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굳이 표현하자면 중립적인, 진료실

by 전영웅

병원으로, 부근에 거주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내원한다. 동네의원이라는 성격상, 특별할 것 없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병원의 위치, 진료자의 경험, 그리고 시선에 따라 사람들이 달라보이기도 한다. 진료자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음 속 살짝 예민한 부위를 깃털뭉치 같은 것으로 톡톡 두드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서귀포 신시가지라는 위치는, 병원이 속한 강정동이라는 지명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선사한다.


병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강정 해군기지가 있다. 그리고, 해군기지에 근무하는 군인들과 군무원, 그들의 가족들이 병원에 많이 내원한다. 동시에, 강정마을의 주민들과 활동가들 역시 병원에 내원한다. 해군기지는 이제 물리적 현실이 되어 동네의 풍경과 생활의 변화에 직간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해군기지와 바로 접한 강정마을의 풍경은 급격하다 싶을 만큼 많이 변했다. 서귀포 시내에서 법환을 거쳐 해군기지로 이어지는 도로의 풍경들도, 예전같은 한가로움은 거의 사라졌다. 병원역시, 해군기지 주변의 변해버린 풍경 속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어떤 기대와 비슷한 종류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병원은 해군기지 개항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건강검진 센터를 구상했고, 그 시점에 내가 들어와 진료를 시작했다.


나에게 해군기지의 이미지는, 솔직히 말하자면 작은 아픔이다. 제주에 입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설 것이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역사회에 큰 갈등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조금은 막연했지만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래서 이슈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당시 살고 있던 제주 건입동에서 서귀포 강정까지 차를 달려 현장에 참여했었다. 강정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던 과정, 그리고 2012년 3월 7일 구럼비 발파, 이후로 이어진 해군기지 건설과 2016년 2월 개항부터 현재까지.. 나는 나름의 경험과 작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맨발로 올라설 수 있었던 넓다란 구럼비와 그 위에 앉은 사람들, 그리고 머리를 날리던 시원한 바람을 기억한다. 둘러쳐진 가벽을 따라 저항하던 사람들과 구럼비가 발파되던 날, 전경 방패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 현재가 되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사람들은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바라본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억과 풍경들에 대한 낭만적인 회상이나 감정을 품고있지는 않다. 현재의 시점에서, 나의 기억의 많은 부분들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을 진료실에서 종종 마주한다. 그리고, 작은 아픔이 녹아있는 구럼비를 뒤덮은,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안에 머물며 내 진료실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갈등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과, 갈등의 결과에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나라는 개인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스스로 종종 물어보곤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대부분의 경우에서 잘못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진료실은 중립적인 공간이다. 또는 세상의 모든 갈등을 넘어 몸이라는 다른 문제에 집중하는 공간이다. 어떻게 보면 의료는 중립적일 수 밖에 없거나, 중립을 강요당하는 분야이다. 굳이 의료의 중립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나는 진료실에서 마주한 활동가나 강정주민들에게 다른 이야기보다는 몸의 아픈 증상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해군기지에 근무하는 군인에게 강정의 입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일은 매우 어색하다. 그들은 병원의 바깥공간에서 서로 의견이 다르고 감정적 갈등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진료실이라는 공간에서는 나와 함께 있는 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환자들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강정에 대한 작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진료실에서는 양측의 누구에게도 그런 감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직업적 강박이 작용한다.


중립적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위는 모든 것에 있어 의도라는 것이 있고, 따라서 모든 행위는 정치적임을 알고 있다. 중립적이라는 말 자체가 정치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중립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역시 그가 원하는 의도에 기반하므로 정치적으로는 중립 또는 중심에서 벗어날 수 밖에 없다. 마르틴 니묄러의 시처럼, 중립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의와 다르게 정치적 위치를 강요당할 수 밖에 없기도 하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중립적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일 수 있다. 중립적이라지만, 직업적 강밥이나 원칙에 의해, 나는 나의 감정을 억제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강정에서 안면을 익힌 활동가들이나 마을 주민들을 진료실에서 마주할 때, 호의적인 감정으로 공감하면서도 너무 표현하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해군기지에 근무하는 군인이나 군무원들이 내원하면 별다른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편하게 웃어준다. 감정적 통증의 원인은 퇴근 후 잠깐의 낚시를 하러 가다보면 지나게 되는, 그 아름답던 구럼비를 통째로 뒤덮고 자리한 해군기지 자체에 있다. 꼭 이렇게 했어야만하나 하는 그러한 감정은 역시, 진료실 바깥에서 불현듯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료실이라는 공간은 감정의 자제, 또는 감정을 잔잔하게 유지해야 하는 제 3의 공간인 셈이다.


굳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슈 앞에서만 감정을 잔잔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상황에서 감정이 툭툭 튀어오르려는 것을 애써 통제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감정을 다스리는 일에 훈련되어 익숙해진다. 감정에의 미동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 윤슬이 가득한 잔잔한 바다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그런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그게 윤슬처럼 아름답기만 하면 좋겠지만, 이는 감정적 매너리즘 또는 무감의 상태가 되어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에 전혀 반응하지 못하는 무능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진료실이라는 공간의 단점은 이에서 비롯된다. 나의 가치관에 따라 세상의 이슈에 대해 감정을 표현하고 의견을 보탤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진료실에서는 세상의 이슈와는 거리가 있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진료실에 종일 있어야 하는 입장에서 세상의 이야기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힘들다. 의학이라는 위치가 그렇다. 세상의 많은 갈등 속에 존재하지 못하고, 갈등의 옆에서 서성인다. 물론 현대의학은 정치논리와 자본논리에 다리 하나를 걸치고 어떤 종류의 갈등 중심에서 분주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지만, 동네의원의 진료실에 앉아있는 입장에서 세상의 갈등은 왠지 거리가 있어보이고,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엔 현실적 입장에 제한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의료인들이나, 나름의 방식으로 갈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의료인들이 존재한다. 내 입장에서는, 보이는 대로만 다가가봤자 키보드 워리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기에 조용히 머무는 입장을 선택한다.


강정은 여전히 아프고, 사람들은 무심하다. 길지 않은 제주살이 속에서, 가장 급격했던 일련의 변화를 목도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심할 수가 없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여전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변화는 현재에 이어져 현실이 되고, 그 안에서 여전히 갈등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를 갈등 안의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리고, 나는 진료실이라는 공간에서 그 사람들을 마주하며 내 안의 감정과 머리 속의 생각들을 내려놓는다. 공간 안에서 중심을 가지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그것이 내 할 일이고, 나를 찾아 온 사람들의 목적이기도 하다. 갈등을 유발하는 문제들과 거리를 둔 위치에서 하는 일 없이 관망하는 일은,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직업적 자세라 의식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자세는 자주 어색해진다. 그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어색한 일이다. 나 역시 갈등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지역에서 진료를 했더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6년간 진료를 해 온 지역이 강정과 가깝다는 것, 지명 자체가 강정이라는 사실, 이 곳은 내가 오기 전 아름다운 구럼비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자 줄기차게 산을 넘어 내려왔던 곳이라는 점에서 생각의 농도는 짙을 수 밖에 없었다. 짙었던 생각의 농도에 반하여 나의 감정은 잔잔함을 유지해야 하는, 강정동은 나름의 훈련의 시간이자 공간이었다. 그 당연함과 어색함이 공존했고, 앞으로도 세상의 많은 갈등들을 마주해야 하는 진료실은,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다행이자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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