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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Jan 11. 2023

갈릴레이의 현실과 나의 가난

 나는 가난한 줄을 모르고 자랐다.  도심 한복판 거미줄같이 얽힌 골목 어느 줄기의 끝자락 집, 연탄을 때는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여섯 식구가 아웅다웅 살면서도 나는 우리집이 가난한 지 잘 느끼지 못했다.  워낙 눈치가 없기도 했지만, 내 주변의 이웃들과 친구들은 나와 사는 모습이 비슷하거나 나보다 좀 더 못사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지붕 낮고 대문 낡은 엇비슷한 집들이 올망졸망 줄지어 선 동네의 골목 안으로는, 사람 말고는 새벽의 쓰레기 수거하는 리어카 정도가 가끔 다녔다.  워낙 좁은 골목이라 그 리어카와 사람이 마주치면, 사람은 담벼락으로 바짝 붙어서야 리어카 바퀴에 신발이 끼이지 않았다.  그 외에는 아이스크림을 담은 통이나 야쿠르트를 담은 가방을 실은 작은 수레가 골목을 돌아다녔다.  기름으로 움직이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보려면 한참을 걸어서 골목을 벗어나야 했다. 


  잘 느끼지 못했던 가난에 대해 뭔가 야릇한 이질감으로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입시 때였다.  나름 공부 좀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친척 분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외국어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러 올라가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말의 추운 겨울로 기억한다.  정릉에 있는 그 학교에 가려면 언덕 아래서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야 했다.  버스에 올라탄 나는 어쩌다 맨 뒤 좌석의 가운데 앉게 되었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던 것이 버스 안의 또래들이 나를 한번씩 힐끗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다들 형형색색의 겨울외투와 나름대로 머리를 단장한 세련된 모습들 사이에 나 혼자 칙칙한 황토색 외투에 머리는 거의 빡빡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방도시 한복판의 슬럼가에 사는 촌뜨기가, 돈 좀 있는 아이들이나 시험봐서 들어가는 사립 외국어 고등학교에 간다는 일이 모습부터 가당찮은 일이었다.  시험에는 합격을 했다.  그러나 합격통지서와 함께 날아온 입학비 내역은 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고, 어머니는 냉소에 가까운 잔소리로 잠시의 기쁨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시내에 배정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야릇했던 이질감은 꿈꾸던 환상이 무너지면서 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느낌은 여전히 남아 종종 나를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오래된 학교건물 교실을 개조해서 만든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3년을 보냈다.  교실 하나에 이층침대 8개를 놓아 한 방에 16명이 같이 생활하는 방식이었다.  말이 생활이지 학교에서 기숙사로 오면 바로 도서실로 들어가 공부하고 시간되면 침대로 들어가 잠을 자는 단순한 일상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단순한 일상을 산다는 것은 각자의 모습이 무뎌지는 일이다.  특히 누가 잘 살고 누가 못 산다는 그런 이야기는 언급은 커녕 의미조차 없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엉겨붙어 공부하고 밥먹고 잠을 자다 가끔 운동장에서 운동하는 그런 단순함 속에서 엇비슷함으로 결속하며 3년을 보냈다.  


  의대에 합격했다.  1지망 의대는 떨어지고, 2지망 의대에 합격대기 몇 번으로 기다리던 중, 재수를 위해 서울의 학원을 알아보던 때였다.  집에서는 벌써 내 재수비용에 대해 한탄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합격소식이 날아와 다행이다 싶었지만, 당시에도 사립의대는 등록금과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아버지 회사에서 학비의 70퍼센트를 지원해주어 공부는 이어갈 수 있었지만, 생활비는 되도록 내가 벌어야 했다.  나는 실험실 알바도 하고, 과외알바도 했으며, 방학때에는 집에 가지 않고 할 수 있는 알바거리를 찾아 일을 해 나갔다.  공사현장일을 경험한 것도 그 때였다.  자취방은 되도록 저렴한 곳을 찾아 계약을 했고, 식비는 학생식당 티켓을 달마다 미리 구입해두고 끼니를 해결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은 최대한 아껴야 해서, 학교가 있던 도시의 시내 웬만한 곳들은 대부분 걸어다녔고, 많이 멀다 싶은 곳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내가 가난한 집 사람임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 그 때부터였었다.  의대에 다니는 동기들은 다들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표정에 자신감이 있거나, 분위기가 좀 더 세련되어 보였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내가 따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위축되거나 자괴감에 빠지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같이 어울릴 때도 내가 평소에 놀던 방식이나 분위기와는 어딘가 달랐고, 간간히 보여지는 개성이나 특기 역시 나로서는 생각지 못했던, 그들의 몸에 배인 것들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세상은 내가 알던 사람들과는 다른, 내가 모르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가난은 시야를 가렸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이게 했다.  그게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겐 그랬다.  방학이면 서울에서 내가 살던 동네의 할머니 집으로 놀러오던 형과 누나가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어울리는 것을 짜증내했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옷차림이 우리보다 조금 깔끔했을 뿐,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또래인데 왜 저리 유세를 떠나 싶었다.  우리는 엇비슷한 환경에서 엇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엇비슷하게 놀았다.  엇비슷하게 놀다가 어쩌다 한 아이가 들고 온 새로운 장난감 같은 것을 보게 되면, 부러워하며 한 번 만져보게 해 달라 졸랐고, 엄마아빠에게 나도 사달라고 조르다 혼이 났다.  그 과정 역시 동네 아이들마다 엇비슷하게 겪는 일이었다.  우리는 가난이라는 영역으로 한정된 공간 밖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보았다 하더라도 그저 신기한 풍경일 뿐이었다.  


  가난은 조용했다.  가난은 소문내는 일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모두가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게 아님을 깨닫고 난 후에는, 나는 그저 조용하게 보냈다.  공식적으로 모이는 일 말고는, 모임 자체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어서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나는 나대로의 생활과 학업을 꾸리는데 집중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 만으로도 바빴다.  재시로 방학의 대부분을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면서도, 재시 전날 저녁의 과외수업 때문에 내가 가르치던 학생 집까지 30분을 걸어서 다녀와야 했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은, 나처럼 가난하게 공부한 동기들이 꽤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도 조용했다.  조용히 일하고 과외수업해서 용돈을 벌었고, 식권을 살 돈이 없어 식권 하나로 식판에 밥을 그득 담아 둘이서 먹는 일도 심심치 않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월세 낼 돈이 없어 임시로 친구 자취방에 더부살이 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했다.  가난은 그렇게 입을 다물게 했고, 각자 조용히 알아서 일상을 살게 했다.  그래서 가난은, 같이 가난한 사람들조차 서로를 알 수 없었다.  서로가 비슷한 처지를 재미난 과거 회상하듯 나누던 때는 힘들던 학생시절을 지나, 의사가 되고 각자의 수련자리에서 주머니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고 난 뒤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가난은 추억으로서 스스럼없는 이야기거리가 될 수 있었다.  여전히 힘들거나 수련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동기들은 이야기의 자리에 끼지 못했다.  스스로 자리를 피했다.  아픈 동물이 스스로 구석으로 숨어들어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있듯 말이다.  


  어릴적의 가난과,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여유를 갖지 못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내가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은 천운이었다.  물론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기초의학을 하려고 입학했다가, 기초의학을 전공하려면 학비가 의사면허 취득보다 더 많이 든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했다.  그 순진한 목적과 현실적 포기가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입을 버는 의사였기에, 나는 수련을 마치고 봉직의를 하며 모은 돈으로 지금의 땅을 사고 대출을 받아 집을 지었고, 다시 모은 돈과 추가대출로 뒤늦게 개원을 할 수 있었다.  나름의 원하는 일상과 원했던 삶의 수순을 밟아나갈 수 있었다.  여전히 현실적인 계산은 못하지만, 그럼에도 원하는 삶의 이상을 어느정도 채워나갈 수 있는 처지를 다행으로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가난에의 경험은 외롭고 피하고 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한정된 시야가 고정해 준 시선의 뿌리가 되었다.  나의 처지는 이제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세상에 대한 나의 시선은 여전히 살짝 낮은 각도를 유지한다.  그것은 가난에 대한 연민이나 어떤 의무같은 것이 아니다.  경험에서 비롯한 자연스러운 공감같은 것이다.  익숙하고 친근함 같은 것이다.  공감과 익숙함이 자연스러워지면, 좀 더 좋은 것들이나 좀 더 여유롭고 풍족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다.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에 뿌리를 둔 시선은 그렇게 절제의 사고를 맺어낸다.  자본주의라는 풍요와 성장의 구조에서 나 같은 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들 무엇이 변할까 싶지만, 적어도 내 스스로의 삶은 경박하지 않고 가볍지 않은 모습으로 가꾸어 갈 수 있는 힘으로 뭉쳐진다.  그래서, 삶의 많은 부분을 내 스스로 꾸려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은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많이 대단하지도 않고 현실의 운도 많이 따라주었지만, 내가 만든 지금의 내 모습은 나의 자존감만큼 탄탄하고 예민한 자부심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파도바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나, 빠듯한 보수로 가족과 여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살림을 꾸려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연구를 거듭해 당시 망원경의 20배나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만들어냈다.  그 망원경으로 목성을 관찰하여 위성이 4개가 있음을 발견했다.  현실적 판단을 해야 했던 갈릴레이는 목성의 네 위성을 메디치 가문의 코지모 2세 대공에게 헌정함으로써 연구의 후원자를 만들었고, 자신은 당시의 학문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철학자가 되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꾸준한 노력을 하고, 현실적 판단으로 당시의 학문적 우위에 서게 된 갈릴레이의 일화를 읽었더니, 문득 나의 가난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갈릴레이와 조금은 다르지만, 나도 나름의 노력과 현실적 절차를 밟아 여기까지 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돋아버린 생각의 가지들을 글로 풀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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