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을 연달아 죽음을 마주했다. 출근길, 무료함과 지겨움을 안고 질주하는 도로 위에서, 내 눈은 전방만을 주시하지 못한 채 그 죽음들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한참 잘 달리던 앞 차들이 갑자기 브레이크 등을 밝히며 속도를 줄였다. 평소에도 좀 밀리는 구간이긴 했지만 유독 심하게 밀리는 날이었다. 사고가 났나 싶은 마음으로 앞차의 꼬리를 물고 서서히 따라가는데, 중앙선 너머 맞은 편 1차로 저 멀리에 경광등을 반짝이며 경찰차가 서 있었다. 사고가 나긴 난 듯 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경찰차 앞 도로 위에 무언가가 파란 방수천으로 덮여있고 주변으로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살점이었다. 덮여있는 것이 사람인지 아니면 동물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장과 점점 가까워지며 바로 옆을 지날 때엔 그것이 사람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머리에 치명적 손상을 입고 사망하며 떨어져나온 두피의 살점이었다.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처참한 현장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에서 수많은 처참함을 마주했었지만, 그런 공간이 아닌 바깥에서 수습되지 않은 처참함을 마주한다는 건 나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날엔 출근길의 대부분을 비상등 켠 장례행렬 차량과 함께 달렸다. 맨 앞으로 고급차를 개조한 검은 영구차가 달리고, 미니버스와 승용차 몇 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함께 달리고 있음을 알게 해 주는 도로 위의 유일한 신호는 그들의 비상등이었다. 비상등 켠 장례행렬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트레일러 같았다. 보이지 않는 경계로 둘러쳐진 듯 해서, 비상등 사이로 끼어들지도 못하고 추월하기도 어색했다. 출근길의 번잡함이 그들의 행렬과 나의 질주를 비슷하게 만들었다. 구름낀 겨울 하늘은 흐렸고, 어둠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은 이른 아침의 축축하고 을씨년스러움에 비상등 불빛은 더욱 도드라지게 바짝였다.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불빛에 무거운 시선은 중독되듯 빠져들었다.
죽음의 순간이 궁금해졌다. 어떤 기분일까.. 보행신호등과 도로 위 건널목 흰 선이 그어진 곳이 아닌, 차들이 질주하는 공간에서 아무렇지 않게 발을 내디딘 누군가는 죽음을 원했던 것일까? 차들의 그의 몸을 들이받고 튕겨내며 몸이 부서지는 순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참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생명의 모든 신호를 소실한 채 길바닥에 누워버린 그 순간의 그는, 편안했을까? 몸에 딱 맞는 관 속에 누워, 뒤따라오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는 죽음은 행복할까? 혹시 잠시나마의 의식이 허락된다면, 자신이 누울 곳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그는 무슨 생각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의 이별을 만들어가고 있었을까?
내가 품은 죽음에의 의문은, 답을 알 수 없다. 나 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찰나의 순간, 생명의 모든 신호가 꺼진 이후의 모든 것들은 당사자들만 알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결국 산 자의 해석이자, 산 자에게 역으로 주어지는 존재감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의 무게에 대응하는, 산 자가 부여하는 상대적 무게이다. 도로 위에 아무렇게나 눕혀진 시신,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도로를 달리는 차가운 몸, 그리고 오래지 않은 얼마 전에 모습 그대로 봉긋한 무덤 아래 누운 나의 친구.. 모두 다 살아있는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들이다. 망자의 의식은 그런 나를 어떻게 바라볼 지, 살아있는 것들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는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생명의 움직임을 소실한 도로 위의 시신, 누군가의 마지막 여행 옆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 출근이라는, 삶의 몸부림인지 현실과 구조가 강요하는 몸부림인지 알 수 없는 지겹고 무료한 행위를,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꾸역꾸역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서 빨리 지나가라는 교통경찰의 흔들리는 경광봉은 마치, 동료의 죽음에 애도따위는 필요없으니 어서 하던 일이나 해 나가라는 노예감독관의 윽박지름 같았다. 노예.. 어쩌면, 어떤 형태로든 삶을 마무리한 망자의 의식은 우리를 아직 해방되지 못한 노예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다. ‘홀가분 하신가요?’
죽음을 앞에 두고 두서없이 나열하는 나의 말과 생각은 그저, 산 자의 영역에서 나열되고 있었다. 내가 밥벌이에의 지겨움과 무료함과 피곤함을 가지고 있던 말던, 내가 우리가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건 아니건 간에, 죽음은 산 자의 말들로 채워진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역시, 아직 세상을 살고 있는 인간의 일방적 행위와 판단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가끔, 그것이 온당한가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수없이 많은 로드킬과 도로에 널부러진 한 인간의 부서진 몸뚱아리엔 차이가 있는가, 망자를 떠나보내는 의례에 우리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은 좀 더 진전한다.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을 올려놓는 산 자들의 삶은, 부여한 의미만큼의 가치를 온전히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출근길의 생각은 주차와 함께 끊겼고, 나는 진료실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약을 처방하고 주사를 놓아준다. 망자는, 그리고 망자가 부여했던 수많은 생각들은, 엉킨채 굴러가는 삶의 실타래에 치여 마음 한 켠에 작은 흔적만을 남기고 존재를 잃는다. 죽음은 생각보다 빨리 잊히며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숨을 쉬며 또렷한 의식을 유지하는 동안, 나는 산 자들이 망자들을 쉽게 ‘망’하는 모습을 보았고, 죽음에 무례함을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 모습은 마치, 세상은 산 자들만의 것임을 악착으로 고집하는 몸부림같아 보였다. 나는 모른다. 세상은 정말 산 자들만의 것인지를.. 죽은 자들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악착에 무어라 할 수 없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가진 본연의 몸부림인지, 구조가 강요하는 쳇바퀴의 비정한 순환계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연 이틀간의 이른 아침에 느꼈던, 나의 무거운 기분도 쉽게 사라졌다. 안타까움, 궁금함, 계속 가야한다는 강박, 산다는 것의 무거움과 비루함, 달리는 차 안의 내 몸뚱아리와 도로 위에 누운 몸뚱아리의 존재감.. 나는 모르겠다. 쉽게 사라진 많은 것들을 의식하는 건, 숨이 붙은 내가 본능처럼 버둥대는 순전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세상의 구조에 묶여 굴러가며 익숙해지는 무뎌짐과 희미함에 저항하는 가슴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연한 죽음을 이틀 연속으로 마주하면서, 내 가슴 속에 있던 실체를 알 수 없는 기분과 의문들, 그것들이 비집고 내 머리로 들어와 감정과 생각을 뒤집어놓았다. 생각이 제대로 뒤집히고, 감정은 차분히 환기되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