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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26. 2021

성탄절, 눈보라 : 20211226

  눈이 많이 내린다.  별 일 없으면 고립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보내야 할 하루다.  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북쪽 바다에서는 묵직한 구름이 천천히 밀려오면서 곳곳으로 눈을 흘리고 있다.  파도는 거칠게 출렁인다.  하얗게 변해버린 밭 위로 눈은 날카로운 사선으로 날린다.  모든 것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경고의 대답이 단순히 고립이라면, 그저 순순히 받아들일 만 하다.  웬만한 궂은 날씨에도 좀처럼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마당에서 버티는 반려견 녀석도 오늘은 체념한 듯 집에 들어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체념이 어울리는 날이다.  집 안에 미리 깔아주었던 나의 낡은 외투에 마음도 놓인다. 


  이 정도 한파일 거란 예상은 조금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의 한파에 고요한 파티를 준비한다고, 춥고 바람이 거칠어지기 전에 바다에 나가 낚시를 했었다.  한파의 직전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바람이 불고, 서 있는 갯바위에 무릎이 닿을 정도의 파도가 올라올 때까지, 경직된 어깨와 몸을 풀어가며 대를 던졌다.  몇 번의 입질과 랜딩의 실패로 조과는 없었다.  조과가 없으니 손질할 농어도 없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람과 추위는 내가 사는 동네를 덮쳤다.  막다른 경계에 서서 찌르는 듯한 긴장을 느끼다 안전한 곳으로 돌아와 회복한 안도는, 그 온도차 만큼의 스트레스를 날리는 후련함이 있다.  내게 농어낚시는 그러한 과정이다.  조과가 있다면 직접 손질하고 숙성시켜 사람들과 나누는 만족까지 있다.  그러나, 후련함 뒤의 만족은, 비교를 하자면 부차적인 감정같은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친구들과 보냈다.  아침의 크리스마스는 눈은 거의 오지 않았지만 추웠다.  인테리어가 한창인 병원에 들러 상태를 점검했다. 보안설비 공사 중인 병원은 인테리어의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다.  가구가 들어왔고, 다음주엔 에어컨 등의 천정설비가 진행된다.  공사 막바지에 들어서니, 공사가 마무리되면 또다른 과정이 시작될 것임을 느낀다.  1층에 먼저 오픈한 약국에 들러 인사를 나누고, 시내로 나왔다.  성탄절에는 문득 문구점에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시내에 가장 큰 문구점에 들러 진열된 문구들을 구경하고 아이들에게 줄 500피스 퍼즐을 구입했다.  와인판매점에 가서 눈여겨보았던 와인을 구입하고, 마침 좋은 스피커가 있어서 커피를 주문하고 청음하기 좋은 자리에 앉아 재즈 몇 곡을 듣고 나왔다.  날은 점점 추워졌고, 바람에 눈이 점점 실리고 있었다. 


  동문시장은 추운 날이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북적였고, 방어 한 마리를 회떠서 친구집으로 갔다.  와인을 마시고, 고기와 회를 마시고, 난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눈은 점점 쌓여서 도로는 하얗게 변했고, 방향이 비슷해서 먼저 출발한 지인의 차는 우리 앞으로 선명한 바퀴자국을 만들어 우리를 인도했다.  소소한 주말이나 다름없었던 크리스마스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매주 그런 소소함으로 답답함을 달래며 살아왔나 싶었다.  익숙한 기분과 분위기.. 크리스마스라 해서 다를 건 없었고, 다른 것 없는 날의 익숙함에 나는 만족을 느끼니 말이다.  


  묵직한 구름이 한차례 눈을 뿌리고 지나니, 사이로 푸른 하늘이 잠시 보인다.  그러나 북쪽 바다 위 저 멀리에는 다시 묵직한 구름덩어리들이 눈보라를 뿌리며 다가오고 있다.  재난문자는 수시로 내 핸드폰을 울리는 중이다.  오늘은 정말 서재에 앉아 저 풍경을 안주삼아 어제 마신 와인을 이어 마시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니면, 눈보라 속을 천천히 걸어, 좋아하는 바닷가 선술집에 가서 따뜻한 사케 한 병을 마시는 것도 좋겠다.  그러나, 삶은 원하는 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 1층의 약국이 오늘 정식 개국한다.  그 위에서 병원을 준비 중인 내가 가지 않을 수 없는 행사다.  경고도 고립도 체념도, 인간이 벌인 일련의 삶 안에서는 절대적이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절대적일 수 있는 것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인간의 위력에 우쭐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을 애써 무시하는 인간의 우매와 오만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제 그러한 인간의 삶에 따라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 온 것보다도 더 끈기있게 달라붙어 나아가야 한다.  마음속의 혼란, 딜레마가 좀 더 깊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듯이, 삶은 버텨야 하는 것인가 싶다.  체념과 순응의 나는 눈보라가 좀 더 많이, 오래 몰아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버티는 삶의 나는, 이제 곧 나가야 하는데 눈 좀 그만왔으면 하고 바라는 중이다.  나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감정은 혼란,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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