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코로나 시대 동네의사의 소고, 3.

by 전영웅

‘공공의사는 세금도둑’이란 팻말을 든 후배의사의 모습에서, 나는 절망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의료원에서 일하는, 페이스북으로 알고 있는 어느 외과선생님이 생각났다. 그 선생님은 당시, 외과일보다는 음압병동을 오가며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들을 돌보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그 선생님은 저 팻말에 기분이 어땠을까? 같은 의사집단의 일원으로 무지나 몰이해같은 단어를 철썩 가져다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 전에, 저렇게 말하는 후배의사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주장을 할까 하는 궁금증부터 애써 떠올렸다. 내 짧은 머리로는 알 수 없었다. 공공병원에서 일한 경험은 전공의 시절 4년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는 민간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니, 내가 이렇다저렇다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냥 조금 슬프고, 약간 참담했다.


코로나19 판데믹은 공공의료의 절대적 필요를 깨닫게 해 주는 사태였다. 앞으로 주기적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되는 판데믹 사태에 대비하려면, 가용한 의료인력 의료시설 등등이 국가주도로 준비되는 것이 옳았다. 현재 전체의료자원의 10%도 안되는 공공자원으로 이제까지 방역통제를 해 왔다는 사실도, 쥐어짜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판데믹에 대비한 장기적 보건의료정책을 내놓았다.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정원 확대였다. 공공성의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나름의 기대를 걸었던 정부정책에 나는 어처구니없는 기분만 들었다. 의대증설과 의대정원 증대를 조용하고 꾸준하게 종용해왔던 어느 누구들의 요구에 기회는 이때다 하고 정부가 화답하는 느낌이었다. 판데믹의 위기가 누군가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이제껏 방역통제를 아슬하면서도 잘 꾸려온 정부집단이 내놓은 장기적 대책이란 것이 겨우 이런 것인가 하는 허탈함에, 정책을 내놓은 사람들의 판단력과 사고수준마저도 의심스러워졌다.


우리나라의 의사 수는 2020년 현재 인구 1000명당 2.3명이다. 이는 OECD평균 3.3명보다 분명히 적다. 그렇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는 많다. 우리나라는 의료접근성이 너무 쉽고 환자의 의료부담이 적은 편이다(OECD 평균 GDP대비 1인당 의료비 8.95/한국 7.34). 동네의원의 물리치료만 보아도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환자의 자유로운 병원선택은 환자의 권리차원에서는 당연하지만, 의료비의 과다지출과 의료시스템의 비효율을 만들어낸다. 환자는 원하기만 하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1차 부터 3차 의료기관까지, 어느 병원이든 선택하여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병원간의 자유로운 경쟁은 서로간 소모적 출혈과 피로만 낳고 있다. 상권이 좋다는 지역을 가면 건물 전체가 의원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건물주는 입주희망 1순위가 병의원이다. 이를 통계로 따져보면, 10제곱킬로미터 당 의사 밀도가 OCED 평균 4.6인데 비해 한국은 11.4이며, 국민 1인당 연간 진료 건수가 OECD 평균 7.3회인데 비해 한국은 17.0회이다. 의사의 숫자는 적은데 면적당 의사 밀도와 환자 1인당 진료횟수는 높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시장경쟁 논리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과 한국의료의 수가구조 등등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의료의 문제들이 단순히 의사가 적다는 사실에서만 기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통계만 가지고도 이러한데, 앞으로의 상황은 더욱 암담하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인구 1000명당 의사 증가율은 OECD 평균 1.2%인데 한국은 3.1% 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한국의 출산율은 이미 바닥을 찍고 있고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대학은 현재상황에서도 정원을 채우는 데 버거운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대정원을 늘리고 의대를 증설한다는 정책은 명백히 판단오류다. 사실 정부는 애써 한국의 왜곡된 의료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중인지 모른다. 현장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의료현실은 암담하다. 말 그대로 ‘돈 되는’ 피부성형 분야로는 의사들이 넘치고, 동네의원들은 목이 좋다는 자리에 몰려들어 서로간 경쟁에 내몰려 있다. 필수 의료분야인 외과나 산부인과는 전공의 모집마저도 힘든 상황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지방의료원같은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환경이나 대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의료환경의 대부분을 자유로운 자본경쟁에 방치한 결과는 당연하게도 이러하다. 그렇다면, 판데믹을 대비하는 자세는 적극적으로는 중소병원을 국가가 매입하여 인력과 시설을 확충하는 방법이 있다. 현존하는 공공병원의 시설과 근무조건을 개선하여 의료인력을 유도하는 방법도 있다. 필수의료분야의 환경과 조건을 개선해서 의료인력의 재배치를 유도하는 것이 옳다. 현존하는 의료자원의 재배치와 개선으로 공공의료비율을 우선적으로 높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현재의 판데믹과 앞으로의 대비를 위한다면, 국가의 존립과 국민을 책임지는 빅브라더의 역할을 유지하려면, 그렇게 의료가 국가구조의 한 축임을 자각한다면, 어떻게 정책을 세워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의사 수 증대나 의대증설은 왜곡된 의료구조의 개선 이후에 고려해 볼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의사집단은 여기에 엉뚱한 방식으로 대립했다. 의사 수 증대와 의료증설에 반대하면서, ‘공공의사는 세금도둑’이라고 했다.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을 공공성 회복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밥그릇싸움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왜곡된 구조 아래서 자유로운 경쟁이 서로의 생존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의료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 주장을 내세워서 비판에 스스로의 정당성을 깎아내렸을까.. 비판은 판데믹 상황 앞에서 무력해지고 버거워하는 방역시스템과, 이런 상황을 자초한 이제까지의 의료정책에 대한 지적과 반성에서 시작되어야 했다. 의사 수 증대가 어째서 부당하거나 합리적인 정책이 아닌지는 그 다음에 내세울 지점이었고, 공공성 회복이라는 의료의 당연한 기능과 위치를 좀 더 부각시켜야 했다. 정부의 장기적 방역대책은 정말 무지에 가까웠고 어떤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그런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정책에 의사집단의 어처구니없는 대응은, 의사인 나로서도 지지는 커녕 허탈함만 가득 느꼈다. 전공의들이 나서고 본과생들의 국시거부가 이어질 때까지, 저항을 논리와 행정력으로 뒷받침한 선배의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일말의 부끄러움도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의 방역체계가 그나마 잘 작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는 데 있어 거부감이 덜했던 이유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방역정책에 대한 인식적 협조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마스크를 쓴다는 것은 스스로의 익명성을 늘린다는 점에 있어 사회적인 불안요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방역초기를 생각해보면 방역은 사람들의 인권을 상당한 수준으로 침해하고 있었다. 확진되어 번호가 붙은 사람은 cctv와 카드사용내역 등을 국가가 파헤침으로 곧바로 동선이 드러났고, 동선은 사람들의 핸드폰 문자를 통해 모두에게 통보되었다. 판데믹 상황이 아니라면 심각한 인권침해의 모습이었고,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어느 누구든 의도한 대로 통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판데믹 상황이라는 전제 하에 이러한 국가의 ‘나름의 폭력적인 방법’을 아무 말 없이 용인했다. 여러 인권단체의 지적이 있었고, 정부기관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하여 이러한 폭력적 방법은 수위를 점점 낮추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디서나 우리를 바라보며 때에 따라서는 통제가 가능한 빅브라더의 시선을 알게 되었고, 그 존재를 인식하며 살게 되었다.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 그리고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예지는 옳았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시절을, 우리는 살아가는 중이다.


판데믹은 우리가 국가의 기능과 권한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아니, 현시절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유와 인권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국가의 권한을 조절하고 비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거미줄처럼 깔린 통신시스템과 각자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이라는 편리에 우리는 감탄한다. 그런데 그 편리는 실은 중독이며, 중독에 당연히 따르는 망각에 우리의 자유나 인권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내 주고 편리를 누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이 판데믹의 상황하에서 우리의 생존을 어느정도 보장해 주었음을 생각해보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국가의 통제권력 사이에서의 합리적인 대립점은 어느 지점일지, 어렵고 혼란스럽다.


신속항원검사를 진행하면서,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보건소에서 문자가 오겠죠?’ 라고 묻는다. 양성환자들을 병원에서 시스템에 등록해주면 보건소에서 문자를 보내주니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양성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국가가 정한 일주일 자가격리를 스스로 그리고 성실하게 실천한다. 일주일간의 자가격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에는 의학적 이유와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각자의 다양한 여러 이유들이 존재한다. 그런 합리적인 이유로 방역통제는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진다. 시스템에 의한 통제는 그렇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삶에 녹아들었다. 필요하기도 하고, 합리적이며 편리함을 인정한다. 그런데, 시스템의 통제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를 불합리하게 붙들어 맬 수 있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한다. 아니,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런 생각은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와 너무 복잡한 시스템에 질려서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인지 모른다. 지젝은 판데믹의 상황에서 너무 많은 지식과 그로 인해 너무 많은 통제가, 바이러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의지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지금의 우리는 그러한 상황이고 따라서 무의식적으로 시스템에 순응하여 더 이상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상태인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스럽게 국가의 통제를 수월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통제와 자유의 적절하고 합리적인 대치선은 단정짓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친다는 이유로 생각하기를 포기한다면, 우리의 자유와 인권은 합리적인 선을 넘어 또는 심각한 수준으로 침해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피곤한 일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단순한 사실은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됨을 깨닫게 한다. 판데믹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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