 때마다 욱! 소리가 날 정도로 아픈 오른 어깨와, 붓고 당겨지듯이 아픈 손목이 그날의 일이 마무리되었음을 실감하게 했다. 몸도 피곤함에 묵직해서, 얼른 저녁을 먹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집에 가고 싶은 생각보다도, 어깨와 손목의 통증이 더 신경쓰였다. 이러다 몸 어디 한 군데 제대로 고장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에 주변을 둘러보지만, 대부분의 병원은 진료를 마감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늦은 시간까지 진료를 하는 병원이 있다고 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들렀고, 그는 그렇게 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통증은 육체가 지닌 가장 훌륭한 방어기제다. 몸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신호하고 경고하는 본능의 장치다. 괴롭거나 불쾌한 기분으로 몸이 당장 통증을 해소할 방법을 찾도록 종용한다.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가장 많은 이유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는 통증을 당장 해소하기 위해서 병원을 찾거나, 통증의 원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를 찾아보고자 병원을 찾는다. 따라서, 통증은 의사 입장에서도 가장 고민해야 하는 증상이다.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통증 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통증은 근골격계 통증이다. 급성 상기도염에 따른 두통과 인후두의 통증도 많다. 여행지라서 그런지, 맛있다는 것을 먹고 배탈이 나서 배가 아파 진료실로 들어오는 여행자들도 많다. 근골격계의 통증은 굳이 경험적으로 분류한다면 첫째로, 미끄러져 넘어질 때 손을 잘못디뎌 발생하는 손목통증이나, 고르지 않은 바닥에서 발을 접질려 발생하는 발목통증 등의 급성기 통증이 있다. 둘째로, 위의 사례와 같이 반복적인 작업이나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면서 어깨나 목 허리 등에 발생한 통증이 누적되어 서서히 증가하는 만성 통증이 있다. 급성기 통증은 당장의 심한 통증과 ‘혹시 어디 부러지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바로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만성 통증은 ‘조금 쉬면 괜찮겠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티다 생각같지 않을 때서야 병원을 찾는다. 다시 굳이 경험적 비율로 따지자면 후자가 좀 더 많은데, 그렇다면 만성적인 근골격계 통증은 이 섬에서 삶을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특징적 통증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물론, 어디에서나 만성통증은 그 지역에 삶을 내린 사람들의 고단함의 산물이다.


정말로 그러하다. 적어도 한두 주 전부터 아파오던 목과 허리는, 한 두달 전부터 아팠던 손가락이나 팔꿈치는 먹고살기 위하여 노동하는 이들의 어떤 표식같았다. 언젠가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붓고 잘 굽어지지 않는 손가락에 혹시 내 손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 진료실로 들어온다. 무언가를 집어들면 저릿하게 아파오는 팔꿈치에 대체 왜 이러나 싶어 내 앞에 앉는다. 그들은 이미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고, 웹 상에 떠도는 그 무서운 말들을 벌써부터 한 웅큼 집어삼켜서, 내가 내뱉는 말들에 격한 두려움을 느낄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러나 증상을 듣고난 후의 나는 이렇게 묻는다. ‘’혹시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가요?” 대답은 거의 대부분에서 식당일을 한다고 돌아온다. 또는 목수처럼, 손을 많이 쓰는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나는 예의 긍정적인 설명으로 안심을 시킨다. “대부분의 이런 증상은 많이 써서 생깁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직업병인 셈이죠. 걱정하시는 그런 심각한 질환은 가능성이 낮아요.” 실제로 정말 심각한 상황이 아님을 확인시키기 위해 방사선 검사와, 증상과 연관있는 혈액검사 등을 처방하고 결과를 확인시켜 준다. 많이 써서 생긴 증상은 쉬어야 낫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쉴 수 없는 사람들은 일하는 중간에 짬을 내어 병원에 와서 증상을 체크하고 물리치료를 이어나간다. 안심시킨 대로, 환자의 증상은 점점 호전된다.


통증을 나름대로 구분하긴 했지만, 사실 통증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근골격계 통증 역시 사람을 구분할 리 없다. 인간의 몸은 해부학적 편차 내에서 일률적이다 싶을 만큼 구조와 구성이 같다. 그리고 움직임의 역학 역시 거의 같아서, 진료실에서 호소하는 통증도 해부학과 움직임의 역학에 따라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비슷하다. 그렇다면, 통증을 바라보는 시선은 일반적으로 의학에 기준을 두지만, 통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시선을 필요로 한다. 의학 외의 원인이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인, 즉 통증을 유발하는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시선이다. 그러니까, 통증은 주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오지만, 해부학과 운동역학의 의학적 원인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보면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테니스 엘보우의 어원은 테니스를 많이 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팔꿈치 통증에 있다. 이렇게 통증은 취미로 운동을 많이 하거나, 이 섬의 올레길을 무리하게 걸은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 이 역시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온도의 차이, 또는 공감의 차이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조심스러운 말들이기에, 미리 편견이 없음을 밝혀둔다. 편견이 있거나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회의 구조와 계급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전쟁터에서도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다친 이들을 치료해야 하는 의학은 차이와 계급을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기에 나는, 적어도 내가 행하는 의료행위 자체는 편견을 가질 수 없다.


통증은 어째서 평등한가에 대한, 우매하면서도 막연한 의문을 가질 때가 종종 있다. 그저 해부학 구조와 운동역학에 따라 통증은 발생할 뿐인데, 어째서 이 환자와 저 환자의 통증은 똑같은가에 대한 답없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일 오후 3시에, 부스스하고 퍼석한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온 작은 식당주방장의 아픈 팔꿈치와, 오전 골프를 마치고 매끈한 얼굴과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로 잠시 들른 중년남자의 아픈 팔꿈치가 어째서 똑같이 아픈 것인가의 답없는 고민이 종종 생기는 것이다. 먹고사니즘의 고단함에 껌딱지처럼 붙은 통증과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를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는 범위에서 누리다 생긴 통증의 똑같음은, 몸담고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감지할 수 있는 일종의 딜레마의 영역이다. 이 딜레마는 진단이 이루어지고 치료의 단계로 넘어가면서 더욱 깊어진다. 식당 주방장은 치료에 필요한 물리치료 한 시간이 여유가 없어 부담스러워한다. 종종 추가하게 되는 충격파 치료는 실비보험에 들지 않아 경제적 부담이 된다며 손사래친다. 밴드처럼 둘러매는 보호대는 일할 때 거추장스럽고 피부에 두드러기가 난다고 불편해한다. 결국 제대로 된 해결책 없이, 진통제와 일시적으로 증상을 호전시킬 뿐인 주사처방을 받고 돌아간다. 그러나, 팔꿈치 통증이 지나친 골프때문임을 알게 된 환자는, 여유롭게 물리치료를 받고, 추가되는 충격파 치료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꾸준하게 받고 있는 물리치료에도 통증이 금방 좋아지지 않는 이유는, 골프에 대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연습장 출입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치료를 권유받고 같은 시간이 지난 후의 두 환자의 호전여부는 다시 나를 불편하게 한다. 몇 달만에 다시 찾아 온 식당주방장은 나의 완곡한 설명에 씁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의학은 객관적이며 통증은 평등하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공감한다. 통증은 인간의 가장 훌륭한 방어기제다. 그러나, 통증이 발생하고, 발생한 통증을 다루는 과정은 답없는 고민 안에서 마음이 불편하다. 어깨와 손목이 아파 늦은 시간 진료실을 찾은 택배노동자가 간단한 방사선 검사와 촉진을 받고 난 후 처방받은 것은 간단한 진통제와 나의 답없는 위안이었다. “일이 힘들어서 몸이 무리를 하니까 생기는 증상같아요. 이런 경우는 쉬어주어야 좀 나을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물리치료라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물리치료는 마감된 때였다. 의학의 영역이 펼치는 세상에는 수많은 통증에 대한 해석이 존재하고, 통증은 어떻게 하면 줄이거나 해소할 수 있을까 수많은 치료법이 존재한다. 굳이 의료인이 아니더라도, 유튜브나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그 방법들은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는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것도 치료의 기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말이다. 통증은 평등하지만 통증 이후의 시간은 평등하지 않다. 그것은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이 몸담은 세상의 구조에 기인한다. 나는 여전히 의학의 원칙에 입각하여 통증을 차별할 수 없다. 그러나, 통증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이유가 먹고사니즘의 고단함과 먹고사느라 해야만 하는 노동때문이라면, 의학이 몸담은 세상의 구조에 편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동시에, 세상의 고단함에 의학은 위로를 주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도 잠시 발을 담궈 본다. 세상의 편견 안에서 편견없는 의학이 하는 역할이 단지 상처를 덮어두고 통증을 잠시 가려주는 정도라면, 그래서 세상의 편견이 더욱 깊어질 때 그것에 방관하거나 또는 자의와 상관없는 동조가 된다면, 의학은 과연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고민한다. 이 고민이 정말 의미가 있다면, 통증은 여전히 평등하나 통증의 자연함은 의학이라는 이성으로 구조적 차별을 짊어지게 된다. 통증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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