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들을 마주할 때

by 전영웅

전화를 받던 외래 간호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시구요, 나중에 직접 오셔서 결과 확인 하세요!”


거칠게 전화를 내려놓는 간호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술에 취한 어떤 여자가 전화로 6개월도 더 지난 자신의 검사결과를 물어보더란다. 전화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없다고 말했더니 상대는 갑자기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나는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말라며 다독였다. 사실 이와 비슷한 일은 너무 많아서 짜증을 내던 간호사도 이골이 나 있는지 몇 번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무렇지 않게 일을 이어나갔다.


종종 다루기 힘든 환자들을 마주한다. 응급실에서는 더욱 자주 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채 자신의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치료해 달라고 떼를 썼다. 증상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힘을 써서 제지하지 않으면 다른 환자들에게도 피해를 줄 난동환자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외래 진료실로 들어와서는 한 달 전에 부러졌던 갈비뼈가 어떻게 되었냐며 막무가내로 진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첨언하자면, 종종 발생하는 응급실 내 폭력이나 난동은 여기서는 포함하지 않는다. 이는 의료인에 직접적인 위해와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는 점에서 극단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또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폄훼하거나 업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무례함이자 범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최저선에 가깝게 내려앉은 자존감을 거칠고 무모하게 또는 술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 끌어올려보려는, 삶이 노곤한 사람들이었다.


병동에서도 조금은 결이 다른 느낌으로 비슷한 환자들을 만난다. 입원을 시켰지만, 자신의 몸상태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지시에 따르지 않고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다. 또는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가 환자의 병에 대한 인식이 없거나 이해하지 못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질문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게 한다. 어떤 환자나 보호자는 상태에 대한 설명이나 이해와 무관하게, 본인의 판단대로 이런저런 처방을 요구하기도 한다.


주치의는 난감해지고 힘이 빠진다. 아무리 신경쓰고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노력에 비해 결실은 없는 짝사랑같은 고민만 하게 된다.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 나 역시 인간인지라 그런 일들이 점점 쌓이다보면 짜증이 생긴다. 낮고 부드럽게 나오던 말이 어느새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높아진다. 결국엔 높은 목소리로 환자나 보호자를 나무라고 만다. 또는 퇴원을 요구한다. 여러 이유로 자기통제를 포기한 사람들과 소위 무지렁이 상태의 사람들.. 환자를 진료하는 입장에서 가장 상대하기 곤란하고, 의사로 하여금 자괴감과 짜증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피하거나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든 수없이 존재해왔고,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를 무조건 대해야만 하는 의사는 이런 사람들을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사실, 진료 후 그저 지나갔다는 마음으로 한 숨 한 번으로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나중에 문제를 만들어 나를 힘들게 하지도 않는다. 소위 뒤끝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의 꼬리에 매달려 잘 떨어지지 않았다.


시선은 언제나 인식을 수반한다. 시선이 가 닿은 곳에서는 판단이 만들어지고, 판단은 시선의 주인이 가진 인식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만난 그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무지의 상태에서 방치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시선을 가장 단순하게 보낸다면, 그들은 단지 귀찮거나 상대하기 싫거나, 마주한 후에도 그냥 보내고 나면 그만인 사람들이다. 자기통제의 상실과 무지렁이 상태는 자신이 진료를 잘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의 판단도 불가능하다. 그러니, 진료를 받고 나면 그들도 그만일 뿐, 후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평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에 가 닿은 시선에 약간의 인식 또는 생각을 얹으면 판단은 많이 달라진다. 그들은 그들이 그런 삶을 살겠다 택한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인 삶의 요소들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배척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또는 자의와 상관없이 세상의 흐름 언저리로 밀려나 존재를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보장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그들의 삶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고, 그것은 가슴 한 켠의 분노로 키워지며 방향을 잃은 채 어디론가 투사되고 있는 것이었다. 방향을 잃은 분노가 진료실이나 응급실에서 투사되었을 때, 그렇게 잠시 타오른 그들의 존재감이 다시 재가 되어 아무 의미도 거머쥐지 못할 때, 나는 즉흥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들을 상대하고 다루었다.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들은 내 앞에서 사라졌지만, 내 생각의 끄트머리에 그들의 흔적은 매달려 남아, 하나의 인식을 만드는 구성물이 되었다.


조지 오웰은 그의 자전적 소설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노숙자나 부랑자들은 위험하거나 불결한 존재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들은 보통사람들과 같은 평범하고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라 말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는 추운 겨울날 하수구 바닥을 긁고 있는 빈민가 젊은 여인과 마주친 눈빛을 이야기한다. 그 눈빛은 ‘우리는 스스로 이러한 원치 않는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계급적 위치 때문에 발생하는 비인간적인 불평등은 위선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결론내린 이러한 상황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80여년 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조금은 다를 수 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상황들을 자주 마주하거나 목도한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의 현실이었다. 누구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엄연함이기에 목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어지는 결론은 사실 막연하다. 세상의 구조와 인간의 인식은 생각보다 복잡하면서도 다양하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은 여러 상황을 만들어내고, 고민의 깊이보다는 피곤함부터 만들어낸다. 설령 고민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해도, 행동이나 실천은 더 복잡하고 어렵기만 하다. 나 하나가 그래서 그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는 있을까? 그저, 그들을 만난 후의 짜증을 마음 속으로 누르고 최대한 자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밖엔 없다. 그럴 수 있는 ‘자의식’만이 당장의 방법일 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의식이 점점 소멸되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나만 아니면 되고, 소수자들이나 약자에의 폭력이 난무하며, 배려없는 이기심이 점점 부피를 키우는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만났던 그들은 더욱 더 짜증과 무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진료실은 그렇게 생각의 터전이 된다. 마주하고 생각하며,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현실을 압축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다. 답을 낼 수 없지만, 어떤 인식의 틀을 만들어야 하는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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