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코로나 시대 동네의사의 소고, 2.

by 전영웅

코로나 시대에 청각장애가 있는 환자들을 마주하는 일은 얼마간의 긴장을 가져야 하는 일이었다. 수어로 대화할 때, 손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상대의 표정과 입모양도 이해의 수단이 된다. 따라서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청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수어통역이 가능한 분들과 함께 진료실에 들어온다. 하지만,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은 말을 하는 나의 무언가에서 나름의 이해와 신뢰를 구하려는 표정이다. 약간의 불안과 경계가 섞인 눈빛은 나와 통역자 사이를 오가다가 어느순간 이해와 안도의 눈빛으로 변한다. 나 역시 안심을 주기 위해,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말할 때의 입모양과 온전한 표정을 보여준다. 청각장애인 혼자 진료실로 들어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경우엔 화면에 타이핑을 하거나 종이에 글씨를 써서 대화를 했다. 환자와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마지막엔 반드시 마스크를 내리고 환자에게 직접 대화하듯 설명을 해 주었다. 청각장애 환자가 알아듣든 말든, 나는 내 입모양과 표정을 온전히 보여줌으로써 환자를 안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covid19 시대에 마스크는 정말 중요한 방역수단이었다. 감염자가 마스크를 쓰면 90% 이상의 감염확산 방지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독감이 유행하는 시즌이 되면 환자는 반드시 마스크를 쓰도록 권유했다. 하지만 최대한 확산을 막아야 했던 covid19 판데믹에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도록 권유했다. 감염률이 5% 정도 더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손씻기, 거리두기와 함께 마스크는 covid19 방역의 가장 기본이자 간단하면서,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마스크를 쓰는 일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얼굴은 동물들과 달리 정치이자 영혼이라고 말한다. 생존과 사회의 유지가 최우선의 목표가 된 판데믹 시대에 이런 주장은 정말 어처구니없다.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헛소리임은 분명하지만 주워담을 내용은 존재한다. 지젝의 말처럼 어른들이야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자리에서 줌으로 영상회의를 하면 서로 충분히 이해하고 대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마스크를 쓴 이후로 아이들이 상대의 얼굴이나 표정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이어지고 있다. 얼굴은 미세한 표정과 입의 움직임 그리고 전반적 분위기를 통해 상대와 이해를 나누고 교감하는 영역이다. 그런 영역이 반쯤 가려진 상태에서 교감훈련이 온전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이런 연구결과는, 얼굴은 정치의 영역이라는 아감벤의 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청각장애 환자를 대하는 나의 마스크내림도 판데믹 시대의 지침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지만, 환자와의 교감과 이해를 위해서는 잠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생존과 사회유지가 최우선이 되어버린 시절을 지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시에 행동과 인식의 변화들이 앞으로의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판데믹은 비닐과 플라스틱이 주종인 1회용 물품들에 대한 우리의 반성을 송두리채 망각시켰다. 기억으로, 우리는 covid19 판데믹 이전에는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회용품 규제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곤 했다. 그러한 선언들과 행동들은 판데믹의 시작과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마스크가 중요해지자 마스크는 품귀현상까지 빚어지며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일회용품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환경과 생존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고민을 시작했다. 공존이 불가능한 채 선택만이 가능한 지점.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에 마스크가 걸린 채 날아다니는 새들과, 바람에 나부끼며 바닥에 나뒹구는 마스크 쓰레기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 쓰고 버려지는 플라스틱이 연간 몇만 톤이고, 바다에 떠도는 비닐과 미세 플라스틱이 해양동물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사라졌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칠 뿐이었고, 발버둥의 하나로 마스크를 비롯한 일회용품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고 버려지고 있었다.


거리두기는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배달 수요가 폭증하면서 배달앱이 활성화되고, 동네엔 배달 오토바이들이 수시로 돌아다녔다.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으면서 안심하고 외식할 수 있는 방법은 배달이었다. 요식업 자영업자 입장에서도 영업제한 방침에 버틸 수 있는 방법은 배달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앱을 켜고 주문을 누르기만 하면 몇십분 내에 집으로 원하는 음식이 배달되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 편리를 위해 일회용품들은 무한으로 생산되고 활용되었다. 음식과 반찬들을 담은 용기와, 일회용 젓가락과 수저 그리고 이를 모두 담은 비닐백 등등, 먹고나면 모두가 버릴 것들이었다. 편리에 이어 간편하기까지 했다. 설거지를 할 이유도 없이 그냥 버리기만 하면 될 일이다. 세상의 시스템은 경쟁과 진화를 하기 마련이어서, 예전처럼 배달음식은 맛이 별로라는 말도 점점 줄었다. 삼겹살 곱창처럼 식당에서 기름 뒤집어쓰면서 구워먹을 일 없이, 거의 같은 맛으로 깔끔하게 배달시켜 먹으니 이처럼 좋을 수가 없다. 배달은 점점 이렇게 활성화되면서, 일회용품 쓰레기는 더욱 폭증하고 있었다. 여기에 지금 환경을 생각하자거나, 일회용품과 쓰레기를 줄이자는 제언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제언들은 판데믹 시대에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 행동지침인 거리두기와 영업제한 등등에 완전히 가려졌다.


편리는 어떻게 누려지는가. 우리는 핸드폰을 켜고 배달앱을 열어 메뉴를 고르고 주문버튼을 누르며 세상 참 편리해졌다는 감탄만을 연발한다. 하지만, 버튼을 누른다고 해서 정말 ‘누구나 편리하게’ 원하는 음식이 눈 앞에 뽕 하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식당 어딘가에서 누군가 조리를 하고, 그것을 배달기사가 픽업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 주문한 이의 집으로 가져다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건당 얼마 하는 배달을 하기 위해 배달기사들은 종일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배달앱 회사와는 상관없는 배달업체에 등록을 하고, 오토바이를 본인 돈으로 구입하고 기타 필요한 장비들을 스스로 구입하거나 임대하여 1인 사장이 된다. 건당 받는 배달료의 얼마를 등록한 업체에 지불하고, 본인의 사고를 대비한 보험에 자비로 가입을 한다. 오토바이의 특성상 사고율이 높다는 점은 자신이 선택한 직업과 넘치는 배달건수 앞에서 고려할 요소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도로와 동네를 질주하는 배달 오토바이들을 목도한다. 정해진 급여가 아니라 건수로 수익이 정해지는 1인 사장의 처지가 되어 한 건이라도 더 처리하려고 위험을 무릅쓰며 배달 오토바이는 과속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위험한 모습에 비난의 말 한마디 보태는데 주저하지 않는 우리는, 그에 대한 일말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문한 음식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고, 배달된 음식에 부정적인 평을 배달앱 상에 올리기를 우리는 간편하게 생각한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 누군가는 그렇게 위험을 무릅쓴다. 편리와 위험의 수위차가 증가하고 각자의 처지의 차이가 늘어난다. 우리가 일부러 의도한 현상은 아니지만, 이에 책임마저도 서로 분리되어 있다 생각하는 일은 파렴치한 일이다. 방역지침에 따른 거리두기와 영업제한이 불러온 일회용품의 무한한 사용과, 이를 위해 발달한 배달시스템의 편리 그리고 편리를 위해 누군가가 감내해야만 하는 위험.. covid19 판데믹은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증폭시켰고, 이에 대한 고민을 망각하거나 애써 외면하는 좋은 이유가 되고 있다.


Covid19 판데믹의 끝이 보이고 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기도 하고 더 이상 길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마스크를 써서 우리는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얻어냈다. 하지만, 마스크는 분명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교감하는 데 있어 분명한 장애가 되고 있었다. 거리두기 방역지침으로 배달문화가 성장하면서 일회용품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것 그대로 쓰레기가 되었다. 판데믹이 종식되고 나면 이에 대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벌써부터 두렵다. 만약에 판데믹이 더 길어지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기간이 더욱 늘어나고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가 세상을 뒤덮은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새 인류의 탄생을 보게 될 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 보았다. 상대를 인식하는 새로운 방법을 갖추고, 넘쳐버린 비닐과 플라스틱으로 삶의 새로운 환경을 개척하는 새 인류의 존재.. 그것이 인간과 문명의 진화로 해석될 수는 있겠지만, 삭막한 모습이 분명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판데믹의 긴 터널 안에 위치한 우리로서 필요한 것은, 망각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일,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는 작고 큰 변화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선사할 것인가 하는 주의깊은 고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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