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4) - 기억(1)

by 전영웅

내 기억의 시작은 수술방의 무영등이다. 여섯개의 네모난 불빛이 드러누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순간 어느쪽 불빛인지 모르겠지만, 불빛 두어 개를 가리는 얼굴이 시야로 불쑥 들어왔다가, 잠시 나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얼굴을 할머니 얼굴로 기억한다. 훗날 만난 어머니는 내 기억을 듣고는, ‘너를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은 나 혼자였어.’ 라고 말쑴하셨다. 그러니 내 기억은, 기억능력이 없었던 아기시절의 작은 트라우마가 일깨운 꿈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기억의 일부가 조금 틀어진 것일 수도 있다. 내 배꼽 주위에는 사방으로 네 개의 작은 흉터가 있다. 지금은 하나가 사라져 세 개가 되었다. 나는 태어나면서 탯줄 자른 부위로 감염이 되어 배꼽 아래로 농양이 생겼다고 한다. 뱃속의 고름을 빼내기 위해 무영등 아래 수술대 위에 누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금암동에 있는 어느 산부인과라고 했다. 일을 나서는 아버지와 나를 임신하고 있던 어머니의 첫살림은 금암동이었다. 나는 금암동에의 기억이 없다. 조금 자라서 어른들의 손을 잡고 걷다가 잠깐씩 뛰어다니고, 앳된 목소리로 ‘네’라는 대답을 곧잘 하던 어린시절이 되어서야 금암동은 파편같은 기억으로 저장된다. 지금은 넓게 뻗은 기린로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덕진 쪽에서 시내방향으로 오는 길은, 금암동에서 도로 한가운데 둥근 분수를 만나서는 팔달로와 태진로로 갈라졌다. 그 분수를 길 옆 인도에서 구경하다가 금암국민학교 맞은편으로 올라가면, 큰어머니가 운영하는 작은 미용실이 있었다. 어른들은 내 손을 잡고, 큰어머니의 미용실에 들러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다시 내 손을 잡고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오곤 했었다.


기억이 비교적 선명하게 시작되는 곳은 남노송동이다. 골목이 깊고 복잡했던 산동네였다. 버스를 타려면 골목골목을 따라 내려와 버스종점인 신작로까지 족히 15분은 걸어야 했던 복잡한 동네였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도 산기슭에 가까운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우리집도 아니고 세들어 살던 단칸방이었다. 세멘트로 덮은 좁은 마당에 처마가 있는 주인집을 옆으로 돌아 구석진 축대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작은 방 하나가 우리 집이었다. 골목을 따라 담장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도로까지 이어지는데, 우리집에서 산쪽으로는 그런 집들을 두세집만 지나면 바로 텃밭과 숲이 시작되었다. 그 산이 기린봉이었고, 거기서 나는 죽은 비둘기를 무서워했고, 초봄이면 어머니는 동네 할머니들을 따라 쑥을 캐곤 하셨다. 용돈이 생기면 과자를 사 먹겠다고 신작로에 있는 수퍼까지 내달렸다. 거미줄같은 복잡한 골목이었지만, 방향이나 길을 틀리는 일은 절대 없었다. 복잡한 골목 중간에 수퍼가 하나 있었다. 낮고 좁은 문턱 안으로 머리에 수건을 두른 할머니가 장판깔린 작은 방에서 티비를 보다가 손님이 오면 고개를 빼꼼하게 내밀었다. 껌 하나를 사면, 가무잡잡한 손으로 껌 표지 위에 쌓인 먼지를 슥슥 닦은 다음 건넸다. 그게 싫기도 했거니와, 맘에 드는 과자도 없어서 우리는 신작로까지 모른척 달려 지나곤 했다. 그걸 빤하게 아는 수퍼 할머니는 우리가 모른척 지나가면 다 안다는 듯이 한마디씩 싫은 소리를 했었다.


나의 분명한 기억들과 감정의 동요는 경원동에서 시작된다. 풍남국민학교를 다니고, 덕진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내가 살았던 동네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가족이나 나처럼 고만고만하게 사는 줄 알았지만, 실은 전주에서도 몇 안되는 가난한 동네였던 곳.. 그래서인지 골목은 산동네를 닮아 무척 길고 복잡했다. 우리 집은 골목에서도 가장 안쪽 집이었고, 한 면은 당시의 전북대병원에 맞닿아 있었다. 그 집에는 할머니가 살고 계셨고, 우리는 할머니와 살림을 합치는 셈이었다. 슬레이트 지붕의 멋없는 네모진 집에 방이 다섯개였다. 그 중 두 개는 우리 가족이 쓰고, 나머지는 각자 세를 내었다. 좁다란 마당 맞은편에는 지붕낮은 기와집이 있었는데, 거기 역시 세를 냈다. 대문옆 마당 공간에는 작게 정원을 만들었다. 하지만, 말이 정원이지 따뜻한 계절마다 피우는 꽃 말고는 아궁이에서 열렬하게 타오르다 결국 차갑게 식어버린 연탄재가 가루로 부서져 쌓이는 자리였다. 구석진 방을 할머니가 쓰시고, 가운데 큰 방을 다섯식구가 썼다. 가난한 동네의 골목 제일 깊은 집으로 세를 들어오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가난한 학생들이거나.. 네 식구가 사는 단칸방의 가장은 새벽이면 술에 취해 대문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질렀다. 대학생이 된 시골청년은 제 방이 생겼다는 기쁨에서인지 친구들을 수시로 불러 밤새 떠들었다. 나이든 할머니와 함께 세들어 온 삼촌뻘 아저씨는 일을 했다가 안 했다가 하면서도, 수시로 사고를 치는 듯 했다. 아들을 걱정하는 그 할머니의 머리는 우리 할머니 머리보다 훨씬 새하얗고 듬성했다.


동네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는 학교를 마치면 수시로 모여 동네를 뛰어다니며 숨바꼭질을 하고 막가맞추기를 했다. 골목이 복잡하고 길다보니,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까지만 숨어다니는 걸로 하자는 약속을 미리 해야만 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해가 저물기 직전까지 뛰어다니며 놀았다. 골목은 넓고도 좁아서, 해질녘 어느 집에서 ‘누구야!’ 라고 크게 부르면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함께 놀던 우리들 중 그렇게 호출된 아이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저녁이 되어 하나하나 호출되어 집으로 사라지다 보면 해는 더욱 저물었고, 대여섯 명이던 아이들은 한두면으로 줄었다. 결국 골목은 자연스럽게 사람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골목은 복잡하지만 어디로든 출구가 있기 마련이었다. 가장 가까운 출구로 나가면 골목을 끼고 양 옆으로 수퍼가 하나씩 있었다. 그 옆으로는 잡지 집하소가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문구를 보았다. 아마 신동아 같은 잡지 신간포스터였을 것이다. 시청 쪽으로 조금 걸으면, 항상 냄새가 좋았던 중국집이 있었고, 그 옆으로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발소가 있었다. 반대쪽 골목 출구로는 가톨릭회관이 있었고, 내가 종종 끌려가던 작은 의원이 있었으며, 엄마 서랍장에서 오십원을 몰래 꺼내 주변 눈치를 보며 들어갔던 작은 오락실이 있었다.


경원동은 내 어릴적 삶과 감정을 담은 깊고 넓은 그릇이었다. 동네는 나직하지만 수시로 시끄러웠고, 사람들은 존재감없이 분주하고 흔들렸다. 시큰둥한 세상 속에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했다. 그 안에서 나도 몸이 뒤흔들렸고, 감정이 빈 그릇 속 구슬처럼 방황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딱 그 만큼의 그릇 속에 담겨 덜그럭거리는 그릇에 맞춰 흔들리고 뒤엉키며 살아냈다. 그것은 반쯤 규정된 삶의 모습과 뒤엉킨 폭 만큼의 생각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그런 사실들을 굳이 말해주지 않은 채 어른들은 흩어지거나 사라졌다. 그릇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나온 우리들은 어떤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는가에 상관없이, 그 시절의 경원동에 각자의 길이와 굵기만큼의 뿌리를 박아두고 살고 있다. 그리고, 2차선의 신작로가 살던 동네를 정확히 두동강 낸 지금, 기억 속의 동네는 모두 흩어져 인적없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여느 동네처럼 모든걸 싹 밀어버리고 쳐다보기가 고개아플 정도로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다면 모를까, 도로를 중심으로 양 옆에 남은 폐허는 발이 닿을 수 있고 가늠할 수 있는 시선이 닿을 수 있어 가슴이 더 아팠다. 2월의 추운 어느날 이른 아침,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로 그 폐허를 서성였다. 오래도록, 조각나 찌걱이는 유리파편들을 밟아가며, 겨울바람에 말라 널부러져 버석이는 덤불들을 밟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