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직전의 어느 해, 나는 아내와 교토의 철학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수로를 따라 벚나무가 울창한 소로를 걸어가면, 은각사로 올라가는 언덕길로 이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주변의 집들이 궁금했다. 2층 주택들이 모여 있는 동네는 조용했다. 벚꽃이 떨어진 지 한참 지난 늦봄의 오후 햇살이 그대로 동네에 쏟아지는데, 사람은 많아도 이상하게 동네는 조용한 느낌이었다. 문득 이런 동네에서 한 달 정도 살아보면 어떨까? 욕심은 일 년을 살까 싶은 생각이었는데, 현실이 머리를 치면서 입 밖으로 나온 소리는 ‘한 달 정도’ 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작은 결심을 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병원을 그만 두게 되면, 적어도 6개월은 쉬면서 해외에서 두 달 이상은 살아보기로 말이다. 그 중 한 달은 교토의 이 동네로 알아보기로 작정했다.
한 달 살이를 생각해 본 이유는 단순히 그 동네가 좋아보여만은 아니었다. 사실 철학자의 길은 세 번째 교토 여행의 일정이었다. 나는 교토가 너무 좋아서 일본 여행은 교토 여행과 같은 말이었다. 4박 5일의 일정이라면, 쇼핑을 위한 오사카 1박을 제외하고는 바로 교토로 하루카 라인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어디든 걷거나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어디든 헤매었다. 그런데, 다닐수록 갈증이 났다.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이 도시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여행은 교토만을 고집했고, 교토의 유명하다는 곳은 거의 다녀봤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알 수 없는 뭔가가 가슴 안에서 일었다. 좀 더 알고 싶다는 어떤 욕구, 그것이 내 가슴 속에서 끓는 점에 가까워졌을 때, 그 동네를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 자리에서 오래 살아보는 여행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끓어올랐다.
해외여행을 많이 해 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몇몇 곳을 다니면서 여행지는 인상에 따라 내 나름의 둘로 나뉜다. 시간을 두고 찬찬히 둘러보거나 그 곳에서 무언가를 해 본 여행지와, 유명하다는 여행지나 맛집을 단순히 보고 경험하고 돌아온 여행지로 나뉜다. 전자는 여전히 내 인상에 깊게 남아있으며 또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이지만, 후자는 다시 가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여행지들이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반드시 가 봐야 할 곳, 반드시 먹어야 할 것들에 대한 욕구가 없는 편이다. 그래서, 가서 보고 듣고 먹어 본 것들에 대한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곳에서 인상깊게 보거나, 직접 해 본 것들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와 미국에서는 직접 차를 몰고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와 집에서 요리를 했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 동시에 그 곳에서 했던 낚시들에 대한 추억도 여전하다. 그러니까 그 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렇게 살아 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해외에 사는 친척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 보는 일은 남다른 경험과 생각을 건넨다. 사람들의 모습과 건물과 동네의 풍경, 마주하며 건네는 말들, 그리고 어울려 먹는 음식들.. 그것은 관광지의 그것들과 확연하게 다르다. 식당에 들어서면 주인이나 직원의 약간은 나이브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은 그들의 사는 모습의 한 조각을 눈치채게 한다. 마트에서 직접 식재료를 고르면서, 진열대에 쌓인 채소와 고기가 우리나라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일도 큰 재미이다. 그것이 어떻게 조리되는지,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담아 쇼핑하는지, 어떤 사람들이 주로 이 동네 마트에서 쇼핑하는지 둘러보는 일도 소소한 재미다. 그러다 마주치며 하는 눈인사나 몇마디 잠깐의 대화에서, 우리와는 다른 여유나 스트레스를 알아가는 일도 새롭다. 동네사람들이 쉬는 날 자주 찾는 공원이나 해변에 가서 같이 거닐거나, 가까운 카페에서 그들이 마시는 것들을 같이 마셔보는 일도 좋았다. 여행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계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게 일반적인 여행지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긴 시간이 허락되어도, 여행자는 결국 사람들이 많이 추천하는 관광지나 식당 등등으로 향하기 마련이다. 숙소는 안전하고 편한 곳을 찾는다. 여행자는 그림자가 없는 존재라고 했다. 환대받지만, 성원으로서 존중을 받지 못한다. 그림자가 없는 존재는, 함께 어울리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차별을 겪는다. 그 사실에 대한 조심과 두려움이 여행자와 원주민 사이의 경계를 만든다. 한 달 이상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그 곳에서 나의 그림자를 만들어 보는 것, 사는 사람들과의 비슷한 경험으로서의 그림자를 만들어 공간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것, 나는 그런 여행을 갈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코로나19 판데믹은 3년 이라는 시간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나는 그 사이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겨우 2개월을 쉰 다음 서둘러 개원을 했다. 쉬었다는 2개월도 개원준비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여행이라고는 3일 정도 고향을 서둘러 둘러보고 오는 국내여행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제는 국경봉쇄도 많이 풀려서 2023년의 설 명절을 앞두고 해외로 나가보자는 아내의 은근한 부추김이 있지만, 나는 그리 당기지 않았다. 다시 교토를 가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그러나, 이제 막 빗장이 풀린 곳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와, 3일을 쉬기로 한 설 일정이 너무 짧아 유명한 관광포인트만 돌다 올 것이 뻔할 것 같아 이번 설 연휴는 집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사림의 대표격이었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은 15세기 후반, 18일간의 지리산 기행을 두류견문록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선비가 태어나서 박이나 외처럼 한 지방에 매여 사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며 자기가 지은 시문들을 쌓아놓지 못할진대, 제 고장의 산천쯤은 마땅히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박이나 외처럼 매여 사는’ 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다. ‘천하를 두루 구경하며 자기가 지은 시문들을 쌓아놓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 나는 가는 곳마다 ‘박이나 외처럼 매여 사는’ 여행을 감히 욕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형성된 성정은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적어도 한 동네에 최대한 오래 머물면서, 가만히 동네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고, 동네 작은 식당이나 카페에 가서 음식을 먹거나 가만히 앉아있다 오고 싶다. 동선을 최대한 줄여 서두름 없는 걸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가끔 마주치는 동네사람과 몸짓 발짓이라도 몇마디 주고받으며 사람을 느끼고 싶다. 그것이 진정한 여행의 모습임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그 고집때문에, 이번 설 명절은 그냥 집에 있기로 했다. 집에 있으면서, ‘제 고장의 산천쯤은 마땅히 둘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하루는 낚시를 하고, 하루는 반려견 라이를 데리고 가보지 않은 올레길이라도 걷고, 하루는 집에서 요리 정도 할까 싶다. 그것이 감흥없이 정해진 곳 찍고 다니는 여행보다는 나을 것임을, 적어도 나에겐 그러할 것임을 확신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여행에의 갈망이 있다. 아직 가 보지 못한 유럽과 호주, 일본의 다른 곳들과 캐나다의 자연들, 그리고 내가 가 본 동남아의 일상들.. 설령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그림자가 없어도, 잠깐이라도 숨통을 트이는 그런 기분을 원하며 국경을 넘을 것이다. 길거리 카페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반나절이라도 여유를 즐겨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할 갈증에 대한 해법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시간은 점점 내 편이 아닐 것인데, 나는 현실에 매어 스스로의 갈증을 해소할 마땅한 결심은 커녕, 생각조차도 못하는 것이다. 제 고장의 산천을 열심히, 마땅하게 둘러보는 일이 최선의 대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