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기행(3) - 꿈(1)

by 전영웅

너는 길을 걷고 있었어. 자주 지나다니던, 전주 시내의 어느 도로변이었지. 네가 왜 길을 걷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 엄마의 심부름일 수도 있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었어. 아니면, 친구를 만나거나 그냥 어딘가로 놀러가는 중일 수도 있었겠지. 여튼, 너는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걸었어. 도로에는 듬성듬성 차가 지나고 있었고, 가로수 안쪽의 네가 걷는 인도에는 네가 종종 가던 구멍가게와 문구점도 보였어.


네가 돌아야 할 길모퉁이가 가까이 보였지. 네가 가는 목적지는 그 길모퉁이를 돌아 가야했기에, 너는 여전히 가벼운 마음으로 그 길모퉁이까지 걸어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어. 순간, 너는 멈칫했지. 길모퉁이를 돌면 역시나, 그리고 당연하게도 네가 아는 그 길이 나와야 하는데, 길모퉁이를 돌아 보이는 풍경은 네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생소한 길이었어. 아, 뭔가가 잘못된 것인가? 뒤돌아 왔던 길을 돌아보았지만, 지금까지 온 길은 네가 알던 길이 맞았거든. 다른 길인가? 싶어 선 모퉁이 자리에서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네가 가야 할 길은 그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돌아 가는 길이 맞았던 거야. 다른 길들은 분명히 네가 가야 하는 목적지로 가는 길이 아니었고 말이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너는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지. 그런데 불안은 너무도 익숙한 느낌이어서, 마치 자주 들고 다니던 실내화가방 같았지. 전혀 모르는 길을 가야 하는 부담과 두려움은 가득한데, 불안은 가슴 한 쪽에 익숙하게 쥐어졌어. 불안이 얹힌 얼굴은 조금 굳어진 채로, 너는 걷기 시작했어. 너는 분명하게 이 방향으로 걸어야만 했거든. 뭔가 잘못됐지만, 네가 알기로 한 블록만 걸은 뒤에 길건너 좌측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이 길은 얼른 벗어나자고 마음먹었지.


두근거리는 마음과 불안을 손에 쥐고, 너는 뻣뻣한 걸음으로 건널목의 길을 건너 좌측 길모퉁이를 돌아 다른 길로 들어섰지. 순간, 너는 다시 걸음을 멈추었어. 불안은 두 배가 되었고, 두근거리던 가슴은 이제 쿵쿵거리기 시작했지. 여기는 분명 네가 알던 길이야. 그런데, 이 길에서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그 길이 아니었어. 마치, 다른 곳에 있던 네가 아는 길 한 구간이, 공간이동을 하여 서로 자리를 맞바꾼 것처럼,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네가 아는 그 길이 눈 앞에 펼쳐진거야. 대체 이게 뭘까.. 계속 걸어가야 하나, 네가 알던 대로 길을 걸어가면 가려던 목적지엔 도착할 수 있을까? 너는 마치 길을 잃고 떠도는 아이처럼 외로움까지 느끼기 시작했지. 그럼에도 걸어야 했던 너는 아는 길이지만 걸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 길을 천천히 걸어나갔어. 오줌이 마려운 것도 아닌데 오금이 저리고 무릎은 뻣뻣해서, 걸음이 앞으로 잘 나아가질 않았어. 표정은 좀 굳었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다른 아이들처럼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어. 다른 아이들 같으면 아마 그 자리에 서서 목놓아 울거나 엄마나 아빠를 찾았을 거야. 마치 그래서는 안된다고 다짐한 것처럼, 두려움 가득한 굳은 표정의 얼굴과 뻣뻣해진 목으로 그저 앞만 보는 채로, 너는 꾸역꾸역 걸음을 옮겨 앞으로 걸어갔지. 아는 길의 아는 가게들과 간판들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듯 했어. 어서 이 길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다짐만이 가득한 얼굴이었거든.


사실 이런 일은 한 두번이 아니었지. 너에게는 말이지.. 너는 길을 걸을 때마다 매번 같은 일들에 시달렸어. 길모퉁이를 돌아 알고 있어 생각했던 그 길이 나오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면서 편안하게 길을 걸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안을 손에 쥐고 두려운 마음과 경직된 얼굴과 뻣뻣한 다리로 겨우겨우 그 길을 지나곤 했었지. 그래서 그런지, 너는 돌아야 할 길모퉁이만 앞에 두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댔어. 설레는 두근거림이 아니라 불안의 두근거림 이었지. 불안은 그래서 너에겐 잃어버리면 안되는 실내화 가방이나 옆에 달싹 붙은 친구같은 존재가 되어버런 건가보다 싶었어.


길은 대체 왜 그랬을까? 어쩌자고 얌전히 길 가는 너에게 그런 장난을 치는 것이었을까? 너를 둘러싼 세상을 누가, 마치 너를 곯려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퍼즐바꾸듯 길을 바꾸는 것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게 어떤 존재인지, 왜 그러는 것인지 알지 못해. 너는 끝까지 길을 걸어야만 했어. 너는 어서 네가 원하는 곳에 도착해서 이 두려움을 끝내고 터질듯 뛰는 가슴을 빨리 진정시키고 싶었거든. 불안은 익숙하지만, 항상 곁에 두거나 거머쥐고 싶은 감정은 아니었어. 어서 떨쳐내고 싶었을 뿐이야. 차라리, 막다른 길을 만들어 더 이상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해놓고, 네가 주저앉아 결국 울음을 터뜨리면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지. 하지만, 저 멀리 위에서 너를 바라보며 퍼즐을 움직이는 존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야.


너는 기어이 걸어 다시 길모퉁이를 앞두고 있었어. 제발, 네가 생각하는 그 길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온 마음을 다해 바라고 있었어. 그리고 길모퉁이를 돌아 우측으로 시선을 돌렸지. 아, 이번엔 천변이네.. 길 옆으로는 버드나무가 간간히 늘어선 전주천변이 보였어. 작은 도로가 너와 천변사이를 가르고 있었고, 너는 역시 아는 길이지만 나와서는 안되었던 그 길을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걸어갔어. 너는 불안과 두려움이 쌓여 점점 지쳐갔어. 억지로 걷느라 다리도 아프고, 목이 살짝 마르기도 했지. 그렇게 힘들어하며 걷는데, 마침 놀이터가 보였던 거야. 정글짐도 보이고, 네가 좋아하는 시소도 있었지. 잠시 정글짐 봉 하나에 걸터앉아 다리를 쉬고 있다가, 마주앉을 친구도 없는 시소에 앉았다 하며 놀이터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지. 불안과 두려움은 조금 가벼워졌어. 아, 여기서 걸음을 멈추면 안될까? 그만 걷고 여기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너는 다시 불안을 손에 쥐고, 두려움을 가슴에 담고 길을 걸어야만 했어. 이제는 네가 심부름을 가는지, 아니면 어디로 놀러가는 것인지, 아니 그냥 집으로 가는 길이었던지 조차 잊어버렸지. 아니, 그냥 길을 걷는 목적을 일부러 망각해버린 것 같았어. 마치 그냥 길을 걷는게 원래의 목적이었던 것처럼.. 그냥 길을 걸으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게 너의 목적이자 누군가의 순수한 의도인 것처럼..


다시 길모퉁이를 돌아 계속 걸었어. 다리는 아픈데, 이 길이 맞는 것인지는 모를 익숙한 길이 다시 시작되었지. 그냥 걸었던 것 같아. 약간의 체념 비슷한 것이 생겨서 너의 두근거리는 가슴은 약간 덜해졌고, 불안은 익숙함에 좀 더 가까워졌어. 그러다가 길 옆의 가게 안쪽에서 너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 아빠였어. 고개를 돌리니 아빠가 너를 보고 웃고 있었고, 그 옆에 같은 표정의 엄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아, 이제 끝났구나.. 나는 얼른 안으로 들어가 아빠와 엄마 앞에 섰어. 한결 편해졌지. 그런데 뛰는 가슴은 여전했고, 불안은 가벼워졌는데 역시 여전했어. 마치 걸어야 하는 길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다시 길에 나서기를 재촉하는 것처럼..


너는 눈을 떴어. 머리맡은 축축해서 땀으로 젖은 베개가 차가웠어. 가슴은 미친듯이 쿵쾅거리며 뛰고 있어서,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방금 마친 기분이었어.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까지 뒤집어썼는데, 얼굴에 닿은 젖은 베개의 차가운 촉감에 기분이 좋지 않았어. 조금 떨어진 옆으로는 새벽까지 일하고 들어오신 아빠가 등을 돌린 채 세상모르고 주무시고 계셨고, 엄마는 미닫이 문 너머 부엌에서 아침준비하느라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를 내고 계셨지. 어떤 날은 엄마도 모로 누워 세상모른채 주무시고 계셨던 것 같아. 너는 쿵쾅거리는 가슴과 끄트머리가 남은 불안을 안고 이불 속에서 가만히 누워있었어. 가슴과 기분이 진정될 때까지.. 엄마나 아빠를 차마 소리내어 부르지 못했어. 모로 누운 엄마 품으로 파고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주무시거나 아침을 준비하는 아빠 엄마를 배려하기 때문은 아니었어. 너는 엄마 아빠를 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말이 사실에 가까웠을 거야. 너는 어린 시절만이 가능한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거든. 그래서였을거야. 쿵쾅거리던 가슴과 단숨에 잠을 깨운 불안을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알아서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던 그 모습 말이야.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겨우 찾아온 나머지 잠을 아침잠으로 써버렸지. 엄마가 아침먹으라고 소리쳐 깨우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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