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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30. 2021

검도예찬

2021년 귤림제주, 제주도의사회 에세이집 기고문

  무릎을 꿇고 정좌한 자세에서 나는 머리에 면수건을 두르고 호면을 썼다.  안면을 보호하는 면금이  얼굴을 감싸자, 긴장된  호흡이 호면 안으로 가득했다.  호면끈을 머리 뒤로 단단히 묶어 호면을  머리에 탄탄하게 고정시켰다.  호흡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호완을  손에 끼고, 죽도를 잡고 일어섰다.  사각의 시합장 바깥언저리에 서서 상대방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팔을 움직여 어깨를 풀어주고, 가볍게 뛰어 발목도 풀어주었다.  시합  대기하면서 빠른머리치기와 기본스트레칭으로 몸을 충분히 풀어주었음에도, 시합 직전의 몸은 언제나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차분해지자는 머리속 되뇌임은 시합을 앞둔 몸과는 따로여서 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상대도 준비를 마치고 일어서서, 시합장 맞은편으로 나와 마주섰다.  심판은  선수가 모두 준비되었음을 확인하고 시합장 안으로 들어오도록 지시했다.  한보  , 자리에  채로 상대방에게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한다.  그리고 한보 두보를 거쳐  보에 죽도를 뽑아 몸의 단전에 붙이고 칼끝은 상대의 목을 겨누는 중단세를 취한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크게 내쉬어, 몸의 긴장을 최대한 뱉어냈다.  심판의 시작! 구호가 들렸다.  나와 상대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주에 내려오니 시간적 여유가 갑자기 크게 늘었다.  남는 시간에 무얼 해야 할 지 모르겠을 정도로 생활이 바뀌면서, 마음도 많이 편해졌었던 것 같다.  체중이 급격하게 불기 시작했고, 무릎에 통증이 생기고 발목이 부었다.  운동을 해야겠다 다짐하며 걸어서 출퇴근을 하던 중, 출퇴근길에 검도장이 보였다.  아, 저기다!  나는 퇴근길에 들러 관장님과 면담을 하고 바로 검도를 시작하기로 했다.  11년 전 입도하던 해,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단순히 검도장이 보여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시절, 검도 동아리에 몸담았던 동기의 모습이 무척 인상깊이 남아 있었다.  호구를 착용하고 죽도를 든 모습에서, 나도 해보고 싶다라는 열망이 작게 생겼었다.  의사와 전문의로서의 모든 수련을 마치고 경험해 본 거의 모든 취미는, 과거에 해보지 못했던 것들에의 열망에 기인했다.  출근길에 우연히 보인 검도장 간판은, 무의식에 부유하던 검도에의 작은 열망에 불을 지폈다.  그래서인지, 시작에 고민도 없었고, 배움에 지루함이 없었다.  지하1층 습하고 작은 도장에 관원은 두세명이 전부였다.  그것도 각자의 일과와 시간에 쫒기다보니, 수련은 혼자 또는 다른 관원 둘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몸의 변화를 느끼며 부지런히 수련했다.


  서로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보이는 건 면금 틈새로 보이는 상대의 눈빛이 유일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모든 대결은 눈빛을 보아야 한다.  눈빛이 모든 움직임을 파악하는 시야의 중심이자 단서다.  중단세를 취하고 죽도의 끝을 맞대며 상대를 탐색했다.  유효타격 거리 언저리에서 공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호흡을 일정하고 고르게 유지해야 한다.  내쉬는 나의 숨은 내 골 속과 호면 안에서 거칠게 공명했다.  상대나 나나 쉽게 공격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기회는 찰나의 틈에서 비롯된다.  찰나의 틈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의 틈을 잡아내는 것은 모든 대련의 기본이지만, 그 기본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훈련에 쏟아붓는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손만 대어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죽도를 휘두른 나의 공격이 상대에 먹힐 리 없었다.  다시 중단세, 눈빛과 호흡의 정렬, 상대방 탐색, 기회의 포착..  집중과 긴장의 최고조 안에서 나는 이제껏 수련하며 쌓은 감각들을 발산하기 위해 차분해져야 했다.


  검도의 유래는 일본의 검류에서 시작한다.  북진일도류 등의 진검을 다루는 수많은 검류 중 일부가 훈련 또는 안전한 대련을 위해 죽도를 활용한 데서 유래한다.  그것이 전 국민에게 보급되며 일종의 스포츠가 되었고, 대련기술이 정리되며 현재의 검도로 이어졌다.  검도의 타격은 머리 손목 허리, 그리고 목 부위를 공격하는 찌름으로 이루어진다.  죽도를 휘두르거나 찌르는 방법으로 공격이 이루어지니 호구착용은 중요하다.  모두 착용하면 약 4킬로그램 정도다.  약간의 묵직한 몸을 움직이며 상대를 타격하거나 상대의 타격을 받아주는 형식으로 수련한다.  그 전에, 도복만 착용하고 죽도를 휘두르며 타법과 자세를 수련한다.  초반의 이 기간은 조금 정적이기도 한데, 약간의 지루함을 잘 이겨내면 호구를 착용하게 되는 시점부터는 매우 다이나믹하고 집중적인 수련이 시작된다.


  끝을 마주하던 죽도가 훅 하고 들어왔다. 순간의 긴장! 상대의 죽도가 내 머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막아내고 무너진 거리 안에서 상대를 공격한다.  머리가 들어오면 쳐내고 머리를 치던가, 머리가 들어오려는 찰나에 손목을 노리던가, 머리를 막고 죽도를 돌려 허리를 치면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내가 얼마나 수련을 했는가, 상대의 공격에 내 반응속도는 얼마나 되는가, 상대의 공격은 얼마나 빠른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하지만, 긴장이 폭발하는 대련의 순간에 이런 계산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경험이 몸에 새긴 감각에서 비롯되고, 마비된 머리는 그 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몸은 본능과 감각으로 방어와 공격을 펼친다.  유효거리 안에서 서로의 죽도는 카각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맞붙는다.  머리를 치고 손목을 노리고 빠지면서 허리를 치는.. 그 폭발적인 순간은 오로지 몸만이 기억한다.  어딘가를 가격하고 유효거리 바깥으로 빠져 거칠어진 호흡과 몸의 긴장을 가다듬는데, 심판은 서로의 공격을 인정하지 않은채 요지부동이다.  다시, 서로의 죽도를 맞붙인 채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검도는 기.검.체의 운동이다. 기는 기세와 의지이다.  검은 죽도를 제대로 된 자세와 용법으로 사용했는가이다.  체는 자세에서 비롯되는 힘과 타격, 그리고 몸의 이동이 적절한가 이다.  한 마디로, 머리 손목 허리가 타점이라고 해서 단순히 죽도가 타점에 닿았다고 득점이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기세로 제대로 타점을 치는데, 그 일련의 과정이 명확하고 경쾌해야 하며, 타격하고 나서 몸이 기세를 유지하며 나아가야 득점이 가능하다.  이는 온전히 대련을 바라보는 심판의 판단으로 결정된다.  찰나의 순간들이 워낙 많아서 대련에 임하는 심판은 선수보다 많은 세 명이다.  하나의 공격이 이루어졌을 때, 둘 이상의 심판이 인정하는 깃발을 들어야 득점이 인정된다.  펜싱이나 태권도같이 감지장치가 있는 운동은 아니니 오로지 심판의 판단으로 결정이 되는데, 그래서 오심도 종종 일어난다.  


  상대가 갑자기 죽도 끝을 살짝 내렸다.  찰나였다.  나는 그대로 몸을 밀고 들어가 상대의 머리를 치고 나갔다.  그렇게 먼저 득점했다.  이 때부터는 긴장에 더해 방어의 여유와 공격의 조급함이 생긴다.  몇 번 죽도의 엇갈림이 일어나고 몸이 충돌했다.  몸이 충돌하고 중심이 살짝 흐트러지는 찰나, 내 머리가 빈 틈을 상대가 잡아냈다.  나 역시 머리를 내 주고 동점이 되었다.  4분의 대련시간은 많이 흐른 상태여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동점 상황에서 마지막 득점을 누가 하는가의 싸움이었다.  호흡은 가파르게 올라왔고, 손목과 발목관절에 살짝 무리가 느껴졌다.  아까 부딪히며 떨어지다 잘못맞은 허리가 살짝 결려왔다.  호흡을 안정시키려 크게 내쉬었지만 쉽게 차분해질 리 없었다.  애써 가라앉히려 했던 긴장은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어 머리끝을 찌르는 듯 했다.  죽도 끝을 대고 상대를 가늠하던 움직임에는 조급함만 남아있었다.  틈새와 찰나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는가의 싸움..  나는 죽도 끝으로 상대의 죽도를 살짝 눌렀다.  순간 상대의 죽도가 뜨면서 내 머리를 노렸다.  찰나의 기회!  나는 죽도를 옆으로 올려 공격을 막았고, 그대로 손목을 돌려 들어오는 상대의 허리를 치고 나갔다.  타격거리 바깥으로 나가 몸을 돌려 기세를 잡으며 보니, 심판들 손에 들린 내 깃발이 번쩍 올라가 있었다.  득점이다.  내 대련을 보고있던 같은 관 소속 검우들의 환호성이 이제서야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고, 그대로 긴장이 풀어지며 어깨가 내려갔다.  시합장 안의 상대를 마주하던 첫 자리에 돌아가 그대로 서서, 나의 승을 심판에게 확인한 후, 죽도를 좌측 옆구리에 꽂았다.  그리고 뒤로 5보, 상대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시합장을 빠져나왔다.  축하해주는 검우들과 주먹인사를 하고 자리에 정좌한 채, 호완을 벗고 호면을 벗었다.  얼굴에 맺힌 땀 위로 시원한 공기가 스쳤다.  


  검도는 내 인생에 제대로 배운 첫 운동이자, 앞으로도 계속 해 나갈 거의 유일한 운동일 것이다.  제주입도와 함께 시작하여 11년을 이어왔다.  중간에 약간의 부침이 있어 수련시간을 따지면 4단이어야 하지만, 현재 나는 3단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에 두 번의 수련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19 상황에서 거리두기 강화에 따라 수련시간이 맞지 않아 자주 나가지 못하고 있다.  검도를 하면서 체중감량은 물론이고, 몸이 움직이는 원리를 경험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몸의 중심을 잡는 과정에서 코어의 중요성, 그러니까 대요근과 골반에서 무릎까지 이어지는 근육들의 중요함에 대해 깨닫는다.  손목과 발목이 아프면 그 원인에 대한 의학적 해석을 나름 해 보며 자세를 바로잡고 나름의 회복운동을 시도해본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특정증상의 환자들에게 경험적 설명이 가능해지는 공부가 되기도 한다.  검도는 세상과 일상을 마주하는 자세에 자신감을 더해주었다.  몸을 움직인다는 것에 더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은,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긍정을 더한다.  나는 그렇게, 나를 가꾸고 만들어간다는 마음으로 검도를 이어나갔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도 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래 할 수 있고, 늦은 나이에도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는 항상 검도를 권한다.  그래서, 이 글을 읽어주시는 선생님들, 뒤늦게나마 운동을 고민하고 계신다면 가까운 검도 도장에 방문하여 죽도를 한 번 쥐어보심을 권해드린다.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거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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