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젊은 남자가 진료실로 들어섰다. 호리하고 하얀 얼굴이 약간 투박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레 의자에 앉더니 항문에 뭔가가 나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런 증상은 생각보다 흔해서 혈전성 치핵이나 작은 농양이겠거니 싶은 마음으로 몇 가지 문진을 한 다음 진찰대에 올라가 누워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조금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환자의 주저함도, 보여야 하는 부위의 민망함 때문에 종종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안심을 시키고 진단과 치료를 위해서는 의사인 내가 직접 보아야 함을 재차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함을 넘어 불안해했다. 뭔가 좀 다르구나 싶은 느낌에, 나는 진료실 커튼부터 치고, 간호사를 잠시 진료실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궜다. 재차 안심을 시킨 다음, 나는 그를 진찰대에 모로 눕히고 환부를 살폈다.
콘딜로마였다. 종종 마주하게 되는 질환인지라 병변 자체로는 무심했는데, 진찰대에서 일어나는 그는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이었다. 처음의 주저함에서 지금의 저 불안한 눈빛까지.. 나는 짐작되는 것이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동성애자이신가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내가 처음부터 보였던 담담함과 별스럽지 않음을 자연스럽게 이어나가야 함을 깨달았다.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항문의 불편감뿐만 아니라, 불안과 초조함도 있기 때문이었다. 문을 걸어잠근 진료실 안에서 우리 둘은 다시 의자에 마주앉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행히 그는 다른 병원에서 혈청검사를 통해 에이즈나 성접촉에 의한 다른 감염질환은 없음을 며칠 전 확인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항문 콘딜로마는 이미 발생한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원한다면 레이저 제거술도 가능하고, 생활하다가 너무 커지거나 번지면 그 때 시술을 해도 됨을 덤덤하게 설명했다. 그래도 그는 불안해했다. 더 궁금한 것이 있냐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차트에 제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기록되나요?”
다시, 나는 차트는 개인기록이자 비밀이기에 병원 외부로 나갈 수 없음을 설명했다. 그래도 불안하면, 차트에 동성애라는 단어를 기록하지 않겠다 설명하고, 그렇게 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의 표정은 불안에서 약간의 그늘진 안도로 변했다.
이 상황이 낯설지는 않았다. 자주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진료실에서 또는 병동에서 만나는 동성애자들은 무척 예민해 했다. 자신의 성적 취향이 드러나거나 들킬까봐 극도로 조심했고, 처음에는 극구 부인하다가 나중에서야 그렇다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렵고 예민했다. 스스로가 그러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신에 자기부정의 감정까지 얹기도 했다. 그의 불안한 표정은 이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감정과 행위였을 뿐인데 부정당하는 현실, 그 안에서 살아가려면 강박에 가까운 자기검열은 필수였다.
1972년 미국 정신의학회 연례 학회장의 패널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의 가면과 북실한 곱슬머리 가발로 자신을 가린 어느 정신과 의사가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익명의 헨리 의사’였다. 그의 발언 차례가 되자, 그는 일어서서 말했다.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나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당시 미국정신의학회에서는 동성애를 정신과 질환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의학의 기본 가정 중 하나에는, 의사 자신이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정신질환을 분류하고 치료할 수 있다 말하고 있었다. 익명의 헨리 의사는 이런 기본 가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여파는 강렬했다. 다음해인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에서 동성애항목을 제외했다.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로 인한 여러 정신과적 문제들을 치료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수정했다. 익명의 헨리 의사는 자신의 행동에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20년간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다가, 1994년에서야 존 프라이어라는 정신과 의사임을 밝혔다. 학회의 방침이 바뀌었다고 해서 동성애자임을 드러내놓고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2010년 출간된 조안 러프가든의 책 ‘진화의 무지개’에서는 성을 이분법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단언한다. 성적 다양성은 문화적 유전적 생물학적인 관점에 무척 다양하며, 성을 단순하게 규정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잘못 파악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와 사회안에서 수많은 폭력과 비이성적 행위들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성적 다양성은 수많은 동물종에서도 발견되는데, 한 종 내에서의 동성애적 행위는 오히려 생존을 유지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성적 다양성 또는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유전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을 정리해서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유전적으로 규정된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유전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성적 다양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근대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성애는 그 존재를 증명하는데 어느 주제보다도 처절한 노력을 쏟아냈다. 1905년 발표된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는 처음부터 동성애를 성도착증이라 단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전후로 동성애는 범죄였다가, 20세기 중반 의학이 발전하면서 질병이 되었다가, 지금은 과학적으로 아직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성적 행위의 자연스러운 한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 존재는 그렇게 증명이 되어가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있을 뿐인 것이 존재로 증명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일은 부당해 보이기도 하고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존재의 사회적 존중이라는 점에서는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동성애가 어째서 사회적으로 여전히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과학적으로 온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제 동성애는 인간사회에 자연하고 당연하게 존재하는 성적 다양성의 한 형태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에게 심대한 위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있는 것 그대로 존중하며 살아갈 줄 안다. 살인이나 식인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타인을 심각하게 해치는 행위이므로 사회적으로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동성애는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오히려 동성애 또는 성적 다양성을 부정함으로 수많은 폭력과 슬픔이 생겼다. 변희수 하사와 퀴어활동가 김기홍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대령으로 전역한 옆집 남자는 자신이 게이임을 숨겨야 했기에, 아내와 아들을 강박적으로 대하고 주인공을 죽여야만 했다. 동성애가 자신의 사회적 존중을 관철하기 위해서 존 프라이어와 같은 결단이 필요한 시대도 아니고, 진화의 무지개처럼 길고 어려운 연구결과가 세상에 나와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또한 우리는 근대 인류문명과 문화에 지대한 공을 세운 동성애자들을 안다. 신경과 교수로서 수많은 저작을 남긴 올리버 색스나, 천재수학자로 불린 엘런 튜링, 그리고 퀸의 프레디 머큐리, 조지 마이클 등등을 우리는 거부감없이 받아들인다. 동성애 또는 성적 다양성은 넓은 시야에서는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 하지만, 그들 각자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 드러나기 두려운 불안에 시달린다.
개인적으로 세상은 교활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름의 구조와 계급을 운영하고 유지한다. 그것은 완벽하지 못해서 누군가의 편리와 부유가 존재하고, 이를 위해 누군가의 고통과 불편을 강요하고 방임한다. 세상의 갈등은 그렇게 존재하다가 결국 터지는 사람들의 불만과 감정들에 배설구를 열어둔다. 의도였을지 아닐지 모를 일이지만, 세상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그 배설구로서 활용한다. 멀리는 2차대전 당시, 나찌가 유태인이나 성소수자들을 학살했던 사실도 있다. 현재의 세상의 구조는 성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남혐과 여혐의 갈등 등을 방관함으로서 구조 자체에 대한 불만을 잠식시킨다. 그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그들임에도,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는 불쾌한 시선을 세상의 구조는 방관으로 활용한다. 세상의 교활함은 그렇게 존재의 존재받지 못함을 먼 산 바라보듯 한다. 구조 자체에 도전하는 계급의 반동을 가라앉힐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잠긴 문을 열고 진료실을 나서는 그는 더 이상 코 속에 막대기를 쑤셔넣고 휘젓는 전두엽절제술을 강제로 받지 않는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동성의 벗은 사진을 보고 반응하면 강력한 전기자극을 받거나 매를 맞는 교정술을 당할 일은 없다. 그에게 내린 진단은 단지 콘딜로마일 뿐, 진단명에 동성애와 관련된 진단을 올릴 수도 없다. 그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는 인격체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불안하다. 밝혀지면 스스로에게 꽂힐 수많은 불편한 시선과 회피의 몸짓들을 두려워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구속될 일은 없지만,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속될 일을 걱정한다. 그런데, 그는 그의 성적 취향을 스스로 만든적도 일부러 그러한 것도 아니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본능의 성향을, 성장하면서 서서히 알았을 뿐이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그를 정죄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느끼는 불안과 초조는 어째서인가. 그 불안과 초조는 누가 책임져주며, 누가 해소해 줄 것인가. 그는 평생 평온해질 수 없는 운명이라고,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